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이리나가 솔직하게 부정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셨을 겁니다. 어젯밤 내린 비가 영지에 미친 영향입니다.”
카르옌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가 내린 비로 인해 간밤에 신전 근처에서는 흔치 않은 달무지개까지 떠오른 모양이었다. 맑게 갠 밤하늘에 달빛을 받아 빛나던 무지개는 흐릿했으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깊게 각인되었다.
이리나의 말에 의하면 불에 그을린 신전 앞에 찾아와 기부금을 쾌척하거나 직접 돌이라도 나르겠다며 나서는 이들이 새벽부터 줄을 섰다고 했다. 그렇게 간밤에 쏟아진 기부금은 이미 평소의 열 배를 넘어선다고. 신전의 빠른 재건을 바라는 신자들의 기부도 있었지만 일명 ‘기적의 비’를 직접 목격하고 고양된 시민들이 대다수였다.
신전 방화범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카르옌의 개입으로 오히려 사람들의 신앙심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제국에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축하할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신께서 영지를 수호하고 있다는 영지민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서지 말아달라?”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공을 가로채는 것처럼 느껴지시겠지만, 비밀에 부쳐 주신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보상은 무엇이든 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카르옌 역시 어젯밤의 비가 자신의 소행임이 밝혀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물과 불, 바람 계열에 특화된 마법사는 비교적 흔했지만 마른하늘에 비를 내릴 정도라고 하면 말이 달라졌다.
이미 불필요할 정도로 눈에 띄는 일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어젯밤 카르옌은 복잡한 계산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순순히 토로하는 것은 멍청한 수였다. 카르옌은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다.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간곡히 부탁하고, 또 설득해야지요.”
이리나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속내도 부드러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남작의 동생이 남작보다 영지에 더욱 관심이 많군.”
“……어떤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요?”
이리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카르옌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와인잔을 든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잔을 빙빙 돌리기만 할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시모네에서 일어난 마수 습격에 대해 알고 있나?”
“방금, 마수라고 하셨나요?”
“며칠 전 시모네에 마수 십여 마리가 출몰했어.”
“그런……!”
이리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가 드러났다.
“여러분은 시모네에서 오셨습니까? 그래서 시모네는 지금 어떻게 되었죠?”
“마수는 모두 내쫓았고 다행히 큰 피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치안대 사람들이 몇 명 다쳤고, 영주에게 도움을 청하러 리스타바트로 간 사람들은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메르디나의 대답에 이리나가 침음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고 싶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얼마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이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변명 같겠지만 저는 리스타바트에 어제 막 돌아와서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리스타바트와 인근 도시인 오블라카 사이의 산맥에도 마수가 출몰하여 기사단을 이끌고 가야 했거든요.”
“영애는 기사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만. 제가 잘못 본 것이라면 실례했습니다.”
메르디나의 말대로였다. 리스타브 남작가는 대대로 무인을 배출해 낸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이리나 리스타브는 전혀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학자에 가까워 보였다. 단련되지 않은 가냘픈 체구만 봐도 그랬지만 매일 검 대신 펜을 쥐는 사람처럼 오른손 중지가 살짝 휘어 있었고 손톱 끝에는 미처 지워지지 않은 희미한 잉크 얼룩도 있었다. 이리나가 손끝을 테이블 아래로 감추며 입꼬리를 당겼다.
“맞게 보셨어요.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기사단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제가 이끌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주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
메르디나의 물음에 이리나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목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영지에 대해 지적받아 창피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모르겠다. 이어진 말을 들으니 둘 다인듯했다.
“외지인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오라버니, 그러니까 남작님께서는 아직 영지를 돌보는 데 서투르십니다.”
“영지에 큰 관심이 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리스타브 영지가 돌아가는 꼴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막 영주가 된 남작은 영지를 돌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데다 마음대로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망나니다. 유일한 형제이자 동생인 이리나는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 꼴이 무척 답답한 기색이었다.
