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27)화 (27/110)

#027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한 제리는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며 토파즈를 재촉했다. 토파즈는 천근처럼 느껴지는 발을 이끌고 제리를 뒤따라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즈 3번가는 낮은 지대에 있는 데다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비만 오면 물이 발목까지 찰랑였다. 그 탓에 토파즈와 동생의 판잣집도 늘 아랫부분이 썩고 곰팡이가 피었다.

웅덩이를 헤치며 아이를 쫓아 달려가던 토파즈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낡다 못해 떨어지기 직전인 회색 신발이 눈에 보였다. 늘 왼쪽만 더 심하게 닳는 이유는 발을 끌듯이 걷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 신발이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아니……. 잠겨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이게 뭐지? 순간 세상이 반으로 쪼개졌다가 다시 붙은 것 같았다. 토파즈가 휘청거리며 발을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선명해졌다.

“가넷!”

동생이…… 가넷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때 탄 담벼락 아래, 창백한 그늘에서.

아이는 까맣고, 파랗고, 붉었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 있었고 입술은 새파랬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갈색 머리칼에 엉겨 붙어 있었다.

‘난 형 머리 색이 좋아. 꼭 장미 같아.’

동생은 제대로 씻지도 못해 먼지가 잔뜩 엉긴 머리칼을 보고도 종종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토파즈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썩은 장미?’

‘아니! 진짜 장미 말이야. 로즈 1번가 쪽에는 아직도 여름마다 담벼락에 장미가 피잖아. 그 말라비틀어진 장미보다 형 머리 색이 더 예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야.’

장밋빛. 아이의 머리칼은 그토록 좋아하던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릿한 쇠 냄새가 코끝에 닿는 순간 토파즈는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가넷은 빗물에 반쯤 잠겨 누워 있었다. 꼭 감은 눈과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뺨 한쪽이 차디찬 바닥에 닿아 있었다.

토파즈가 가넷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가는 동안 누군가는 오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아이를 보며 지나갔고, 누군가는 희미한 동정을 내비쳤으나 곧 외면하며 모른 체했다.

어제의 토파즈도 다르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시체를 보는 일은 흔했다. 바로 눈앞에서 죽는 모습도 숱하게 보았다. 그들은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토파즈는 시체와 사람을 너무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토파즈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빗물이 바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여름인데도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왜 여기 누워 있어. 또 앓으면 어떡하려고.”

빗물에 먼지가 씻겨 내려간 얼굴은 너무나 어리고 약해 보였다. 토파즈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동생의 뺨을 더듬었다. 뺨이 너무 차가웠다. 차가운데다 딱딱해서 꼭 사람이 아니라 도자기를 만지는 것 같았다.

“응? 가넷…….”

온기가 사그라든 몸은 토파즈에게 외치고 있었다. 네 동생은 이미 죽었다고.

“가넷…….”

가넷은 웅크리듯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토파즈는 아이가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꽉 끌어안고 있었는지, 그 자세 그대로 굳은 팔다리가 뻣뻣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토파즈가 빈틈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 바스락 소리를 듣자마자 동생이 목숨처럼 끌어안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누런 종이 포장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빵이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거친 맛만 나는 딱딱한 빵. 가장 값싼 빵이었지만 그마저도 살 돈이 없어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올리브 거리에서 ‘몬스’라는 이름의 작은 빵집을 하는 몬스 아주머니는 빈민가 아이들을 가엾게 여겨 가끔 팔고 남은 빵을 나누어 주고는 했는데, 특히 가넷을 예뻐해서 꼭 한두 개씩 따로 빼 놓았다.

빵을 받으면 저 혼자 먹어 치우고 ‘오늘은 한 덩어리만 받았다’라며 시치미를 떼도 될 테지만 가넷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배고파 숨이 넘어갈 것 같아도 토파즈가 올 때까지 빵 두 쪽을 손에 꼭 쥐고 기다리고는 했다.

‘형. 몬스 아주머니가 오늘도 빵을 주셨어. 얼른 먹자.’

‘배고팠을 텐데 너 먼저 먹고 있지.’

그런 말이라도 하면 동생은 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형도 나 때문에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다가 오는 거면서. 됐으니까 빨리 앉아. 형이랑 같이 먹어야 맛있어.’

물에 불어 축축해진 빵을 끌어안은 가넷은 여느 때와 달리 아무 표정이 없었다. 해맑게 재잘거리던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굳어 있었다.

토파즈는 손을 뻗어 작은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았다. 그러나 그의 손도 고작 어린애의 손일 뿐이라 빗물은 속절없이 손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차가운 비가 동생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게 너무 원통해서, 토파즈는 빗물이 꼭 눈물처럼 흐르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누구야?”

한참 뒤에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울음기 대신 분노가 담겨 있었다.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던 제리가 숨을 들이켰다.

“어떤 새끼가 그랬는지, 봤어?”

