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20)화 (20/110)

#020

“이리나님께서 어쩐 일로…….”

“그대들이야말로 여기서 검까지 뽑고 무엇을 하는 거야? 이 자들은 우리 불꽃 축제를 도와주는 마법사들인데.”

“저희는 신전에 난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법사들의 불꽃이 화재 사고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염려되어 조사에 협조를 구했는데, 이 자들이 협조하지 않아 곤욕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영주의 동생, 이리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양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 리스타바트의 불꽃 축제는 안전해. 영지를 수호하는 경비대가 그 사실도 모른단 말인가?”

“그, 그것이…….”

“그대는 소속이 어디지? 업무를 수행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

“……저희는 모두 올봄에 제1 경비대로 발령받았습니다.”

그 대답에 이리나의 얼굴에 얼핏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 리스타바트의 불꽃 축제는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화재로 이어진 적이 없어. 이제는 그대들도 알겠지만, 무척 안전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

온건한 말투였지만, 아까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우스운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경비병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리나는 몸을 돌려 주변에 점점 모여들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작은 몸짓만으로 그의 행동에 집중했다. 이리나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신전에서 일어난 사고는 안타깝지만 죄 없는 영지민들을 겁박해서는 안 될 것이야. 마땅히 조사를 진행할 만한 증거가 나온다면 그때 정식으로 협조를 요청하도록.”

“……예!”

그때 이리나의 뒤에 서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자세히 보니 그가 입은 흰옷은 신관들이 흔히 입는 로브였다.

“우리 신전의 수습 신관 중 루카라는 아이가 화재 직전에 수상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니 날이 밝으면 신전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경비병들이 꼬리를 말고 물러가자마자 이리나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대신 사과를 건넸다. 손을 내젓는 영지민들이 영주의 동생을 친근하게 여기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곤욕을 치르던 두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이리나님, 감사합니다. 저희가 또 신세를 졌습니다.”

“아니야. 괜히 축제 날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서 너희가 고생이 많았어. 일단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

경비대를 추궁할 때와는 달리 전혀 고압적이지 않고 온화한 말투였다.

“네, 이리나님. 감사합니다.”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이자 일행은 원래 목적대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 서고 말았다.

“저기, 잠시만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영주의 동생 이리나와 그의 일행이 모조리 토파즈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후드를 쓰지 않아 얼굴을 드러낸 카르옌을.

“실례지만, 혹시 마법사가 맞으십니까?”

* * *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 차려진 점심 정찬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정성스러웠다. 테이블 위에는 정원에서 갓 딴 듯 싱싱한 장미가 장식되어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날이 좋아 정원에 식사를 준비했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이 아름답군요.”

메르디나의 대답에 이리나 리스타브가 미소 지었다.

“북부의 장미는 지금이 가장 만발하지요. 보여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토파즈는 예의상 주고받는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토파즈와 세 사람이 영주의 동생, 이리나의 저택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이유는 어젯밤의 일 때문이었다.

‘실례지만, 혹시 마법사가 맞으십니까?’

그가 카르옌을 보며 물었을 때 일행은 경계심부터 내비쳤다. 토파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경계하자 이리나는 손을 내저으며 정중히 말했다.

‘저는 이리나 리스타브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계신 신관님께 신전 화재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전 앞에서 거기 계신 두 분을 뵈었다고 하여,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 누군가 카르옌이 마법을 쓰는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게 하필 신관이고, 이렇게 빨리 영주와 관련된 이의 귀에 닿을 줄은 몰랐다.

그때 카르옌은 주문을 외우지 않고 마법을 쓴 것 같은데, 설마 그 모습도 본 건가? 소란스러운 상황이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낮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몹시 피곤해질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저 영주 동생을 포함한 네 사람을 때려눕히고 도망치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쫓기는 신세에 추격자 몇 명쯤 더 늘려도 상관없지 않나……. 토파즈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괜찮으시다면 내일 제 저택으로 일행분들을 모두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때 하란이 어리둥절하다는 말투로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성이 ‘리스타브’시라니……. 이 영지의 이름과 같군요. 저희는 축제를 구경하러 온 여행자들일 뿐인데, 남작 가문의 분께서 저희를 왜 초대하신단 말입니까? 신전 화재 이야기는 또 뭔가요?’

