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이튿날 새벽, 시모네의 주민들은 사기꾼 같은 용병들에게서 구구절절한 사죄의 편지와 함께 그동안 뜯어간 돈을 모두 돌려받았다. 신의를 저버렸으니 다시는 시모네 근처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지장까지 찍혀 있었다. 누군가 그 붉은 자국을 보며 ‘이거 피 아니야?’ 하는 의심을 드러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한밤중에 떠나는 용병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손목을 보전한 대가로 돈과 용병패를 뜯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없었다.
하룻밤 사이 오래 앓던 이를 빼낸 듯 여유가 생긴 주민들은 토파즈 일행에게 고맙다며 음식과 말 두 필을 내어주었다. 마을의 마구간을 털어 말 네 마리를 내어준다는 것을 말린 사람은 메르디나였다.
“그리 급한 여정이 아니니 괜찮소. 안 그래도 마을의 사정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우리에게 말을 네 마리나 내어줬다가는 곤란해질 테니 그러지 말게.”
무뚝뚝하지만 사려 깊은 말에 마을 주민들은 더욱 감동하여 직접 지은 옷이며 약초까지 떠넘겼다. 한마디로 역효과였다.
“이봐요, 다들. 갈 길이 바쁜 분들을 막지 말자고요!”
사태를 진정시킨 사람은 안나였다. 일행은 에릭과 안나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목적지인 리스타바트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고삐를 느슨히 잡아끌자 두 마리의 말이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따라왔다. 듣자 하니 카르옌에게 경량 마법이 걸린 마도구가 있어서 그걸 착용하면 둘이서 말 한 마리를 나누어 타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왜 네가 나랑 같이 타지?”
그 말에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저랑 같이 타는 게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별로.”
셋 중 누구라도 별로 상관없었다. 그러나 카르옌만큼의 붙임성은 없는 메르디나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는 듯한 하란보다는 이 괴상한 마법사가 손톱만큼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앞에 타시겠어요? 제가 앞에 타면 토파즈님의 시야를 방해할 테니까요.”
토파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믿기지 않게도, 그의 키가 자신보다 조금 크기는 했다. 희미하게 웃은 카르옌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경량 마법이 걸린 마석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뒤에 탄 사람이 너무 가벼워지면 떨어질지도 모르니 토파즈님이 이걸 쓰세요.”
……경량 마도구를 착용했다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뒤에 타면 떨어질 위험이 높아 보였다. 옆에서도 키가 비교적 작은 메르디나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앞쪽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토파즈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목걸이를 건네받으려 했으나 이번에는 카르옌의 움직임이 더 재빨랐다. 그는 손을 뻗어 굳이 직접 토파즈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서늘한 손끝이 목을 스쳤다. 이내 토파즈가 안장 위에 오르려 하자 카르옌이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
뭐 하자는 건지 몰라 흘깃 보고 가볍게 땅을 박찼다. 평소보다 가벼워진 몸이 붕 떠올랐다. 요령껏 균형을 잡아 훌쩍 말 위에 오르니 카르옌이 빈손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물려 뒷짐 지며 웃었다.
“당연히 혼자서도 잘 타시겠죠.”
설마 했는데 손이라도 잡고 타라고 내민 모양이었다. 하다 하다 저런 놈은 처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붕 위로도 뛰어 올라가는 토파즈에게 고작 말에 쉽게 오르라고 손을 내민 인간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뒤이어 말 안장에 오르는 카르옌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귀족이면 승마 정도는 배웠을 테니 당연한가.
카르옌은 토파즈의 뒤에 붙어 앉았다. 등과 가슴팍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뒤에서 긴 팔이 뻗어져 왔다. 그가 토파즈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함께 고삐를 느슨하게 쥐었다.
언뜻 스친 살갗은 부드러울 줄 알았으나 군데군데에 굳은살이 잡혀 단단했고, 크기도 토파즈의 손을 가릴 정도로 커다랬다. 그럼에도 모양새만은 길고 유려했다.
무게가 가벼워진 탓에 평소보다 말 위에서 몸이 많이 흔들렸다. 토파즈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삐를 단단히 붙잡았다.
“불편하신가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음…….”
고삐를 쥐고 있던 손 하나가 떨어져 나가더니 토파즈의 허리 위로 조심스럽게 안착했다. 허리를 거의 감싸 안은 자세였다.
“……?”
뭐 하는 짓거리냐는 얼굴로 돌아보자 카르옌이 태연하게 말했다.
“고삐에서 손을 떼고 저한테 기대서 편히 앉으세요. 안 그러면 몸이 흔들려서 멀미가 날지도 모릅니다.”
“널 뭘 믿고 고삐를 맡겨.”
“이래 봬도 말에서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믿을 수가 없는데.”
“정말입니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바람을 일으켜 두 사람쯤은 구할 수 있으니 안심하세요. 아니면 목걸이를 제게 건네주시겠어요?”
카르옌이 차라리 자신이 마도구를 착용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저 말대로 마도구를 건넸다가는,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을 때 뒤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말에서 떨어져 본 적 없다는 도련님에게 굳이 지금 최초의 낙마 경험을 선사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안 떨어지겠다고 용을 쓰다가 또 기절이라도 하면 두 배로 귀찮아지는 건 이쪽이었다.
