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25)화 (25/110)

#025

“농담입니다. 저에게 지금 쓸 만한 마도구가 있거든요.”

카르옌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웬 나뭇잎 두 장이었다. 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활엽수 잎처럼 생겼으나, 막상 직접 만져 보니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보통 나뭇잎보다는 두툼하고 뻣뻣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도구라는 걸 짐작하고 만져 봤으니 느껴진 것이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할 만큼 미세한 차이였다.

“하나를 근처에 자연스럽게 떨어뜨려 놓거나 주머니에 넣으면 다른 한 쌍에서 소리가 들릴 거예요. 단, 서로 눈에 보일 만큼 가까이에 있고 사이에 벽이 없어야만 전달 가능해요. 일방향이라 저희 쪽 소리가 저들에게 전달될 일은 없고요.”

유용해 보이기는 했지만 대충 들어도 불법적인 냄새가 솔솔 났다. 어디 암시장에서나 팔 것 같은 물건이라고 할까.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카르옌이 해명했다.

“제가 예전에 만들어 둔 겁니다. 일회용이에요.”

“네가 만들었다고?”

마도구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마법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만들어진 마도구에 마법식을 새겨넣는 정도는 어느 마법사나 할 수 있지만, 세상에 없던 마도구를 발명하려면 고안부터 설계부터 직접 해야 했다. 아니라면 마도 공학이라는 학문이 왜 따로 존재하겠는가.

“예전에 아카데미에 다닐 때였는데, 지루해서 시간 죽일 일이 필요했거든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산증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 와중에 정상적으로 학교 같은 곳을 다녔다는 점도 놀라웠다.

“아무튼 내가 다녀올 테니 줘 봐.”

“음…….”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끼어드는 세 사람을 토파즈는 몇 마디로 일축했다.

“열 살 때까지 내 직업이 뭐였는 줄 알아?”

“……그렇게 어렸을 때도 직업이 있으셨습니까? 제국법상 13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어떤 노동도 허락되지 않습니다만.”

“있었지.”

메르디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토파즈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소매치기.”

“…….”

토파즈는 멍하게 입을 벌린 일행을 두고 나뭇잎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를 터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넣어 주는 일은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저희를 찾고 있는 것은 맞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수상한 이들의 주머니에 마도구를 넣는 일은 전직 소매치기의 활약 덕분에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그러나 나뭇잎에 귀를 바짝 댄 한 사람만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 역할은 카르옌이 맡았다.

“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저희의 얼굴을 모르는 자들이라서요. 게다가 수도로 곧바로 돌아갔으면 모를까, 여기까지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탐문만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어.”

메르디나의 신중론도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시모네와 리스타바트에서 너무 눈에 띄는 짓을 해 버렸다.

“일단 넨베르그는 빨리 떠나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희가 찾던 정보상은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지금은 못 만나. 넨베르그의 정보상은 밤에만 만날 수 있어.”

“그게 규칙인가요?”

하란의 물음에 토파즈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야행성이라서. 아마 지금쯤 처자고 있을걸.”

“…….”

미봉책으로 도시를 옮길 때마다 옷이라도 바꿔 입자는 이야기가 나와 일행은 의상 가게가 늘어선 거리로 향했다. 이제껏 얼굴을 드러내며 다녔던 토파즈도 후드가 달린 짧은 망토를 하나 샀다. 시야가 좁아져서 불편했지만 도망자의 일행으로서 가끔은 어쩔 수 없을 듯했다.

“검은색이 잘 어울리시네요.”

물주 역할을 수행 중인 카르옌은 돈 쓰는 일이 퍽 즐거운 얼굴이었다.

문제는 그 직후에 발생했다. 옷 구매를 한 뒤 느긋하게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제 주머니와 가슴팍을 천천히 더듬던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주머니가 사라졌네요.”

“…….”

“…….”

“설마 아공간 주머니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야?”

“네.”

산뜻한 말투로 대답하기에는 너무나 큰 재앙이었다.

편의상 마법 주머니라고도 부르던 카르옌의 아공간 주머니는 무척 편리했다. 얼마나 편리하냐면, 물건을 살 때 무게와 부피를 까다롭게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수용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아직까지는 ‘이거 들어가?’라고 물었을 때 카르옌이 ‘안 될 것 같은데요.’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덕분에 네 사람의 손과 어깨는 늘 자유로웠다. 바꿔 말하면 그들의 돈과 식량, 짐이 모두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아공간 주머니를 잃어버린 그들은 이제 거지나 다름없었다.

“…….”

“…….”

차마 이런 상황은 예상해 보지 못한 듯 하란과 메르디나도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돈 꺼낸 게 언제야.”

“옷 가게에서 토파즈님의 망토를 계산했을 때요.”