그가 내막을 짐작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토파즈도 무심코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만큼 훌륭한 연기 실력이었다.

그러나 이리나 리스타브 또한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한껏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곤란하게 해 드리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여러분께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청을 들어주신다면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그 요청에 응한 것은 당사자인 카르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례를 해 줄지 몹시 궁금한데. 초대를 받아들이지.’

‘이리나의 붉은 지붕 저택이라고 하면 마차꾼들이 모두 알 것입니다. 묵고 계신 곳을 알려 주신다면 직접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어젯밤의 이리나 리스타브는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다시 현재, 토파즈는 저와 마찬가지로 시큰둥한 얼굴을 한 채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있는 카르옌을 바라보았다. 사례에 관심 있어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신전에 내린 비에 ‘기적의 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리나가 먼저 어젯밤의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다시 들어도 거창한 이름이었다. 여관에서 이른 아침 식사를 하면서 벌써 몇 차례나 저 이름을 들었다.

옆 테이블에서 수프에 빵을 적셔 먹고 있는 남자가 그 기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꿈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은 ‘신께서 우리 리스타바트를 수호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라며 엉뚱한 하늘에 대고 기도를 올렸다.

“먹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서 정확히 신전 위에만 쏟아진 비……. 정말 마법 같지 않나요?”

이리나가 웃으며 카르옌을 바라보았다. 그 마법을 쓴 사람이 카르옌이라고 완전히 확신하는 투였다.

“옌님이라고 하셨나요?”

이리나가 하란이 성의 없이 둘러댄 카르옌의 가명을 부르며 말을 걸어 왔다.

“그래.”

카르옌이 대꾸했다. 자연스러운 하대에 이리나의 빈 잔을 채워 주던 하인이 미간을 좁혔으나 끼어들지는 못했다.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것처럼 고운 피부와 그를 둘러싼 여유로운 분위기, 조금의 어긋남도 없는 식사 예법 따위가 그를 쉬이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리나 역시 불쾌한 기색 대신 더욱 조심스러운 어조를 갖췄다.

“아직 공표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어젯밤 신전에 난 화재는 방화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제 저와 함께 계시던 신관님께서는 화재 직후, 수습 신관에게서 누군가 불을 지른 것 같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상한 자가 없는지 둘러보다가…… 우연히 옌님을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

“정확히는 옌님의 발밑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마법진을 봤다고 합니다. 그 직후에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고요.”

“내가 마른하늘에서 비를 내렸다는 건가?”

“젊은 마법사께서 그만한 성취를 이루셨다니 제게도 놀라운 일입니다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신의 가호’보다는 가능성이 있겠죠.”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이었다.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비를 내릴 수 있었을 리가. 마석의 도움을 받아 가능했을 뿐이야.”

“마석이라면?”

“물 속성 마법의 힘을 높여 주는 순도 높은 미리암석을 가지고 있었지. 어제 써 버려서 지금은 없지만.”

카르옌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었지만 이리나는 오히려 납득한 것 같았다.

“미리암석이라면 남부의 미리암에서만 발견된다는 귀한 마석이 아닙니까. 그렇게 귀한 것을 저희 영지를 위해 써 주시다니……. 리스타바트의 신전을 지켜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시민들이 안심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이리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전해 왔다. 토파즈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시골 남작 가문이라고는 해도 평생 귀족으로 살아왔을 텐데, 정체도 모르는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는 뻣뻣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영지민들의 태도도 그렇고, 이리나 리스타브는 그의 형제인 영주와는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겉으로 표방하는 모습은 그랬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불렀나?”

“물론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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