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드디어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섰으나 한가롭게 카르옌을 책망할 시간은 없었다. 성의 불은 환하게 밝혀졌고, 소란을 들은 병사들이 쏟아지듯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방금 뛰어내린 테라스에도 이미 활과 창을 겨눈 이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토파즈는 날아온 화살을 검집째로 쳐내며 옆에 서서 옷깃이나 다듬고 있는 카르옌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어떻게 빠져나갈 계획이지?”
“일단 달려서…… 성벽을 타 넘으면 되지 않을까요?”
“네 키의 두 배보다 높은 성벽을? 차라리 테라스에서 지붕으로 올라가지 그랬어.”
“제가 토파즈님처럼 지붕을 뛰어넘는 재주는 없어서요.”
“성벽 타는 재주는 있고?”
“음, 성벽을 부술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영지를 도우려는 거야, 망하게 하려는 거야.”
두 사람은 정원을 가로질러 성벽 쪽을 향해 무작정 내달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정체를 들킬 일은 없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 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토파즈 혼자 잠입했다면 지체하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왔을 텐데…….
아마 내일 아침이면 영주 성에 누군가 침입했었다는 소식이 온 영지에 퍼지지 않을까. 토파즈는 아무래도 의적인 척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정원을 내달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간밤에 영주 성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이 온 리스타바트에 파다합니다.”
“안타까운 일이네.”
“듣기로는 의적이라고 하네요. 신전과 구빈원 앞에 금괴와 보석이 떨어져 있었다고 다들 떠들썩합니다. 영주를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요.”
“잘됐군.”
리스타브가 성의 없는 대답만 내뱉는 카르옌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성공하신 건가요?”
품에서 장부를 꺼내 건네자 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먼저 부탁한 사람은 자신이지만, 정말로 단둘이서 성공한 것을 보니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리나가 성공적으로 영주 자리를 차지한다면 가장 먼저 성의 보안부터 갈아엎지 않을까.
이리나는 가문의 재무 관리인에게 받았다는―정말 받은 건지 빼앗은 건지, 혹은 훔친 건지 모르겠지만― 장부와 비교해 가며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이중장부였네요. 금고에 있던 장부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안전 예산을 착복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적혀 있어요.”
이리나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재판에 넘길 건가? 안전 예산을 빼돌리고 영지를 마수의 위협에 빠뜨렸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중앙에서 감사가 파견될 텐데.”
제국에서 ‘마수’는 모두의 역린이었다. 제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 예산을 착복하여 사적으로 유용하였으니 재판에 회부되면 중앙에서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터였다. 한동안 엄격한 감사가 진행될 것은 자명했고, 영지의 명예도 추락할 것이다.
그러니 이리나는 부정을 덮어주는 대가로 영주 자리를 놓고 거래하거나 사건 자체를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하고 묻어 버릴 수도 있었다. 어쨌든 북부는 중앙의 눈에서 먼 곳이었으므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 돈을 영지민의 목숨과 맞바꾼 영주를 가족이라고 감싸주겠습니까. 남작은 가족의 관용에 기댈 자격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리나는 테이블 위에 양팔을 올리고 손깍지를 꼈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 모두의 존경을 받던 전대 남작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알 리가 없었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지 의아해 바라보자 이리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당기며 말을 이었다. 웃고는 있지만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간 얼굴이었다.
“마차 사고였습니다.”
“…….”
“아버지는 뛰어난 기사셨고 평소 마차는 잘 타지도 않으셨습니다. 영지 순례를 하던 중 마차가 산길 아래로 추락해 돌아가셨다는데, 어렵게 확인한 시신의 등에는 칼자국이 있더군요.”
“설마…….”
토파즈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그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가 영주 성에서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손님조차 되지 못하는 처지고요.”
“남작이 제 아버지를 일부러 해쳤다는 뜻이야?”
“네. 여러분이 애써 주시는 동안 저는 그 증거와 증인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애초에 부정한 방식으로 영주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과 영지 관리 실태가 밝혀진다면 재판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그 증거와 증인이 진짜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준비’해 둔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오직 선의를 위해 행동한다는 듯한 태도가 저랑은 안 맞아서요.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저만 나쁜 놈 같아지잖아요.’
