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8)화 (18/110)

#018

“거부감 없어 보여서.”

토파즈가 하얀 손에 들린 꼬치를 턱짓했다. 카르옌은 조금 전의 동요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태연히 대답했다.

“아. 집 안에만 있는 건 답답해서요. 어릴 때부터 몰래 여기저기 쏘다녔죠.”

“부잣집 자식들은 독이 있는지 없는지 감별하는 하인을 따로 두기도 한다던데.”

바로 얼마 전에 독을 마셔서 생사를 오간 사람치고는 꽤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웬만한 독은 내성이 있어서요. 치유 마법도 쓸 줄 압니다.”

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치유 마법까지 쓸 줄 안다는 건 의외였다.

“그리고 이런 시장 한복판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요? 제가 누군 줄 어떻게 알고 독을 타겠어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카르옌은 기름기가 살짝 묻은 붉은 입술을 손끝으로 닦아냈다.

“지금이라면 독살당해도 별로 미련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살고 싶어서 나한테 의뢰를 요청한 거 아니었어?”

“아, 물론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예전에는 이대로 죽으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정도로 세상에 미련이 많았다면,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다는 소리죠.”

꼭 깨달음을 얻은 고행자처럼 말하고 있었다. 토파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을 뻔한 경험만큼 사람을 바꿔 놓는 경험은 없다는 데는 그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때 펑, 하늘로 불꽃이 쏘아 올려지며 무언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몇몇 사람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즐거운 탄성을 터뜨렸다.

“불꽃놀이가 시작됐나 봐요.”

“종탑 쪽으로 이동하지.”

“네. 두 사람에게 수완이 있었길 바라야겠는걸요.”

글쎄. 어디 가서 바가지나 쓰고 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고요의 종탑이 세워진 광장으로 이동하는 길은 번잡했다. 리스타바트에 사는 모든 사람이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나왔다고 해도 믿을 듯했다.

“아버지. 불꽃이 떨어져서 제 머리에 맞으면 어떡해요?”

토파즈의 귀는 소란을 뚫고 앳된 목소리를 잡아냈다.

“하하. 그게 걱정되니?”

“네! 지붕에 떨어지면 불이 나는 거 아니에요?”

“수백 년 동안 그런 사고는 한 번도 없었단다. 이건 마법이거든.”

“와아.”

아이를 목말 태운 아버지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토파즈님은 괜찮으세요?”

“뭐가?”

“소리가 커서 무섭지는 않으신가 하고요.”

“애도 아니고 별게 다 무섭네.”

멀쩡한 하늘에 불꽃을 쏴 대는 축제를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고작 이런 게 무서울 이유도 없었다. 나란히 걷던 카르옌이 고개를 숙이며 토파즈의 귓가에 손바닥을 댔다. 나긋한 귀엣말이 이어졌다.

“저건 가짜 불꽃이랍니다. 불꽃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온도가 없으니 그저 눈속임에 가깝죠.”

그러나 꼭 무언가 알기라도 하듯 덧붙인 말에 마음이 편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카르옌이 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북부의 리스타바트에서 왜 불꽃 축제가 열리는지, 어릴 때 들은 적이 있어요.”

예전에 초대 황제가 북부로 친정(親征)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리스타바트에 하룻밤 머물렀다. 그날 밤 열린 승전 축하연에서 황제가 마수와의 오랜 싸움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밤하늘을 낮처럼 밝혔다는 것이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아마 진짜 불꽃이었겠죠. 초대 황제인 에페르테는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으니까요.”

카르옌은 역사서에서나 읽은 축제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건물 사이로 종탑 꼭대기가 보였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인파가 많아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앞쪽에 서게 된 카르옌이 비죽 튀어나온 어깨로 토파즈의 몫까지 사람들과 부딪히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편했다. 주변을 적당히 경계하며 인파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불이야!”

불꽃놀이가 한창일 무렵 터져 나온 누군가의 외침은 처음에 농담처럼 받아들여졌다.

“하하. 하늘에 불이 있는 건 처음 보시죠? 불꽃놀이와 딱 어울리는 시원한 호박 주스가 한 잔에…….”

그러나 토파즈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신전에 불이 났다고요!”

“뭐?”

다시 한번 비명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주변으로 파동이 퍼지는 것은 금세였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신전에 불이 났다는데?”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리스타바트의 유일한 신전이 세워진 방향으로 돌아갔다.

