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토파즈의 기대와 달리, 눈이 가려진 리스타브 남작은 상황을 조금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독한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기도 했고 원래도 명민하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머리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리스타브 남작’이라는 지칭을 듣자 정체를 모르는 눈앞의 사내를 향한 분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남작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무도하게 군단 말인가? 곧 경비병을 불러 이 건방진 놈의 목을 잘라 성문 앞에 내걸리라 다짐했다. 남작이 분노와 모멸감으로 씨근덕거렸다.
그러나 남작은 문득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 평소처럼 침실에서 잠이 들었고, 이 침실 문 앞을 지키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침입자가 들어왔으면 분명 소란스러워야 할 텐데 성내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갑자기 술이 모두 깨는 것 같았다. 현실감과 함께 두려움이 들이닥쳤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불러야 했다.
그때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누군가 구하러 와 주길 기대하고 있다면 포기하는 게 좋아. 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왔거든.”
“……!”
“네가 지금 죽어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시체는 싸늘하게 식은 뒤에야 발견될 거라는 얘기야.”
“으, 흡.”
남작의 얼굴을 덮은 천이 축축해졌다. 조금 전에 맞은 물세례와 식은땀, 눈물이 지저분하게 뒤섞인 탓이었다.
“그렇게 되고 싶진 않겠지?”
침입자의 어조는 시종일관 차분해 더욱 소름이 돋았다. 남작은 윽박지르는 것보다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 더 무서울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누군가 턱 아래에 칼날을 들이댄 기분이었다.
“그래서, 장부는 어디에 있지? 네가 황제의 돈을 뜯어먹은 증거 말이야.”
“……!”
“아무리 돈이 좋대도 목숨보다 더 귀중할까.”
침입자가 이불을 짓누르던 손을 천천히 띄웠다. 남작은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호흡이 한 번 이루어지기도 전에 단단한 손바닥이 다시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부터 손을 떼고 셋 셀게. 그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네 머리를 잘라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겠어.”
하나, 둘.
남작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미처 셋을 세기도 전이었다.
“죽었나요?”
“그랬겠어?”
금고의 위치를 밝힌 뒤 조용해진 남작을 보며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했다.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자는 실수로라도 죽어서는 안 돼.”
“음, 명분이 훼손되니까요?”
“그래. 아무리 악덕한 영주라도 괴한에게 살해당한다면 안타까운 희생자로 역사에 남을걸.”
“하긴. 죽은 이의 부덕은 무덤 속에 시체와 함께 묻히기 마련이죠.”
어깨를 으쓱인 카르옌은 벽에 걸린 남작의 초상화 중 하나를 떼어냈다. 그러자 남작의 말처럼 작은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벽돌 하나를 누르자 덜컥 소리와 함께 벽이 움직였다.
이윽고 드러난 검은색 금고는 표면이 매끈해 마치 돌벽처럼 보였다. 눈에 보이는 어떤 잠금장치도 없었다. 토파즈가 가까이 다가서자 카르옌이 팔을 뻗어 앞을 막아섰다.
“손 조심하세요. 영주 동생의 말대로 전류를 흘려보내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카르옌은 어디선가 깃펜 하나를 주워 왔다. 그가 새까만 잉크로 금고 위에 글자를 몇 개 적어넣고 그 글자들을 감싸듯 동그란 원을 그리는 순간, 둥근 형태를 따라 마법진이 완성되며 빛이 새어 나왔다. 언제 봐도 휘황하여 현실감 없는 금색이었다.
그 금빛 마법진 아래로 이전에 누군가가 그려 넣은 듯한 복잡한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불에 탄 재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달칵. 곧 금고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을 카르옌이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잡아 활짝 열었다.
“방금 나보고는 조심하라며.”
“걸려 있던 마법을 파훼했으니 이제 상관없습니다. 별로 고난도의 마법은 아니었네요.”
다른 마법사들이 들었으면 좀 재수 없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금고를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빼곡히 쌓인 금괴와 보석들이었다. 토파즈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채 쳐다보는데 카르옌은 별 감흥 없이 보석들을 한쪽으로 밀어 치워냈다. 수도 귀족이라는 그의 눈에는 어린애 장난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카르옌은 성의 없이 보석을 밀어내다가 문득 손을 뻗어 무언가를 건져 냈다. 반지였다. 평범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아니라 납작한 표면에 검과 독수리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리스타브 가문의 인장 반지네요.”
카르옌은 자연스럽게 그 반지를 챙겼다.
“……도벽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가문의 인장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요. 챙겨 가면 영주 동생의 눈이 돌아갈걸요.”
“이리나 리스타브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티 났나요?”
“조금.”
