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카르옌.”
메르디나가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주의를 주었다.
황제의 눈이 닿지 않는 변방에서 크고 작은 비리가 횡행하는 것은 나라가 망할 정도로 큰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지에서 거둬들인 세금도 아닌 황제의 돈을 감히 떼어먹고, 가장 청렴해야 할 신전이 앞장서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은 추후 큰일로 번질지 모를 징조였다.
“그래서, 그 돈을 모으려고 우리 일행의 주머니를 털어간 거야?
하란이 테이블 위로 양손을 깍지 끼며 물었다. 소년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대단한 꿈은 꾼 적도 없어요. 누가 100실버나 되는 돈을 허술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겠어요?”
“…….”
100실버가 아니라 100골드쯤으로 추정되는 돈을 허술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닌 카르옌이 빙긋 웃었다. 토파즈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미묘한 기류를 읽어내지 못한 소년은 테이블에 닿을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남의 주머니 터는 짓은 정말 그만하려고 했는데…… 어제부터 꼬박 굶었더니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무릎 위에 올려둔 소년의 양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토파즈는 그 손을 잠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 주머니를 꼭 되찾아야 해.”
“네,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되찾으면 너한테 100실버 줄게.”
“네?”
소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정말이에요? 형 그렇게 부자였어요?”
언제 봤다고 ‘형’인지 모르겠다. 전혀 안 그래 보인다는 눈으로 토파즈를 훑어내리는 시선도 그렇고, 은근히 되바라진 꼬마였다.
“나 말고 얘가.”
토파즈는 옆자리를 턱짓했다. 지목당한 카르옌의 잇새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100실버가 뭐예요. 그 두 배도 줄 수 있죠.”
소년은 빈 주머니를 찾는 데에 왜 이렇게까지 열을 올리는지 궁금한 것 같았지만 더 묻지 않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주머니를 빼앗아 간 이고르 일당의 아지트가 어딘지 알아요. 예전에 친구한테 하도 들어서 구조도 대충 알고요.”
“그래. 그럼 안내해 봐.”
“어……. 안내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토파즈가 고개를 까딱였다.
“어떻게 하긴. 쳐들어가야지.”
* * *
토파즈가 문짝을 발로 찼다. 쾅! 발길질 한 번에 경첩째로 뜯어진 나무 문이 이고르 일당의 아지트 안을 덮쳤다.
“뭐, 뭐야!”
“누구냐!”
친절히 정체를 물으며 달려들던 이들은 토파즈에게 닿기도 전에 나가떨어졌다.
“으헉!”
토파즈의 어깨에 반쯤 접혀서 빨래처럼 걸쳐져 있던 소년이 비명을 내질렀다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거친 싸움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이건 그냥 구타였다. 어른과 어린애의 싸움도 이토록 일방적이지는 않으리라.
눈 깜짝할 사이에 1층의 상황이 정리되고 그 뒤로 카르옌이 들어왔다. 카르옌은 유유자적하게 건물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태도 탓인지 꼭 그가 있는 곳만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소년은 카르옌을 힐끔 살피다가 눈이 마주친 듯해 얼른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후드 아래로 슬쩍슬쩍 비치는 하관만 봐도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인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제일 무서웠다.
차라리 대놓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토파즈 쪽이 덜 어려웠다. 의외로 친절한 것 같기도 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감싸주고 있는 단단한 팔을 보며 소년은 그의 어깨에 더 꼭 매달렸다.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데도 꽤 안정감이 있던 덕분에 소년은 바닥을 나뒹구는 일당의 면면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 이 동네에서 한 번쯤 마주친 못된 놈들이었지만, 가장 찾는 이는 없었다. 이들은 손에 들어오는 동전 한 닢까지 모두 대장인 이고르에게 바쳤으니 오늘 소년에게서 빼앗아 간 주머니도 그에게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때 2층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눈을 크게 뜬 소년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저 자식이 이고르예요!”
이고르는 덩치가 크고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깨어난 듯한 얼굴이었지만, 1층의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도로 뒤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꽉 잡아.”
토파즈가 짧은 말만 내뱉고는 단숨에 2층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하자 창문 밖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있는 이고르의 모습이 보였다.
이고르는 험상궂게 생긴 데다 언행도 난폭해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소년을 비롯한 빈민가 아이들은 이고르 일당을 먼발치에서라도 마주치면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 앞에서 줄행랑치기 바쁜 모습을 보니 어쩐지 허탈해졌다. 눈앞의 토파즈에 비하면 이고르 따위는 정말 그저 그런 양아치라는 사실이 와닿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고통받았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헉!”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이고르가 고개를 내밀고 있던 창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조금 전까지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목이 끼일 뻔한 이고르가 반쯤 주저앉았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알았는지 험상궂은 얼굴을 구기며 태도를 달리했다.
“너희는 뭐야! 누가 보냈어? 내가 누군지 몰라?”