다프닌교 신전은 언제나 신께서 길을 밝힌다는 의미로 밤새 등불을 걸어두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평소라면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신전을 살폈을 때 별처럼 작고 노란 불빛 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새하얀 신전이 새빨간 불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밤이라 어두운데도 그 너머로 매캐한 회색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이 선명히 보였다.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했다.

“불이다! 진짜 신전에 불이 났어!”

“당장 소방대를 불러와!”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돌렸다. 불이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서였다.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호위라는 본분을 완전히 잊은, 정신이 나간 행동이었다.

……불을 꺼야 해. 지금 당장.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손톱만 하게 보이던 불꽃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정도 달려서 숨이 찰 리가 없는 거리였음에도 숨이 가쁜 기분이 들었다. 토파즈가 걸음을 멈춰 섰다. 눈앞이 온통 붉었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열기 탓에 등에 땀이 흘렀다.

신전은 새하얀 돌로 지어진 석조 건물이었다. 석조 건물은 기본적으로 화재에 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이 붙어도 멀쩡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내부의 물건까지 모두 돌로 만들어졌을 리 없을뿐더러 주변에는 풀과 나무도 많았다. 오랫동안 열을 받는다면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직 소방대는 도착하기 전이었다. 신전은 쉬이 무너지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타올랐다. 흰옷을 입은 신관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신전 안에서 빠져나왔다.

신전은 상징적인 곳이었다. 신전에서 난 불은 단순한 화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했다.

어떤 이들은 재앙의 징조 아니냐며 절망했으며, 축복을 거두어가지 말라고 간절히 청하기도 했다. 전지전능한 신도 제 신전에 난 불은 못 끄는 모양이라며 조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국민의 95%가 국교인 다프닌교의 신자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나 그 신앙심의 정도는 천 년을 흐르며 옅어진 지 오래였다. 자발적으로 양동이 따위를 들고 달려와 화재를 진압하려 애쓸 만큼 신실한 이들도 있는 반면, 의례적으로 기도를 올리거나 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토파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눈앞의 건물이 신전이라는 자각도 거의 없었다. 그는 옆에서 힘겹게 양동이를 옮기던 사람에게서 한 손으로 양동이를 빼앗아 물을 끼얹었다. 감사 인사 따위는 귀에 닿지도 않았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에 서 있는데도 발끝이 뜨거운 것 같았다. 아니, 정말 붙지 않았나?

“……즈님.”

“…….”

“토파즈님.”

토파즈가 번뜩 몸을 돌렸다. 카르옌이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그를 길 한복판에 버리다시피 두고 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아…….”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시야가 맑아졌다. 토파즈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왜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아니,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마법사는 쓸데없이 예민했다. 카르옌은 토파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주인 모를 양동이를 가져가 발치에 내려놓았다. 이내 돌려 묻지 않는 질문이 날아왔다.

“불이 무서우세요?”

“……아니.”

“그럼. 싫으십니까?”

“…….”

토파즈가 이를 악물었다. 그딴 게 왜 궁금하냐는 날 선 대꾸가 나갈 것 같았다. 그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알겠습니다.”

“……?”

카르옌은 더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둠 속에서 후드를 끌어 내렸다. 매끈한 이마와 콧대가 드러났다. 토파즈를 향한 눈동자에 불꽃이 비쳤다. 그러나 그 푸른 눈은 화마에 삼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꽃마저 잠재워 버릴 것처럼 깊고 시원해 보였다.

카르옌은 토파즈의 팔뚝을 가볍게 쥐어 완전히 제 쪽을 보도록 당겼다. 그리고 한 걸음 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토파즈님은 제 얼굴이나 보고 계세요.”

뜬금없는 말에 눈썹을 찡그리자 카르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꽤 볼만하지 않나요?”

“…….”

황당했다. 등 뒤에서는 불이 번지고 있는데 그보다 제 얼굴이 더 봐줄 만하지 않냐는 듯 고개를 들이미는 사내놈이. 그리고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목 뒤가 풀리는 자신이. 어깨와 손에 얼마나 힘을 꽉 주고 있었는지가 뒤늦게 느껴졌다.

대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는 것인지……. 토파즈는 아연해졌으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톡. 콧잔등 위로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어디서 튄 물인지 살필 새도 없이, 등 뒤에서 빗소리가 났다.

쏴아아. 전조도 없이 쏟아진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 냈다기에는 두려울 정도로 세찬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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