토파즈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꼿꼿이 세우고 있던 등에 힘을 풀었다. 움직이는 소파에 앉았다고 대충 생각하기로 했다. 카르옌이 그의 어깨를 받치듯 조금 더 상체를 가까이하며 팔로 허리를 감아 왔다. 등 뒤에 닿는 가슴팍은 의외로 넓었다.
* * *
“와. 여기서도 노숙하게 생겼네요.”
하루를 꼬박 달려 리스타바트에 도착하자마자 하란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리스타바트는 북부에서는 제법 큰 도시였다. 그렇다 해도 수도나 풍요로운 남부의 도시와는 규모로 비교가 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예상한 것 이상의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간과한 점은 리스타바트에 여름마다 축제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바로 불꽃 축제였다.
“그러고 보니 시모네의 주민이 그랬었죠.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소란을 잠재우려 한다’라고.”
하란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벽보를 손끝으로 튕겼다. 벽보에는 밤하늘 위에 형형색색의 불꽃이 꽃 모양으로 펼쳐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같은 영주 아래의 다른 마을에서는 마수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하고 있었는데, 산을 몇 개 넘자마자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역시 영주 성이 있는 곳은 다르다는 걸까요.”
누군지 모를 악덕 영주는 제 앞마당 관리에는 열성인 듯했다. 축제의 영향이 없지 않다고 해도 성벽 안팎으로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며 돌아다니는 용병들의 숫자가 시모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잠깐 거쳐 갈 도시에서 축제를 하든 말든 토파즈는 하등 관심 없었지만, 문제는 축제 탓에 대부분의 여관이 만실이라는 점이었다. 리스타바트에 도착한 때가 이미 저녁 무렵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하란의 말처럼 길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묵을 곳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죠?”
“웃돈을 얹어 주면 하나쯤은 구할 수 있지 않겠어?”
카르옌이 속 편한 귀족 같은 소리를 해댔고 하란과 메르디나가 순조롭게 설득되었다.
“그럼 둘로 나눠서 숙소를 찾아보는 걸로 하자. 너희는 저쪽, 나와 토파즈님은 이쪽. 이따 불꽃 축제가 시작되면 고요의 종탑 앞에서 만나기로 해.”
하란은 구성에 불만이 많은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였으나 굳이 말을 보태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희도 갈까요?”
카르옌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마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을 듯했다. 그래봐야 토파즈의 시선에서는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얼굴이 갸우뚱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토파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옌이 여관을 찾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방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기는커녕 늘어선 가판대 사이를 팔랑거리며 지나다니기 바빴다.
“노숙이 취향에 맞았나 보지?”
토파즈가 묻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란과 메르디나를 신뢰한다고 해 둘까요.”
“……친우를 잘못 사귀어서 그들도 고생이 많군.”
“아, 그건 정말로 그렇죠.”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들뜬 분위기였고 나무나 가게의 지붕 곳곳에 붉은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이 머리나 옷에 달고 있기도 한 것을 보니 저 리본이 불꽃 축제의 상징인 모양이었다.
“토파즈님은 리본을 달 필요가 없으시겠네요.”
“……?”
“머리칼이 저 리본보다 더 붉고 고우시니 말입니다.”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토파즈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그딴 말투는 어디서 돈 주고 배우는 건가?”
“물론이지요. 두 살 때부터 착실히 배웠답니다.”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카르옌은 유유자적 축제를 구경 나온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거리를 쏘다녔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저렇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할 것 같은 놈이었다. 적이라면 그래서 더 짜증 날 것이고.
문득 길을 걷던 카르옌이 건너편 가판대에 올려진 무언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있는 축제 음식을 파는 가판대였다.
“먹고 싶으면 침 흘리지 말고 사 먹어.”
돈도 많으면서 궁상을 떨고 있었다.
“아뇨.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조금 궁금해서요. 감자인가요? 저렇게 나선형으로 깎은 건 처음 봅니다.”
얇게 깎아 꼬치에 꿴 감자 구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북동부에서는 소라 감자라고 불렀던가. 궁금해서 빤히 쳐다볼 정도면 그게 먹고 싶다는 뜻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토파즈가 가판대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거 두 개.”
“예에. 5코퍼입니다!”
“아까 하나에 1코퍼라고 하는 거 다 들었습니다.”
“……흠흠. 잘못 말했네요. 2코퍼만 주십시오.”
토파즈의 싸늘한 눈빛을 받은 상인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토파즈는 상인의 손에서 꼬치 두 개를 건네받아 하나를 카르옌에게 건넸다. 카르옌은 그 꼬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돈은 네가 낼 거야.”
“아하하. 그런 거였나요?”
카르옌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무작정 금화를 내미는 짓을 저지르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카르옌은 1실버 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값을 치렀다. 그리고 기름이 묻은 꼬치 끄트머리를 잡고 얇은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곧 감상을 내뱉었다.
“음, 특별한 맛은 아니네요.”
“그냥 기름에 전 감자 맛이지.”
“그렇네요.”
수긍하면서도 카르옌은 몇 번 더 감자를 베어 먹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지저분한 거리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며 요란을 떨어도 그러려니 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거부감 없이 이것저것 입에 넣었다. 입맛에 맞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낯설어 보이지도 않았다.
“원래 시장 같은 곳을 자주 돌아다녔어?”
“네?”
카르옌이 손을 움찔 멈추며 되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별 질문도 아닌데 꽤 놀란 모습이었다. 토파즈는 의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