그때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던 카르옌이 물었다.
“그대는 남작을 밀어낼 생각인가?”
“무슨.”
카르옌의 말에 이리나의 온유하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정색하며 목소리를 굳혔다.
“무엇을 보고 갑자기 그런 위험한 말씀을 하십니까?”
“나라면 다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눈빛이기에.”
“남작님은 저와 피를 나눈 친형제입니다. 불유쾌한 오해는 거두십시오.”
“그렇다면 형제라는 이유로 악행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건가?”
“……저는 제게 허락된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리나 리스타브가 눈을 내리깔았다.
“흠, 그래?”
카르옌은 짧게 목을 울리더니 덧붙였다.
“거래를 하려고 했는데 아쉽군.”
카르옌이 금방이라도 일어설 기세로 손까지 닦아냈다. 이리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구금되어 있던 시모네의 주민들은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오늘 밤 9시, ‘붉은 매듭’이라는 주점에서 다시 뵈었으면 합니다.]
이리나 리스타브가 보낸 쪽지에 적힌 약속 장소는 평범한 주점이었다.
이리나는 가게 구석의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그 위에 동그란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허름한 멜빵 바지며 애매하게 굽은 등이 꼭 방금 퇴근한 노동자 같은 모습이었다. 어제와 차림새가 무척 달라 얼핏 봤다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 같았다.
“변장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메르디나가 말했다. 워낙 고저 없는 말투라 일순간 비꼬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저 순수한 칭찬이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천지 분간 못 하고 영지를 헤집고 다녔던 탓에 사람들이 제 얼굴을 너무 잘 알거든요. 이쪽이 서로에게 편하죠.”
모자 아래로 드러난 눈빛에는 희미한 장난기가 어렸다. 어제 정원에서 고상하게 찻잔을 들고 있던 모습보다 커다란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더 어울리는 걸 보니 본인도 나름 즐기는 듯했다.
“약속을 지켰다는 걸 우리가 믿어도 되겠습니까?”
“네. 증거로 그들에게 치안대장과 그 딸의 이름이 뭔지 물어보라고 하셨죠? ‘에릭과 안나’라고 하던데요.”
“정답이네요.”
하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모네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다른 영지에 비해 제 관심사에서 먼 곳이었어요. 가문의 관리 소홀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질 뻔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이리나의 말은 꽤 진심처럼 들렸다.
“그런데 시모네에서 마중 온 주민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붉은 머리칼의 기사님과 그 일행들이 시모네 마을을 구해주셨다’라는.”
이리나의 시선이 토파즈의 머리칼을 향했다. 붉은 머리칼이야 흔해 빠졌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들이 며칠 전 시모네에서 왔다는 사실을 이미 밝히지 않았던가.
“여러분은 어떠한 사연으로 정체를 숨기고 계시지만, 무예가 굉장히 뛰어난 분들이신 걸로 짐작합니다.”
이리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연이 뭔지 자세히 캐낼 생각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여러분께 또 다른 거래를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부탁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시모네의 사건까지 알게 된 지금, 저는 더 이상 오라버니의 폭정을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보다 더 직접적인 선언이었다. 하란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우리의 무엇을 믿고 위험한 속내를 털어놓으시는지 모르겠군요.”
“한눈에 제 속내를 짐작하신 분들께 무엇을 더 숨기겠습니까. 영주의 횡포로 지금 이 순간도 영지민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간절하니 모험에 걸 수밖에요.”
대화를 나눠 본 이리나 리스타브는 담대하거나 혹은 무모해 보였다. 그렇게 ‘보였다’. 토파즈는 피식 웃으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곳에 당신 사람들을 잔뜩 깔아 두었습니까?”
“…….”
일순간 주점 안을 흐르던 대화 소리와 깔깔거리던 웃음소리가 어색하게 멎었다. 온화하던 이리나의 눈빛에 날이 선 것과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