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신전 소식 들었어?”
“신께서 비를 내려 주신 게 분명해!”
불꽃놀이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사람들은 흥분에 잠겨 있었다.
축제 날 신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불안에 잠기게 했지만, 그 화재가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진화되었다는 연이은 소식은 축제에 걸맞은 신비한 일화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리스타바트의 밤은 잠들 기미가 없었다. 불꽃놀이가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거리를 헤집고 술잔을 기울였다.
마른하늘에 비를 쏟아낸 마법사 역시 그 속에 섞여 거리를 활보 중이었다. 그러나 뺨은 창백했고, 검은 머리칼은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카르옌이 뺨을 쓰다듬으며 변명했다.
“비를 맞아서 그렇습니다.”
조금 전 콜록거리며 잔기침을 하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믿는 시늉 정도는 해 주었을 것이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오른손을 당겼다. 카르옌은 순순히 손을 내주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주먹 안 펴?”
“으음…….”
“손가락 부러져도 책임 못 진다.”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자 카르옌이 반쯤 강제로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역시나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
각혈을 숨 쉬듯 하는 마법사라니,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토파즈는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당사자의 병약한 몸 상태 탓에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심각히 우려되기 시작했다. 토파즈는 젖은 옷소매로 그 손바닥을 벅벅 닦았다.
“옷이 지저분해집니다.”
평소보다 더 서늘한 손끝이 토파즈의 손목을 잡아 왔다. 그는 피에 젖어 얼룩진 토파즈의 옷소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넌 가만히 있어.”
토파즈는 마법을 쓰다가 피를 토해 놓고 또 습관처럼 마법을 쓰려고 드는 심각한 마법 의존증 환자에게 일갈했다. 시무룩하게 손을 떨구는 모습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한 번만 더 마음대로 마법을 쓰게 내버려 뒀다가는 저놈을 둘러메고 이 복잡한 거리를 누벼야 할 미래가 선했다. 토파즈가 피곤함에 눈가를 꾹 짓눌렀다.
약속보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하란과 메르디나는 약속대로 고요의 종탑 앞에 서 있었다. 괜히 찾겠다고 나섰다가는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머리칼의 물기를 꾹 짜내고 있는 카르옌과 그의 창백한 낯빛, 토파즈의 소매에 묻은 핏자국에 차례대로 닿았다.
두 사람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는 않았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신전의 화재와 그 불을 꺼 준 신묘한 비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으니 어렵지 않게 짐작했으리라.
“여관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마차를 잡죠.”
다행히 숙소를 구하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토파즈는 대체 그들이 내민 ‘웃돈’이 어느 정도였을지 궁금했지만 피곤함이 앞서서 묻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마차는 삯으로 몇 배를 준다고 해도 쉽게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이제야 집으로 돌아갈 생각인지, 거리에 나와 마차를 잡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일행은 마차를 반쯤 포기하고 여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꽃놀이의 여파인지 화재의 여파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기 중에는 아직도 미묘한 탄 내음이 났다. 탄 내음을 맡으며 십 분쯤 걸었을 때였다.
큰길을 지나 모퉁이를 꺾으려는데, 맨 앞에서 걸어가던 메르디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일행은 따라서 걸음을 멈췄다.
모퉁이 너머에는 경비병 네 명이 민간인으로 보이는 두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민간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마법사라는 곧 사실을 눈치챘다. 희미하지만 마법사 특유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불꽃이 일부러 신전 쪽으로 추락하도록 손을 쓴 거 아닙니까?”
경비병은 두 마법사를 추궁하고 있었다. 둘 중 금발을 양 갈래로 묶은 여자 마법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요. 우리가 쓰던 마법은 그런 마법이 아니라고요!”
“글쎄, 그건 경비대에 가서 자세히 이야기하세요.”
“우리가 거길 왜 가는데요? 우린 그냥 축제를 돕던 선량한 마법사들이지, 신전 화재와는 아무 관련 없어요!”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서 조사하다 보면 밝혀질 일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대화를 들어 보니 두 남녀는 리스타바트의 불꽃 축제를 보조하던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화재는 마무리되었으나 원인 색출은 이제 막 시작이었고, 때마침 불꽃 축제를 진행하던 마법사들이 의심을 산 듯했다.
“하아……. 다시 말할 테니까 귀 똑바로 열고 잘 들어 보세요. 불꽃 축제에 쓰이는 불꽃으로는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불인데 어떻게 화재가 안 나요?”
