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26)화 (26/110)

#026

로즈 1번가에서 3번가. 버젓한 이름이 있으나 사람들 모두 썩은 장미 거리 혹은 빈민가라고 부르는 곳이 토파즈의 고향이었다.

한때 장미꽃이 만발한 땅이었다는 그곳은 언제부턴가 수도 카샤프에서 가장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는 뒷골목이 되었다.

부자였다가 하루아침에 망한 사람, 삼대 전부터 가난했던 사람,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이 로즈 1번가와 3번가 사이에서 살아갔다.

일명 썩은 장미 거리에는 토파즈와 같은 아이들이 발에 차이도록 많았다.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의 이름을 누가 지어줬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그곳에서 살아남는 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동냥을 하거나 몸을 팔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 토파즈가 선택한 방법은 세 번째였다.

토파즈는 어릴 때부터 또래에 비해 키가 컸고 몸놀림이 날렵했다. 주먹도 셌으며 성질도 사나웠다.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으면 상대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물고 매달렸고, 동전 한 장을 빼앗기면 다음 날 반드시 두 배를 털어왔다. 그러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당한 만큼 되갚아줄 것. 그것이 어린 토파즈의 신조였다. 덕분에 토파즈가 어느 정도 자라 ‘로즈 3번가의 미친개’로 소문난 뒤로는 뒷골목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토파즈에게는 그와 전혀 다른 동생이 있었다. 아마 친동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애는 토파즈와 달리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토파즈보다 고작 한 살이 어렸지만 체구가 워낙 작아 서너 살은 더 어린 것처럼 보였고, 얼굴도 닮지 않아 선이 고운 편이었다.

‘형. 그러다 걔네가 앙심 품고 형한테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

‘나도 똑같이 해 주는 거지, 뭐.’

‘그래도 난 가끔 걱정돼. 형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별걱정을 다 한다. 너나 조심해. 혹시 누가 지랄하면 나한테 바로 말하고.’

‘내가 형 동생인 거 알면 다 도망치던데?’

토파즈가 자리를 비우면 종종 동생을 괴롭히는 놈들 탓에 그가 더욱 이를 악물고 ‘미친개’ 노릇을 한다는 것을 동생도 모르지 않았다.

어쩌다 함께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은 형제였다. 딱딱한 빵 한 덩이도 반으로 나눠 먹었고 추운 겨울에는 꼭 끌어안고 추위를 견뎠다.

썩은 장미 거리에 줄지어 선 무허가 판잣집 중 지붕이 불그스름한 집이 형제의 보금자리였다. 석판이 녹슬어서 붉은 물이 들었을 뿐이지만 동생은 꼭 형 머리 색 같다며 웃고는 했다.

그러나 집이라고 해 봤자 어른 한 명이 겨우 몸을 뉠 만한 공간이었다. 누군가 엉성하게 판자와 석판을 덧대 놓은 집을 운 좋게 얻은 것이라 비가 오면 비가 샜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흔들렸다.

실제로 거센 비바람이 치던 날 지붕이 무너져서 동생의 다리가 그 밑에 깔린 적도 있었다. 토파즈는 그날 동생을 끌어안고 밤새 울었다. 그 이후 동생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작은 체구, 예쁘장한 얼굴, 불편한 신체. 토파즈의 동생은 뒷골목에서 버티기 힘든 약자의 성질을 모조리 가졌는데도 언제나 제 나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형! 오늘 몬스 아주머니 팔고 남은 빵을 두 덩어리나 주셨어.’

‘그래? 잘됐다.’

‘응. 정말 마음씨 좋은 분이야. 지난번에 보답으로 길가에 핀 꽃을 몰래 꺾어서 가져다드렸더니,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꽃은 처음 봤다고 웃어 주셨어. 그냥 평범한 들꽃이었는데…….’

‘드리면서 너도 웃었어?’

‘음, 아마도?’

‘예뻤겠네.’

토파즈는 늘 동생이 신기했다. 하루쯤은 굶는 게 예사 날이고, 아파도 치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으며, 방심하면 손에 쥔 빵 한 덩어리와 함께 손목까지 잘라 가는 살벌한 동네에서 그 애처럼 맑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열 살을 채우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맞아 죽는 아이들이 절반인 곳에서는 거칠거나 무감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쩍 마른 뺨에 지저분한 얼굴, 절뚝이는 다리를 하고서도 그 애가 빛이 나는 이유였다.

토파즈라는 보호자가 있기 때문에 동생이 그런 성정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토파즈는 동생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너무 굶어서 배가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플 때도 동생에게 음식을 양보할 수 있었고, 동생을 괴롭히는 어른들에게 달려들다 이가 부러지고 멍이 들어도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이었다. 토파즈는 주말마다 신전에서 나눠주는 빵과 수프를 받기 위해 밤새 줄을 서 있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모포는 작년 겨울에 빵집에서 빵을 훔치려다가 들켜 주인에게 찬물 세례를 당했을 때 지나가던 노부인이 가엾게 여겨 내어준 것이었다. 원래는 눈처럼 뽀얀 색이었던 것이 지금은 더러워져 회색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가 가져 본 것 중 가장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전날 허탕을 친 바람에 이틀 가까이 굶은 토파즈는 이미 배 속의 감각이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빵과 수프 냄새를 맡자 잊은 줄 알았던 허기가 몰려왔다. 토파즈는 꽁꽁 언 손으로 수프 그릇을 꼭 쥐었다.

밤새 줄을 서 있던 덕분에 토파즈의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빈 그릇이 뜨끈한 수프 한 국자로 채워졌다.

“조금만 더 주세요. 집에 동생이 있어요.”

“그러니?”

수프를 조금 더 떠 주려던 나이 지긋한 신관이 고개를 들어 토파즈를 보더니 말했다.

