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솔직한 감상은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잘못 피했다가는 제 뒤에 숨은 소년이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피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스란히 맞아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깟 비수 하나쯤 맨손으로도 잡을 수 있었고, 설령 잡지 못한다 해도 살갗이 베이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한 놈이 대신 처맞고 어깨가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꼴을 보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찾았어요!”
용감하게도 기절한 이고르의 옷가지를 뒤지던 소년이 팔을 번쩍 들었다. 온종일 찾아다닌 붉은 비단 주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소년이 주머니를 들고 달려왔다.
“이 안에 지혈할 때 쓸 만한 거 있는지 말해.”
“있어요. 안에 손을 넣고, 꺼내고 싶은 물건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떠올려 보세요.”
시키는 대로 붕대와 지혈제를 떠올리자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쥐고 꺼내자 텅 비어 있던 주머니에서 희고 깨끗한 붕대와 지혈제가 딸려 나왔다. 허락한 사람만 물건을 꺼낼 수 있다더니 언제 그 명단에 토파즈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소년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토파즈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태평하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살갗이 베어 피가 흐르는 어깨에 지혈제를 뿌리고 그 위로 붕대를 감았다. 어깨 부위라 붕대를 어깨부터 팔까지 칭칭 감아 놨더니 얼핏 보면 어디 한 군데 잘못된 사람처럼 보였지만, 과한 것이 모자란 것보다는 나으리라.
토파즈는 별안간 피를 토하더니 픽 쓰러져 버리던 마법사의 모습을 아직 잊지 않았다.
……마법사. 그러고 보니 마법사였지.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다던. 토파즈가 미간을 좁히며 쳐다보자 카르옌이 빙긋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열받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 있었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아마 토파즈 자신이 입었다면 그냥 스친 정도라고 여길 상처. 그러나 그걸 누군가 토파즈 대신 맞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너 다시는 이런 같잖은 짓 하지 마.”
“…….”
“대답 안 해?”
“불확실한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긋하게 말하면 다 고운 말인 줄 아는 저 입술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너…….”
“그런데 이 꼬마, 기부금 없이도 신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을 돌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잘못 봤나 했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카르옌의 상처와 계단참을 번갈아 살피고 있던 소년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작은 손끝에서 흰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길에서 대충 주운 돌덩이가 황금일 확률은 몇이나 될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토파즈가 단호히 답했다.
“당연히 없지.”
“그렇죠. 그런데 한없이 영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여기에 금덩이가 있네요.”
하란이 꼬질꼬질한 소년을 양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소년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제가 금을 훔쳐 갔다는 오해는 많이 받아봤는데…… 지금 그 얘기 하시는 거 아니죠?”
“응, 아니야.”
그들은 방금 이고르 일당의 아지트를 뒤집어엎고 나온 참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다가 카르옌의 상처를 보고 기절할 듯 놀란 하란은 길길이 날뛰었다.
‘안에서 소란이 있었으면서 왜 신호를 주지 않았습니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카르옌이 다쳤지 않습니까.’
네 친구가 갑자기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의뢰인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래, 내 실수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지.’
‘…….’
‘하란. 멀쩡한 사람 어린애 취급은 그만두고 진짜 어린애나 좀 살펴보지 그래?’
그 말에 고개를 돌린 하란은 토파즈의 뒤에 쭈뼛거리며 서 있던 소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더니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 아이,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게 맞아요.”
“확실해?”
“네. 이래 봬도 제가 신학교 출신이라 신성력을 다른 것과 착각하지는 않습니다.”
“신학교?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으나 하란은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픽 웃으며 제 귓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하란의 오른쪽 귀에 달린 귀걸이가 마름모꼴이었다. 하늘과 땅을 잇는 형태의 뾰족한 마름모는 다프닌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상징물 중 하나였다.
“대대로 독실한 성직자 집안 자식이라 식사 전에는 기도를 하고, 술도 마시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매번 술을 입에도 안 댄 거였나? 안 그런 척하면서 경계심이 심한 성격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식사 전 기도는 네 마음대로 생략한 것 아니었나.”
“한 마디든 두 마디든 어쨌든 하긴 하는 거잖아.”
메르디나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꼴이 어딜 봐도 독실한 신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냉소적인 무신론자라면 모를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르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따지면 신학교 출신은 아니지, 하란.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못 했으니까. ‘너 같은 애는 교황의 아들이라도 신관이 될 수 없으니 당장 꺼져라’라고 학장이 소리를 질렀다고 하지 않았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기억력이 워낙 좋아서 어쩔 수 없네.”