“그러니까 진짜 불이 아니라고요! 우리는 그냥 눈속임 마법이나 할 줄 아는 마법사예요. 신전을 불바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면 수도 마법사단이나 마탑에 들어갔지, 여기서 축제 보조 따위나 하고 있겠어요?”
토파즈는 제 옆에 선 카르옌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까 카르옌이 해 준 설명이 사실인 듯했다. 경비병들은 몰랐던 사실인지 저들끼리 잠시 수군거렸으나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리고 능력만 있으면 신전을 불바다로 만들 생각도 있다, 그런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대체 어떤 식으로 해석하면 그딴 결론이 나오죠?”
설득하려 애쓰던 금발의 마법사가 질린 얼굴을 했다. 그때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짙푸른 머리 색의 남자 마법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멍청해서 그런지 말이 통하지를 않네요…….”
“뭐라고?”
“못 믿겠으면 보여드릴게요. 그럼 되겠죠.”
느릿한 걸음이나 무기력한 어조와 달리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책을 꺼내는 움직임은 제법 기민했다. 오른손에 흰 붕대 같은 것이 감겨 있었는데도 그랬다.
갑자기 책을 꺼내 양손 위에 올리는 뜬금없는 행동을 본 경비병들이 눈썹을 까딱였다. 가까이에서 마법사를 본 적이 없는 듯 안이한 태도였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
잔잔한 바람이 불더니 남자가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가 자동으로 팔랑팔랑 넘어갔다. 숲의 오두막 앞에서 카르옌이 썼던 마법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종이가 어떤 페이지에서 저절로 멈추고, 그 페이지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 위로 푸른 빛이 덧입혀졌다. 동시에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그때쯤 경비병 사이에서도 상황을 눈치챈 자가 나왔지만 손이 뻗어지는 것보다는 입에서 말이 나오는 것이 빨랐다.
“빛의 재연을 허락하소서.”
마법사들의 주문은 저마다 다르지만, 신에게 올리는 기도 형식일 때가 많았다. 이 땅에 마법을 가져다준 신의 실존을 마법을 쓸 때마다 온몸으로 체감하는 마법사들은 때로 누구보다 신실한 신도였다.
화르륵, 곧 가장 앞에서 추궁하던 경비병의 팔에 불꽃이 일었다.
“아악, 뜨거워!”
“물, 물!”
“끄아악!”
“저놈들 당장 붙잡아!”
눈앞에서 난리가 났는데도 두 마법사는 태연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금발의 마법사가 쏘아붙였다.
“하나도 안 뜨겁거든요?”
“어? 헉!”
경비병이 자신의 팔을 더듬거리더니 놀라서 숨을 헉 들이마셨다.
“뭐, 뭐야. 진짜 안 뜨겁잖아?”
발을 동동 구르며 난동을 부릴 때는 언제고 아무렇지 않게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동료의 모습에 다른 경비병들도 사태를 파악했다.
“진짜네…….”
“보셨죠?”
푸른 머리칼의 마법사는 그들이 축제에 사용한 불꽃이 눈속임임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경비병의 팔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실로 마법사다운 해결 방식이었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비병은 짧게 안도하더니 곧 수치심에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혼자서 펄펄 뛰더니 그 자리에서 검까지 뽑았다.
“공무를 수행하는 경비대에게 함부로 위험한 마법을 쓰다니! 당장 체포하겠소!”
“허어.”
영지가 총체적으로 개판이었다. 금발의 마법사 역시 반쯤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일이래?”
“저 사람들은…….”
조금 전의 요란한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주변에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더 엮여서 좋을 일 없겠다는 판단에 토파즈가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나가려던 참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 여자가 뚜벅뚜벅 경비병 앞까지 걸어갔다. 키는 제법 크지만 빼빼 마른 여자는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이는 카르옌의 또래 정도로 보였고, 옷차림은 수수했으나 행동거지는 당당했다. 게다가 뒤에서 여자를 뒤따르는 셋 중 둘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누가…… 헉, 이리나님?”
경비병 중 하나가 그의 얼굴을 알아본 듯 숨을 들이켰다. 대체 누구이기에 저렇게 반응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무렵, ‘어? 저분…….’ ‘영주님 동생이잖아!’ 하는 구경꾼의 소곤거림이 답을 주었다.
그는 반년 전 영지를 물려받은 새로운 영주, 즉 리스타브 남작의 동생인 모양이었다. 금세 자리를 뜨려던 토파즈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태를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