“너처럼 새빨간 머리칼은 처음 보는구나. 우리 에델티움의 첫 번째 황후 폐하도 피처럼 붉은 머리칼이었다고 하던데, 꼭 너 같았을까?”

신관은 황제니 황후니,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들을 선량한 얼굴로 떠들었다. 토파즈의 신경은 오직 신관이 건네주는 빵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부드러운 빵을 하루에 세 번씩 먹겠지? 토파즈의 궁금증은 그 정도였다.

“넌 이름이 뭐니?”

“토파즈요.”

“토파즈?”

그때 신관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를 몰라 힐끔 쳐다보자 신관이 말했다.

“토파즈는 노란색 보석인데, 너처럼 예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애한테는 참 안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나라면 루비나 가넷이라고 지어 줬을 거야.”

신관은 ‘원래는 이러면 안 되지만 동생과 함께 먹으라’며 빵을 한 덩어리 더 챙겨 주었다.

토파즈는 그제야 제 이름이 보석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황당했다. 붉은 머리칼에 검은 눈을 가진 빈민가 고아에게 ‘토파즈’라는 이름을 붙여 주다니. 틀림없이 보석 따위는 어깨 너머로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대충 붙여 주었으리라. 아니면 누군가의 악취미였거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된 사람처럼 들뜨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토파즈는 집으로 돌아가 동생과 수프에 빵을 적셔 먹다가 불쑥 말했다.

“내 이름 말이야, 보석 이름이래. 아까 신관님한테 들었어.”

“정말? 토파즈가 보석 이름이었구나.”

동생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토파즈의 손을 꼭 잡았다. 동생의 작은 손은 수프 그릇을 쥐고 있었던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따뜻했다.

“형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 주셨나 봐. 부모님이 아니면 누가 귀한 보석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 주겠어.”

“……그건 아닐걸. 토파즈는 노란색 보석이래.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아무렇게나 지어 붙인 게 뻔해.”

막상 동생이 그렇게 말하자 민망해진 토파즈가 고개를 내저었다. 애써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토파즈를 눈치챈 동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난 마음에 들어. 예쁘잖아, 토파즈.”

동생의 말투에 부러움이 묻어났다. 곧 토파즈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동생에게 말했다.

“그럼 너도 바꿔. 내가 지어 주면 되잖아.”

“정말? 형, 보석 이름도 알아? 난 금이랑 은밖에 모르는데.”

토파즈도 원래라면 멋들어진 보석 이름 따위는 당연히 몰랐겠지만 오늘 일로 한 번에 세 가지나 알게 되었기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라면 루비나 가넷이라고 지어 줬을 거야.’

토파즈는 신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 안에서 낯선 이름 하나를 건져 냈다.

“가넷.”

“가넷?”

동생이 눈을 크게 떴다. 동생의 갈색 머리칼과 녹색 눈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토파즈는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동생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붉은색을 좋아하잖아. 가넷은 장미처럼 붉은 보석이야.”

“형 머리 색처럼?”

“응.”

“정말 좋아. 마음에 들어.”

동생이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동생의 이름은 ‘가넷’이 되었다. 뒷골목 고아 형제의 이름이 나란히 가넷과 토파즈라니, 누가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차피 둘의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으므로 상관없었다.

동생이 가넷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지 고작 두 계절이 지난 여름이었다. 여름의 카샤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해 토파즈는 여느 때보다 조금 바빴다. 그는 얼마 전, 세상에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기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토파즈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참담함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평생 돈을 긁어모아도 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가격을 듣고 절망했고, 먼 훗날에라도 동생이 두 발로 힘들이지 않고 걷거나 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아직 그의 동생, 가넷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혹시 기대했다가 실망하게 될 수도 있으니 돈이 어느 정도 모이고 나면 이야기해 줄 생각이었다. 아니면 혼자 몰래 모으다가 가넷에게 딱 맞는 보조기구를 사서 놀라게 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단순히 오늘을 굶지 않고 버티자는 생존 욕구를 넘어서 커다란 목표가 생기자 하루하루가 초조하고 아까워졌다. 토파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돈을 벌었다.

그날은 유독 수완이 좋은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소매치기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거나 모자를 눌러 쓰느라 손이 자유롭지 못했고 빗소리는 신경을 빼앗아 갔다. 덕분에 비는 토파즈의 날쌘 움직임을 쉽게 묻어 주었다.

그날 토파즈는 마음을 먹고 극장 거리인 카르멘 가까지 나갔다. 그리고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의 돈주머니를 슬쩍했다. 그 안에는 은화가 열 개 넘게 들어 있었다. 들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짓이었으나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가넷에게 새 다리를 사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을 하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토파즈는 비를 맞으며 로즈 3번가까지 쉼 없이 달렸다. 첨벙, 첨벙. 낡은 신발은 빗물을 조금도 막아 주지 못해 발이 축축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로즈 3번가로 막 들어선 참이었다.

“토파즈, 토파즈!”

“제리?”

뒷골목에 사는 아이 중 하나가 토파즈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달려왔다.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와 함께 로즈 1번가에 사는 아이였다.

제리는 토파즈보다는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았는데, 어느 날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있길래 도와줬더니 종종 먹을 것을 나눠 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봐야 말라비틀어진 빵이나 멍든 사과 하나 정도였지만, 그게 토파즈와 동생에게는 귀중한 하루치 식사가 될 때도 있었다.

친구라고 부를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토파즈에게 호의적인 아이 중 하나였다. 그런 아이가 희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순간, 토파즈는 불길한 예감에 목덜미가 선득해졌다. 갑자기 빗물에 젖은 발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차게 느껴졌다.

“빨리, 빨리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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