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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31)화 (31/110)

#031

누군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적이 있던가?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토파즈는 늘 혼자 맞서 싸우거나 누군가를 지키는 입장이었다. 토파즈의 앞을 막아설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고, 토파즈도 그걸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 검을 쥐기 시작했으므로.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어서였어?”

“뭐가요?”

“아까 겁도 없이 내 앞을 막아선 게.”

“아아.”

카르옌이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웃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고갯짓을 따라 흔들렸다.

“글쎄요. 그런 계산은 할 새가 없었네요. 마법 쓸 생각도 못 했으니 말 다 했죠.”

“…….”

“하지만 토파즈님이라도 그러셨을 거잖아요. 비수가 날아오는 방향이 저였다면, 제 앞을 막아서셨을 것 아닌가요?”

“난 그럴 능력이 되니까.”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겠지만 지극히 사실 적시에 가까웠다. 토파즈는 무모하게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실력과 상황을 고려하여 행동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르옌은 목을 울려 나지막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절 보호해 주시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도 토파즈님께 폐만 끼칠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습니다.”

카르옌이 새하얀 손끝을 제 왼쪽 어깨에 가져다 댔다. 상처 주변을 덧그리던 그는 자신의 피부가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언가를 세로로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 혹은 문양은 어깨부터 팔뚝을 지나 팔꿈치 위까지 빼곡히 채워졌다.

이내 어깨를 붉게 가로지르고 있던 상처가 눈에 띄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우둘투둘하게 찢어져 있던 살갗은 꼭 오래된 흉터처럼 변하더니 이내 흉터마저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

이 정도로 완벽한 치유 마법은 처음 보았다. 단순히 피를 멎게 하거나 상처를 봉합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쳤던 적이 없는 것처럼 완전히 아물었다. 토파즈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의아해져 물었다.

“이 정도로 쓸 수 있으면 끙끙 앓지 말고 진작 치료하지 그랬어.”

“음, 그게…….”

카르옌은 느릿하게 말문을 열더니 미소 지었다. 어쩐지 민망한 기색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제가 물론 능력은 되지만…… 아무래도 지금 몸 상태로는 좀 무리해야 해서요.”

“뭐?”

생각해 보니 그랬다. 최근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써대서 방심할 뻔했지만, 이놈은 얼마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환자였다. 이 정도 수준의 치유 마법은 사지가 멀쩡한 마법사라도 적잖은 기력이 소모될 것이 뻔했다.

토파즈가 미간을 팍 찌푸리자 카르옌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봐야 옷 아래에 숨겨져 있던 건장한 어깨가 다 드러난 참이라 조금도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치유 계통 마법에는 유독 재능이 없기도 하고요……. 그래도 연습을 많이 해서 쓸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는데……. 몸이 더 괜찮아지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자신의 쓸모를 호소하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카르옌이 눈꺼풀을 깜빡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고 있었다.

“이 저주가 달가웠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요즘 들어 더 답답하게 느껴지네요.”

“…….”

“빨리 저주를 풀고 싶어요. 꼭 그때처럼 간절하게…….”

카르옌이 반쯤 수마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곧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고꾸라지듯 잠들었다. 잠보다는 기절에 가까워 보이는 모양새였다. 단언컨대 토파즈가 아는 마법사 중 가장 뛰어나면서도 가장 병약한 마법사였다.

“하아.”

토파즈는 뒤늦게 방으로 들어온 하란이 반쯤 벗은 카르옌의 상체를 보고 기절하지 않도록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 * *

새벽녘, 토파즈는 조용히 응접실로 나왔다. 응접실에 붙어 있는 발코니가 그의 목적지였다.

토파즈는 발코니로 나가 밖을 살폈다. 새벽의 거리는 고요했다. 그들의 방은 여관의 꼭대기라 아래를 살피기 편했다. 반대로 지붕과도 가까웠다.

토파즈는 발코니의 철제 난간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지붕에 손을 뻗어 그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토파즈를 붙들었다.

“달밤에 혼자 산책이라도 가시려고요?”

“…….”

캄캄한 응접실 구석에 하란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못 본 척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토파즈는 난간 위에 균형을 잡고 선 채 물었다.

“설마 외출도 허락받고 해야 해?”

“허락은 필요 없어도 상의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임시라고는 해도 동료니까요.”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뾰족한 눈빛이었다. 꼭 처음 숲에서 만났을 때 같았다. 품은 것은 적의라기보다는 의심과 경계에 가까웠다. 토파즈가 피식 웃었다.

“왜. 내가 어디 가서 너희 정보라도 팔아넘길까 봐 걱정돼?”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습니다.”

“늘 내가 언제 뒤통수를 칠지 기대하는 눈빛이길래.”

“…….”

