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22)화 (22/110)

#022

변장을 하고 나올 정도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굳이 출입문과 가장 먼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것부터 수상했다.

주점 안을 채우고 있던 이들은 평범한 손님인 척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은근하게 이쪽을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묘한 긴장감과 경계심이 흐르는 그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일행 중 아무도 없었다.

이리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제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이들에게 털어놓기엔 위험한 이야기였으니, 만약 거절한다면 입막음할 생각이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입막음을 위해 사람 목숨을 해할 정도로 앞뒤 없는 사람은 아니니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 주세요.”

목숨을 해칠 생각은 없었지만 방해하지 못하게 가둬 두거나 협박할 생각은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를 나눈 친형제라고 감싸더니, 가족을 몰아내겠다는 겁니까?”

그 말에 이리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오라버니, 아니. 남작은 애초에 가문을 이어받아서는 안 되었던 사람입니다.”

“…….”

“그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자를 멋대로 잡아들이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영주성의 하인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폭행하는 악질적인 버릇을 갖고 있었고, 영주가 된 지금은 더욱 심하죠. 반년째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향락을 즐기며 술을 퍼마시고 다니는 게 전부입니다.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 없고 세금은 개인의 사치를 위해 사용하죠.”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꼴을 보고도 내버려 둔다면 오히려 문제가 아니겠느냐며, 이리나가 속내를 드러냈다.

“영지를 위하는 그대의 마음이 이토록 커다란데, 어쩌다 멍청한 장남이 후계자의 위치에 올랐지?”

카르옌의 물음에 이리나가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조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저는 기사가 아니니까요.”

“…….”

“리스타브 가문은 대대로 기사 가문이었습니다. 영지라고는 네 개의 작은 도시가 전부지만, 그래도 북부는 무력을 숭상하는 곳입니다. 기사가 아닌 자가 작위를 계승하는 건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 저는 후보로 거론되지도 못했습니다.”

이리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검술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 대신 글과 셈에 밝았지만 그건 리스타브 가문의 가주가 지녀야 할 덕목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골 남작 가문이라고는 하나 그래서 더욱 보수적인 관습을 깨기 쉽지 않았다.

“왜 꼭 뛰어난 기사만이 가문을 이어받아야 합니까? 전쟁은 지휘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을 리스타브 남작 혼자 지키는 것도 아닌데요. 보세요.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 자리를 꿰찬 오라버니는 그 검을 영지를 지키는 대신 친구들과 어울려 사냥을 하는 데나 쓰고 있습니다. 망나니짓을 일삼으며 돌아다닌 덕분에 보수적이던 가신들도 모두 제 편으로 돌아섰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억울함이 섞인 호소를 들으며, 카르옌은 몰래 웃었다. 귀에 익은 이야기였다. 남작의 동생이 하는 말은 꼭 자신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렸다.

황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카르옌은 뛰어난 마법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숨에 유력한 입지를 차지했다. 황태자 책봉식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공식적으로 황제의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 황제는 마법이라고는 조금도 쓰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선황 역시 램프에 불이나 겨우 붙이는 정도의 마법사였다. 삼대 전의 황제는 실력 있는 마법사라 수도에 침입한 마수와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고 들었지만, 그것도 이제 노인들의 기억 속에나 흐릿하게 존재할 뿐이다.

가장 훌륭한 마법사가 황제가 되어야 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당위도 없이 낡은 전통으로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는 비난은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의 삶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그러나 카르옌은 곧 생각을 접었다. 그는 마법사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결국엔 황제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라도 일으킬 생각입니까?”

메르디나의 물음에 이리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기사단의 절반은 제 편으로 돌아섰고 영지민들도 저를 지지하니까요. 제게 필요한 것은 확실한 명분뿐입니다.”

“…….”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 * *

어둑한 밤, 지붕에서 한 인영이 뛰어내렸다. 그는 팔을 뻗어 다른 한 사람의 착지를 도왔다. 본래라면 외벽을 감싸고 있는 침입 감지 마도구가 작동했어야 하지만, 그건 이리나에게 회유당한 내부자가 제거한 뒤였다. 덕분에 두 명의 침입자는 어떤 방해도 없이 남작의 침실과 연결된 발코니에 안착했다.