이리나 리스타브의 목적에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복수가 섞여 있다는 말을 들은 카르옌의 표정은…… 그다지 후련해 보이지는 않았다.
* * *
넨베르그는 북동부를 잇는 거점 도시였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영주 성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붉은 지붕의 집들이 질서정연했다. 굴러다니는 돌 하나 없이 매끈하게 닦인 마차 길과 빼곡히 들어선 삼 층 이상의 건물, 바쁘게 오가는 잘 차려입은 행인들을 보자 정말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동부로 이어지는 강이 있어 오래전부터 수로가 발달한 넨베르그는 현재는 북부에서 유일하게 공간 이동이 가능한 공공 포탈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공공 포탈은 신분패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었다. 물론 그 돈의 액수가 적지는 않아 한 번 이용하려면 평민들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포탈 앞은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넨베르그의 포탈 앞 광장에는 ‘자유와 광휘의 광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포탈 광장’이라고 불렀다. 포탈 광장에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 호객하는 점원들, 악기 연주 소리 따위가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기초 학교 수업이 끝나 놀러 나온 듯한 아이들은 몰려 다니며 친위대장과 사랑에 빠진 위대한 황제 폐하와 마수를 무찌른 용사 가넷, 흑마법사의 저주를 받은 아름다운 인어 따위에 대한 노래를 불러댔다.
토파즈는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황제 폐하가 친위대장의 용맹함과 아름다움에 빠져 금지된 사랑을 하고 말았다’는 노래 가사를 듣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저 가사가 무슨 뜻인 줄이나 알고 부르는 걸까…….
“비(非) 마법 과학은 평등합니다!”
저도 모르게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던 토파즈는 괴이쩍은 구호에 고개를 돌렸다. 광장 한쪽의 연설 공간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녀가 있었다. 백발에 가까운 백금발을 가진 소녀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백열전구와 함께 신문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예전부터 종종 보던 광경이지만 그때에 비해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마법은 제국민들의 일상생활 전반을 떠받치고 있지만 정작 쓸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흐름이겠지.
“우리는 마법사가 사라진 세계를 대비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법 없이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혹은 소녀의 말솜씨가 유독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토파즈는 힘 있는 목소리로 청중을 휘어잡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토파즈가 수상한 사람들을 발견한 것은 포탈 이용객들을 겨냥해 들어선 커피 하우스의 야외 테이블에 막 앉은 때였다.
토파즈의 옆으로 두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평범한 차림새였으나 허리춤에 검이 매달려 있었고, 용병이라기에는 걸음걸이가 꼭 군인처럼 각이 잡혀 있었다. 토파즈는 메뉴판에서 아무거나 짚어 주문하며 방금 지나간 두 남자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광장 근처를 맴돌며 상점 주인이나 포탈 관계자들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포탈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얼굴을 가린 이들은 때때로 멈춰 세우며 말을 걸기도 했다.
그들이 멈춰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의 일행이라는 점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조합이었다.
“…….”
토파즈는 고개를 돌려 옆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이좋게 커피 하우스에서도 가장 비싼 메뉴인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었다. 사치스럽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때 카르옌이 작은 스푼에 떠서 입가로 가져오던 아이스크림이 스푼에서 미끄러져 뚝 떨어졌다. 그가 아이스크림이 묻은 곳을 확인하기 위해 로브를 젖히자 후드가 반쯤 흘러내리며 반듯한 이마와 우뚝하게 솟은 코가 드러났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토파즈가 손을 뻗어 황급히 그 후드를 푹 눌러 씌웠다. 동시에 카르옌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란이 몸을 기울였다. 포탈 앞 수상한 이들의 시야에서 정확히 카르옌의 얼굴을 가리는 각도였다.
“…….”
“…….”
토파즈와 하란의 눈이 마주쳤다. 하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래도 벌써 이곳까지 저희를 찾는 이들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너희가 이곳으로 올 줄 어떻게 알고?”
“포탈이 설치된 도시는 일단 다 뒤지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곳에서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특히 카르옌 너는.”
이름이 불린 당사자의 심드렁한 표정을 보아 그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듯했다.
“무슨 대화하는지 들어 볼까요?”
“그런 것도 가능해?”
토파즈가 그런 사기 같은 마법도 있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카르옌이 방긋 웃었다.
“가까이 가서 훔쳐 들어 보자는 뜻이었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