하란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귀한 몸에 상처가 생겼다고 노발대발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신학교 퇴학생이 보기에는 신성력이 확실하다?”
토파즈가 묻자 하란이 이마를 짚었다.
“퇴학당한 건 사실이지만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은 있어요. 저한테도 있는 걸 잘못 알아볼 정도로 멍청이도 아니고요. 이게 신성력이 아니라 마법 같은 거라면 카르옌이 알아봤을 겁니다.”
“원래 신성력이라는 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잠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발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 아이도 그런 경우 같네요. 아직 다룰 줄 모르니 진짜 신관들처럼 치료는 무리겠지만요.”
카르옌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하란의 흑역사를 기억하고 있던 덕분에 진실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소년이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소년은 제 손끝에서 손톱만큼 일렁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흰 빛을 보며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원망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 * *
카르옌은 돈을 되찾은 기념으로 사치를 해댈 셈인지 여관에서 가장 큰 방을 턱 하니 빌렸다. 방 세 개에 욕실 두 개, 응접실까지 딸린 방이었다.
“형……. 부자 맞았네요.”
이제 와서 혼자 내버려 두기도 난감해 숙소까지 데려온 소년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토파즈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난 부자여도 이런 돈지랄 안 해.”
정작 돈지랄의 장본인인 카르옌은 뭐가 문제냐는 듯 방긋 웃었다.
낯설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소년은 욕실을 내어주자 뜨거운 물로 목욕을 마치고 토파즈의 방에서 곯아떨어졌다.
씻겨 놓으니 갈색에 가까운 줄 알았던 머리칼은 오히려 금발에 가까웠다. 피부는 푸석하고 머릿결도 거칠었지만, 동그란 눈동자 때문인지 때를 벗겨 놓은 얼굴이 제법 총명해 보였다. 혼자 씻으며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었지만 모르는 척해 주었다.
토파즈는 카르옌과 하란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듣기 전에 벌컥 열어젖히자 왼쪽 침대에 누워 있던 카르옌이 고개를 들었다. 하란은 방 안에 없었다.
토파즈의 얼굴을 확인하고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키는 뺨이 불그스름했다. 목욕을 하고 나와서 그런가 했지만 그보다는 열이 오른 얼굴에 가까워 보였다. 신관이나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자고 할 때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더니…….
“토파즈님? 어쩐 일이세요. 역시 저와 함께 방을 쓰고 싶어지셨나요?”
이불을 젖히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멀쩡한 것 같기도 했다.
“네 룸메이트는?”
“메르디나의 방에 갔을걸요. 저 몰래 둘이 작당하는 게 일상이거든요.”
“네가 벌인 일의 뒷수습을 하는 거겠지.”
토파즈는 일어나려는 카르옌을 만류하며 침대 가까이에 가서 섰다. 두 침대 사이에 뚫려 있는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옷 벗어 봐.”
“……네?”
“상처 좀 보게 벗어 보라고.”
“아.”
카르옌이 입술을 벌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는지 의도를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토파즈는 기다리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뻗었다. 곧은 목 아래로 꽁꽁 싸맨 옷자락을 어깨 아래로 끌어내리려는데 손이 가로막혔다. 손가락이 얽히며 시선이 마주쳤다.
“제가 하겠습니다.”
카르옌이 토파즈의 손을 얽듯이 잡아 무릎 위로 내렸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옷자락을 풀었다. 부스럭거리며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입 안이 버석하게 말랐다.
카르옌이 상의를 반쯤 벗어 어깨 아래로 내렸다. 툭 불거진 빗장뼈 옆으로 단단한 어깨가 쭉 뻗어 있었다.
늘 옷으로 가리고 있어서 몰랐는데, 목에는 웬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느다란 줄에 푸른색 돌조각 같은 것이 꿰여 있는 목걸이였다.
마도구인가? 투박한 모양새가 꼭 10년쯤 전 수도에서 유행했던 장신구처럼 생겼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필 새는 없었다. 옷을 완전히 벗은 카르옌이 붕대 위에 손을 얹었다.
흰 붕대를 풀자 매끈한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자상이 드러났다. 조금만 옆으로 빗겨나갔으면 뼈에 맞아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토파즈가 손끝으로 상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쓸었다. 상처라고는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듯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오늘 생긴 자상이 유일한 오점처럼 느껴질 정도로.
토파즈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등을 떠올렸다. 그 짧은 순간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자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