정원을 순찰하던 위병이 문득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으나 발코니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남작의 침실과 연결되는 내실로 유유히 들어온 토파즈는 발코니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과 침실 문 앞의 기사 셋, 마주친 시종 둘을 소리 없이 기절시켰다. 큰소리는 한 번도 나지 않았다.

“많이 해 보신 솜씨인데요.”

토파즈는 적진에서 겁 없이 속삭여 대는 카르옌을 미쳤냐는 눈으로 노려봤지만,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대꾸했다.

“몇 번쯤은.”

용병 일을 하다 보면 남의 집에 침입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물론 일이 아닐 때도 침입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맹세코 많이는 아니었다.

반면 무단 침입이 처음일 카르옌은 어른 몰래 위험한 장난을 치는 소년처럼 들뜬 기색이었다.

토파즈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 짐덩이를 달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이 수상한 잠입이 결정된 것은 어젯밤이었다.

토파즈는 높으신 분들의 복잡한 사정 따위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망나니 남작보다야 그 동생이 나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모르는 일이었다. 남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허울 좋은 말을 떠드는 것일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의외로 협조적으로 나온 사람은 카르옌이었다.

‘영지를 위하는 마음이 그토록 갸륵하니 한번 들어보고 싶어지는군. 어떤 부탁이지?’

토파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좁히며 카르옌을 돌아보았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혹시 호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돌아본 카르옌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다. 이리나의 이야기에 감화되기는커녕 아주 지루한 책무를 수행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는 남작이 황립 재판소의 재판을 받도록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이중장부 같은 것 말입니다.’

황립 재판소는 조서와 증언의 힘이 약한 증거재판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황립 재판소에 넘길 생각이라면 악행을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남작은 지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의심은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쥐고 흔들 만한 약점은 물론, 누군가 자신을 속이지는 않았을까 의심하며 주고받은 서신 한 장 없애지 않았을 겁니다. 예전부터 늘 그랬거든요.’

‘의심이 가는 장소는?’

‘침실에 있는 금고입니다. 분명 그 안에 증거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남작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와 시종들은 충심이 깊은 자들이라서 회유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그 금고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주인이 아닌 사람이 열려고 하면 전류가 흐르는 마법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토파즈는 불꽃 축제 때 만난 푸른 머리의 남자 마법사가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신전 화재 때 경비병이 그 마법사들을 잡아가려고 한 것도 핑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는 카르옌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은 더 상위의 마법만이 파훼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옌님께서 그 금고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리나가 준비해 둔 잠입조에 카르옌만 투입하는 방식이었지만 토파즈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이리나를 믿고 카르옌을 혼자 보낼 수 없을뿐더러, 작은 영주 성 하나 터는 데 그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해 소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리나는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의견을 굽혔다. 위험하다고 해도 더 큰 부담을 지는 쪽은 이쪽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검사 하나와 마법사 하나로 이루어진 조촐한 한 조의 영주 성 잠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토파즈는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휘장에 가려진 침대 안쪽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릴 뿐, 눈에 보이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리스타브 남작이 관리하는 땅은 이렇다 할 수입원도 없는 척박한 북부 도시 네 개뿐이었다. 그중 가장 큰 도시 리스타바트에 지어진 영주 성도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남작이 머무는 공간은 달랐다.

토파즈는 탁자 위에 놓인 저 휘황한 금 촛대 하나만 팔아도 시모네에 용병 열둘은 보내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파즈는 검 끝으로 침대에 드리운 휘장을 걷었다. 젊은 남작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취기로 인해 붉어진 뺨과 코 때문인지 검은 머리를 제외하면 이리나와는 별로 닮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뿐 아니라 체구도 그랬다. 이리나와 달리 남작은 누가 봐도 무인이었다. 펑퍼짐한 잠옷 사이로 드러난 어깨며 팔뚝 따위가 단련한 사람의 것이었다.

“금고는 어디에 있을까요?”

“깨워서 물어보지.”

토파즈는 은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어 그대로 남작의 얼굴에 쏟았다.

“헉!”

잠결에 찬물을 맞은 남작이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쉿.”

“으흡.”

그러나 소리를 지르거나 시종을 부를 수는 없었다. 눈코입이 모두 틀어막힌 탓이었다. 얼굴을 덮은 것은 그가 방금까지 덮고 자던 이불이었다.

“머리가 있으면 지금 상황을 알겠지, 리스타브 남작.”

토파즈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악당 같이 물었고, 카르옌은 뒤에서 감탄하며 조용히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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