토파즈는 대답 대신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소년의 옆구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년은 토파즈의 다리를 끌어안다시피 매달리며 뒤로 몸을 숨겼다. 토파즈가 고개를 까딱여 소년을 가리켰다.
“너희가 얘 괴롭혔다며.”
“뭐, 제기랄. 그 새끼가 누군데!”
퍽! 토파즈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펜을 주워서 던졌고, 펜은 날아가 이고르의 관자놀이를 스쳐 뒤에 있는 벽에 박혔다. 벽이 와지직,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허, 허억.”
“눈알 똑바로 뜨고 봐. 오늘도 얘 괴롭혔잖아.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면 나게 해 주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고르가 단숨에 공손해졌다.
“나, 납니다. 나요!”
“오늘 얘한테서 털어간 거 다 내놔.”
“뭐, 어떤 거 말하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옷장, 옷장 안에 있어서 꺼내려면 시간이 걸려요!”
“당장 꺼내. 하나도 빠짐없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쪽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이고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벽에 붙은 옷장을 향해 돌아섰다.
“앗. 여기 있……네!”
우왕좌왕하며 옷장을 뒤지던 이고르가 뒤를 돌며 팔을 힘껏 뻗었다. 그의 손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토파즈를 향해 날아갔다. 빗나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 보였다.
그 반짝이는 물체가 날카로운 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소년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도둑질이 떳떳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은 아니니 괜찮지 않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훔친 물건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다니. 무섭게 다그치지도 않고, 따뜻한 음식도 먹여 준 사람이었는데. 물건을 훔쳐 간 소매치기에게 100실버라는 큰돈을 준다는 약속도 했다.
그 약속을 완전히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처럼 지저분한 아이가 신전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비웃지 않아 준 것만으로 소년은 괜찮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소년은 있는 힘껏 토파즈를 밀치려 했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고 선 토파즈의 몸은 단단한 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안 돼……. 절망한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은 정말 구제 불능이었다.
소년이 절망하는 사이, 토파즈는 제 허리를 붙들고 선 소년을 감싸며 날아오는 비수 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발악해 봤자 별짓 못 할 거라고 얕본 것이 오판이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주제에 검을 꺼내 들 줄은 몰랐다. 더는 시간 끌지 않고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시야에 검은색 옷자락이 끼어들었다. 마법 한 번 쓴 이후로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카르옌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움직임이 쓸데없이 잽싸서 막을 새도 없었다. 카르옌이 토파즈의 앞을 막아섰다. 그 등이 제 몸을 다 가릴 정도로 넓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푹, 비수가 꽂히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렸다.
“너……!”
토파즈가 곧장 튀어 나가 휘청이는 카르옌의 몸을 받아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비수는 급소를 빗겨 가 왼쪽 어깻죽지에 박혀 있었다.
“너 미쳤어?”
토파즈는 카르옌을 바닥에 앉히고 후드부터 벗겨 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과 상앗빛 뺨, 내리깐 눈이 드러났다. 뒤에 선 소년이 무심코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옌은 제 왼쪽 팔뚝을 붙든 채 날렵한 비수가 꽂힌 어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많이 놀랐나 싶어 화를 누그러뜨리려는 순간, 카르옌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처웃어? 토파즈는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괘, 괜찮으세요? 치료를 해야……!”
그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외쳤다.
“이고르가 도망가요!”
소년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이고르가 빈틈을 타 계단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무기를 던진 놈부터 제압했어야 하는데 당연한 사실을 잊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머리가 뜨끈해진 탓이었다.
토파즈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낡은 촛대를 발로 찼다. 등을 돌리고 달려가다가 정확히 무릎 뒤를 맞은 놈이 그대로 엎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거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계단을 몇 칸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더니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절한 것 같아요.”
토파즈는 소년을 보며 잠시 눈썹을 까딱였다가, 일단 검으로 카르옌의 옷소매 부분을 썩둑 잘라냈다. 늘 옷에 감싸여 있던 어깨와 팔목은 곱게 자란 티를 내듯 매끈했다.
그러나 방금 어깨에 박힌 비수가 흉터 하나 없는 살갗을 꿰뚫고 있었다.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옷을 여러 겹 껴입은 덕분인지 아니면 상대의 실력이 별 볼 일 없어서인지, 칼날이 날카로운 데 비해 상처는 깊지 않았다.
토파즈는 칼날에 독 같은 게 묻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곧바로 비수를 뽑았다. 그리고 급한 대로 손바닥으로 지혈 점을 덮어 꽉 눌렀다.
“읏.”
찔릴 때도 소리 한번 내지 않은 카르옌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참아.”
제 귀로 듣기에도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카르옌이 조용히 눈꼬리를 내려뜨렸다. 토파즈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대체 넌 뭐가 문제야? 내가 이것도 못 피할 것 같았어?”
푸른 눈이 토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입가는 웃고 있었으나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네.”
“…….”
“피할 생각 없으셨잖아요, 토파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