“오직 선의를 위해 행동한다는 듯한 태도가 저랑은 안 맞아서요.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저만 나쁜 놈 같아지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위해서 움직여.”
카르옌은 입꼬리를 당겨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토파즈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애초에 네가 왜 그렇게까지 이 영지 일에 신경을 써 주는지 모르겠어. 네 앞길이 바쁜 줄 알았는데.”
시모네에서도 그렇고, 일정을 지연시켜 가며 영지의 일을 돕는 모습이 예상 밖이었다. 의외로 정이 많아서 그렇다기에는 저 새파란 눈동자가 지나치게 무심하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어떤 온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책임감이라고 해 두죠.”
그래, 책임감이나 의무를 수행하는 얼굴에 가까워 보였다. 대체 그가 왜 책임감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석의 뒤편에는 서류 뭉치와 두꺼운 장부가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일일이 확인하는 대신 통째로 챙겼다. 아공간 주머니 덕분에 양손이 무거울 일은 없었다.
서류 뭉치만 꺼낸 뒤에 막 금고를 닫으려는 찰나였다. 귀가 따갑도록 시끄러운 경종 소리가 성내를 울렸다. 침입자를 알리는 경보였다. 동시에 다급한 고함이 침실과 연결된 복도를 울렸다.
“침입자다! 영주님 침실에 침입자가 들었다!”
아까 응접실 문 앞에서 기절시킨 시종 중 하나 같았다. 무예를 모르는 자 같길래 비교적 약하게 때려서 기절시켰는데, 이렇게 금방 정신을 차릴 정도로 건강한 줄 알았으면 그냥 뒤통수를 갈길 것을 그랬다.
“토파즈님, 이쪽으로 오세요.”
카르옌이 손을 뻗었다. 복도로 주의를 기울이자 훈련받은 이들의 걸음 소리가 났다.
“잠깐.”
토파즈는 금고 안으로 손을 뻗어 금괴와 보석을 집히는 대로 챙겼다. 카르옌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돈이 필요하세요?”
“도둑의 소행인 것처럼 보여야 할 것 아니야.”
“아.”
카르옌이 그제야 깨달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런 짓을 처음 해 보는 놈이라는 티가 났다. 토파즈는 금고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발을 돌렸다.
“토파즈님.”
카르옌이 재차 손을 뻗었다. 마법 주머니를 돌려 달라는 뜻인 줄 알고 손을 내밀었더니, 정작 주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토파즈의 팔을 당겼다. 몸이 가까워졌다.
“불편하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이런, 미친.”
토파즈는 흔치 않게 말을 더듬을 뻔했다. 토파즈는 당연히 자신이 카르옌을 둘러메고 내달릴 계획이었으나 카르옌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토파즈를 양팔로 번쩍 안아 들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토파즈는 근육 탓에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는데 카르옌은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토파즈가 카르옌의 멱살을 붙들 기세로 물었다.
“너 나한테 마법 걸었어?”
“마법을 안 써도 토파즈님 정도는 들 수 있답니다.”
자신이 검술 실력은 부족해도 기초 체력은 괜찮다느니, 이 와중에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마법사 덕분에 긴장감이 훅 꺼졌다.
그러나 꺼졌던 긴장감이 다시 치솟은 것은 카르옌이 달리는 방향이 발코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즉시였다.
“너 3층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해? 네 근력이 그 정도라고?”
토파즈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손을 뻗어 카르옌의 어깨와 등을 더듬어 댔다. 등 근육이 꿈틀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탄탄한 체격인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애초에 그게 근력이랑 상관있나요?”
“그럼 당장 내려놔, 미친놈아.”
기어이 험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들이 그 마나를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하듯, 반대로 마법사들도 마나를 제 체내로 순환시켜 신체를 강화하지는 못한다. 마나를 다루는 체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서 발을 삐끗했다가는 최소 골절, 최대 사망이었다.
“네가 여기서 떨어져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결국 내가 업고 달려야 하는…….”
“쉿. 그러다 혀 깨무십니다.”
카르옌이 발코니 난간을 넘어 훌쩍 뛰어내렸다. 정원 쪽을 향해서였다. 땅이 점점 가까워졌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옷깃을 잡아 뜯듯이 쥐며 허공에서 어떻게든 자세를 바꿔 보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행동을 멈췄다.
떨어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의 속도는 그대로인 것을 보니 착각이 아니었다.
펄럭, 후드가 벗겨지며 드러난 카르옌의 머리칼이 보름달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토파즈는 손을 뻗어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씌웠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졌을 뿐인데 꼭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내 두 사람은 풀밭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래. 마른하늘에 비도 내리는데 하늘 정도는 날 수도 있겠지. 토파즈는 자신의 기준이 점점 현실과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