“그 뒤에는. 주머니에 넣었어?”

“넣었죠. 또 금방 꺼낼 것 같아서 로브에 달린 주머니에 넣긴 했지만.”

본래 가슴 쪽의 안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것을 로브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로 잠시 옮겨 놨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패착이었던 것 같다며, 카르옌이 태평한 어조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계산을 마치고 먼저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어떤 아이랑 부딪혔거든요.”

“뭐?”

어깨를 부딪치는 척하며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은 소매치기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요령 좋은 소매치기들은 감각이 발달한 기사의 주머니도 슬쩍 털어 버리고는 했다. 어릴 적 토파즈가 그랬듯이.

토파즈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설마 어린 시절의 업보를 이런 식으로 치르는 건가? 이미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봐.”

“어린 남자애였고, 부딪혔을 때 머리가 제 명치쯤에 왔어요.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었고 머리칼은 갈색이 섞인 금발이었던 것 같네요.”

“얼굴은.”

“당연히 못 봤죠.”

눈을 깜빡거리며 하는 말이 너무 태연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대체 뭘 보고 있었는데?”

“토파즈님이 가게에서 나오시길래 그걸 보고 있었어요.”

“하…….”

그러니까, 쓸데없는 걸 보며 정신 팔다가 소매치기한테 당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마법을 걸어 두어서 아무나 열 수 없어요. 제가 허락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텅 빈 주머니처럼 보일 거예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소식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태평했던 거라면 이해가 갔다.

그러나 토파즈는 곧 카르옌의 아공간 주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내고 얼굴을 찌푸렸다. 질 좋은 붉은 비단에 금빛으로 섬세한 넝쿨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주머니 자체가 값나가는 물건임을 알아볼 터였다.

소매치기 꼬마의 손에서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또 팔리면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그러다가 마도구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면 더욱 골치 아파질 테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 소매치기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소매치기를 찾는다고 치자. 오늘은 어디서 자고 뭘 먹을 거지?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네. 당장 이걸 계산할 돈은 있고?”

토파즈가 빈 그릇이 쌓인 테이블을 가리키며 묻자 카르옌은 그제야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곧 로브 안으로 손을 넣어 꼼지락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섬세한 세공이 새겨진 보랏빛 브로치였다. 빛이 비치자 각도마다 다른 빛으로 보석이 반짝였다. 눈에 담기에 황송할 정도로 값비싸 보였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은 이래서 문제였다. 잘 곳도 없다는 말에 나라 잃은 표정으로 서 있던 하란 역시 깨달은 바가 있는 듯했다.

“너무 눈에 띄는데?”

“무조건 장물 취급 받아서 역추적 당할걸. 나 여기 있으니 잡아 달라고 외칠 거라면 말리지는 않겠어.”

“아…….”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턱 끝을 쓰다듬었다. 그가 곧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탄식했다.

“그래서였나.”

“뭐가.”

“어릴 때 종종 가출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늘 귀신같이 저를 찾아내더라고요. 돈이 없으면 갖고 있던 보석이나 옷의 단추 같은 걸 떼어내서 값을 치르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어리석었네요.”

이제라도 깨달았다니 참 다행이다. 그렇게 눈에 띄는 물건을 돈 대신 쓰다니 알아서 흔적을 줄줄 흘리고 다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돈은 조금이라도 나눠서 들고 다녔어야 했는데, 저희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설마 환한 대낮에 소매치기라니…… 책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가 제국의 치안을 너무 과대평가했어.”

“…….”

토파즈는 메르디나와 카르옌이 나름대로 심각한 얼굴로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어느 집안 자식들인지, 호기심을 갖지 않으려 애써도 궁금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수도의 번화가나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구역은 치안 유지가 잘 되는 편이기는 했다. 순찰을 도는 경비병과 방범 장치가 많아 좀도둑은 잡힐 확률이 높았고, 잡혔다가는 큰 고초를 치를 테니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무슨 성 밖에 처음 나와 보는 황자나 황녀도 아니고 말이다.

“제 주머니에 아까 아이스크림 계산하고 남은 3코퍼가 들어 있긴 한데, 이걸로 네 사람분 식사 계산은 무리예요. 소매치기범 찾기 전에 이 식당에서 접시를 닦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하란이 절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황동색 동전 세 닢을 소중하게 쥔 채였다.

“하아…….”

토파즈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곧 그가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그 주머니에서 짤각,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맞은편에 있던 세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토파즈가 그 안에서 동전을 꺼냈을 때는 반쯤 잃어버렸던 생기가 완전히 돌아왔다.

‘숙식 제공’이라는 중대한 고용 규칙이 깨진 대가는 나중에라도 꼭 받아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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