“……봐, 봤어. 처음부터 본 건 아니고…….”

“네가 본 대로 다 말해 봐.”

제리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넷을 해친 것은 로즈 1번가의 불량배들 밑에서 앵벌이를 하는 애들 중 가장 머리가 큰 네 명이었다고 했다.

토파즈도 그들을 익히 알았다. 늘 우르르 몰려다니며 썩은 장미 거리 아이들의 골목대장 노릇을 자처하는 그들은 토파즈와도 부딪친 적이 몇 번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열다섯은 훌쩍 넘었다고 들었다. 어릴 때 이 뒷골목에 버려진 아이들이 그 나이까지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것은 생존력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생존력은 보통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어딘가 뛰어난 곳이 있든가, 혹은 악랄하든가. 그 애들은 후자였다.

그 애들은 가넷이 빵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몸 팔아서 얻어 왔냐’는 둥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제리의 말에 따르면 그런 괴롭힘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듯했다.

그중 한두 명은 ‘미친개의 동생이니 건들지 말자’라며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다른 둘은 그 말에 더 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강제로 빵을 빼앗으려고 하자 가넷은 저항했다.

“형을, 형을 줘야 한다고 했어. 형이 어제부터 굶었다면서……. 가넷이 생각처럼 순순히 나오지 않으니까 그 애들은 더 사나워졌어.”

그 작은 아이를 네 명이 둘러싸고 발길질을 했다고 했다. 일고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아니라 어른이라도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순간부터 가넷은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았어……. 뭔가 잘못된 걸 짐작한 그 애들은 뒤도 안 보고 도망쳤어. 내가 다가가서 코에 손을 대 봤는데 수, 숨을 안 쉬어서…….”

제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토파즈는 그가 가넷이 얻어맞는 모습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사내애들 네 명을 말리려고 끼어들었다가는 함께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 평소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가넷이 죽지만 않았더라면. 온몸이 엉망이 됐더라도 숨만 붙어 있었더라면.

“……미, 미안해…….”

대답하지 않자 제리가 눈치를 보며 사과를 건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리의 잘못이 아님을 알았지만 괜찮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토파즈는 차갑게 식은 동생의 몸을 끌어안았다.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는 두려움.

“그냥 줘 버리지, 그딴 빵조각……. 그게 뭐라고…….”

토파즈는 잇새로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났다. 아직은 울 수 없었다. 아파할 수도 없었다.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맞은 동생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 겨우 이 정도로 아파해서는 안 됐다. 토파즈의 눈이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다 죽여 버릴 거야…….”

‘형, 우리 나중에 크면 진짜 붉은 지붕 집에서 살자. 벽돌로 지은 집 말이야. 집은 작아도 좋지만 정원이 있었으면 좋겠어.’

‘정원? 너 설마 장미 심으려고 그래?’

‘당연하지!’

‘썩은 장미 거리에 살면서 너처럼 장미를 좋아하는 애는 없을걸.’

그렇게 말하며 토파즈가 웃었던가, 혀를 찼던가. 기억이 벌써 흐릿했다.

‘정원에 장미도 심고, 하얀 고양이도 키울래. 우린 그때쯤이면 하루 세끼 부드러운 빵을 배부르게 먹을 거야. 아예 빵집을 할까? 몬스 아주머니처럼 우리 같은 애들한테 빵을 나눠주면 좋을 텐데.’

가넷은 미래를 약속하기를 좋아했다. 지옥 같은 현재를 버티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을 테지만, 토파즈는 그 꿈같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 좋았다.

때로는 지나치게 허황된 꿈이라는 생각에 씁쓸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가슴 속에서 희망이 싹틀 때가 더 많았다.

어른이 되면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는 동냥을 하다가 누군가 내뱉는 침을 맞지 않아도 되고, 주머니를 털다가 맞아 죽을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하루가 그들에게도 주어질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

‘그래. 어른이 되면 꼭 그렇게 살자.’

그러나 이제는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이었다. 미래를 잃어버린 동생은 영원히 어린아이일 것이므로.

토파즈가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내가 복수해 줄게, 가넷.”

난 그 애들에게서도 미래를 빼앗을 거야. 네가 아팠던 만큼 아프게 해 주고, 네가 추웠던 만큼 춥게 해 줄 거야. 공평하게.

“그러니까 울지 마.”

토파즈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차가운 비가 등으로 떨어졌다.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 로즈 1번가 옆으로 흐르는 지저분한 개천으로 잊을 만하면 시체가 한 구씩 떠내려왔다. 물에 분 시체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 근처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소년들이라는 사실은 금방 밝혀졌다.

그 시체를 보고 슬퍼하거나 안타까이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골목에는 또 새로운 아이들이 버려졌고, 사라진 아이들은 누구도 찾지 않았다.

머지않아 토파즈는 썩은 장미의 거리를 떠났다. 공허한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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