하란이 자신에게 유독 날을 세운다는 점은, 그리고 둘만 있을 때면 대놓고 티를 낸다는 점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토파즈는 피식 웃어넘겼고 하란은 더욱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토파즈는 하란처럼 자신을 경계하는 쪽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의미 모를 신뢰를 보이는 사람이 훨씬 수상했다. 예를 들면 카르옌처럼.

“못 믿겠으면 같이 가든지.”

“혹시 이대로 으슥한 곳에 가서 절 죽일 속셈이신가요?”

“내가 굳이?”

하란은 미간을 구겼으나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뒤를 따랐다. 계획에 없던 동행이었다.

두 사람은 차례대로 지붕 위로 올라갔다. 하란은 밤손님처럼 지붕 위를 타고 다니는 행동이 낯설어 보였지만 기사답게 금세 적응해 내달렸다.

“그 정보상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잘 아네.”

정확히는 정보상 겸 해결사였다. 원래는 수도 출신인데, 모종의 이유로 수도에서 쫓겨나다시피 해 다른 곳을 전전하다가 넨베르그에 자리를 잡았다고 들었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남의 정보 팔아서 먹고사는 인간이 믿을 만할 리 있겠어?”

“그렇다면 그 사람 앞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카르옌이나 메르디나도 마찬가지로요.”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유명인사인가 보네.”

“그 정도라면 당신에게도 숨겼겠죠. 하지만 정보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란은 토파즈를 따라 달리며 망설이듯 덧붙였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는 거지만, 저는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잘못하면 역으로 저희 정보가 샐 가능성도 있어요.”

“그럴 수 없게 해야지.”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한 블록 전에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이내 토파즈가 들어간 곳은 평범한 선술집이었다. 나무로 된 외벽은 낡았고 술잔 그림이 그려진 간판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가게 안은 북적였다. 테이블 앞에 서거나 벽에 기대어 서서 술을 홀짝이던 사람들은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자 흘깃 시선을 주었다.

토파즈는 벽에 늘어선 오크 통을 지나 저벅저벅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긴 널빤지 테이블 앞에 서서 부지런히 술잔을 내려놓고 있는 종업원에게 대뜸 말했다.

“933년산 벨론드 한 잔. 풍미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토파즈의 말에 종업원이 힐끔 눈을 들어 토파즈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흰 분필로 테이블 위에 뭔가를 표시하더니 옆에 서 있던 다른 종업원에게 귓속말했다.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온 종업원이 정중히 말을 걸었다.

“손님, 지하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은 주방과 가까운 벽의 나무 문을 옆으로 밀어서 열었다. 벽과 같은 거친 나무 무늬인데다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기에 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기 힘들었다.

문을 열자 그 너머에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종업원은 앞장서는 대신 두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고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분명 조금 전에 ‘지하’로 안내하겠다던 종업원의 말을 들었을 텐데, 토파즈는 아래층이 아니라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란은 의아했지만 눈치껏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는 듯 뒤에 서 있던 종업원이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주문하신 메뉴는 가장 오른쪽 방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 방 앞에 선 토파즈가 문손잡이 위에 손을 올리고 하란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문손잡이를 아래로 느긋하게 당기더니, 이내 손짓과 상반되는 움직임으로 문을 벌컥 찼다. 경첩이 통째로 빠지며 문짝이 그대로 방 안으로 떨어졌다. 이 도시에서만 두 번째로 날아간 문짝이었다.

그 사이 토파즈와 하란은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방 안을 겨누었다. 토파즈는 하란에게 뒤를 맡겨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검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울리다가 조용해졌다.

방 안은 소박한 외관과 1층의 모습을 봤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괴이쩍은 분위기였다. 낮은 조도의 불빛이 여기저기에서 일렁였다. 불이 사방에 밝혀져 있는데도 어두침침한 느낌이 났다.

넓지는 않지만 응접실 비슷한 용도로 보이는 공간이었는데, 바닥에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듯한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기묘한 무늬의 태피스트리와 액자 같은 장식이 정신없이 매달려 있었다.

화려함과 음침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방 가운데에 긴 흑발을 늘어뜨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깨 옆으로 양손을 들어 올린 그의 목에는 토파즈의 검 끝이 살벌하게 닿아 있었다.

그런 토파즈에게 방 안에 있던 다른 여자가 검을 겨누고 있었고, 하란의 검 끝은 또다시 그 여자의 등을 겨누고 있었다.

떨어진 문짝을 맞고 쓰러졌던 나머지 한 사람이 코피를 닦으며 일어나 무기를 쥐려고 하자 토파즈가 경고하듯 여자의 목에 닿은 검 끝을 툭, 움직였다.

동시에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는 이들 덕분에 흑발의 여자가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여자는 위협당하는 처지와는 어울리지 않도록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5년 전에 딱 다섯 명에게만 알려 준 암호를 누가 지금 쓰는지 궁금해서 불렀는데, 무덤에서 튀어나온 유령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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