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시모네는 아침부터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이름 모를 기사들이 마수를 물리쳤다는 소식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금세 전해졌다.
모두 무찌른 것이 아니라 내쫓은 것으로 축소했으나 토파즈가 마수를 단칼에 해치우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주민이 한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날이 밝자마자 조용히 마을을 떠나려던 계획이 위기에 처했다. 주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붙잡아 온 탓이었다.
“하루쯤은 괜찮겠죠. 그렇게 급한 일정도 아니니까요.”
정작 카르옌은 태연자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토파즈를 보며 왜인지 흡족한 얼굴로 턱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결국 일행은 하룻밤 더 머무르고 내일 날이 밝자마자 시모네를 떠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토파즈 외의 세 사람에 관해서는 자세한 내력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광장에서 잔치가 열렸다. 그래 봐야 각자 조금씩 가져온 음식과 술이 전부인 조촐한 잔치였으나 기세만큼은 승전 축하연 못지않았다. 네 사람도 거기에 끼어 고기를 한 입씩 뜯었다.
“예전에 내 동생이 용병 가넷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꼭 사람이 아니라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지 뭔가. 그 녀석이 원체 허풍이 심해서 틀림없이 과장한 건 줄 알았는데, 오늘 이 기사님을 보고 나니 그게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더구먼.”
토파즈는 엄연히 따지면 기사가 아니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묵묵히 고기를 씹는 데 집중하자 누군가 그의 앞에 시원한 맥주가 가득 담긴 컵을 탕, 내려놓았다.
“에이, 무슨 소리! 내가 보기엔 이 기사님께서 가넷보다도 한 수 위인 것 같은데? 아까 매처럼 날아서 성벽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 못 봤어?”
목격한 자들의 기억은 고양된 감정과 술기운이 맞물려 점점 과장되어 갔다.
“그러고 보니 마침 머리칼도 붉은색이시네? 영웅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어.”
그렇게 말하는 주민 중 하나도 붉은 머리칼이었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밤까지 이어졌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에서 빠져나온 네 사람은 치안대장 에릭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카르옌이 입을 열었다.
“하란, 소득은 있었어?”
“그래. 토파즈님 말씀대로 노장이었던 전대 리스타브 남작은 지난겨울에 사망했고, 첫째 아들이 새롭게 남작위에 올랐다고 해. 시모네뿐만 아니라 인근의 영지민들은 새 영주인 젊은 남작에 대해 치를 떠는 모양이고.”
잔치 자리에서 마냥 먹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하란은 주민들에게 말을 붙이며 쓸 만한 정보를 수집해 왔다.
“기사단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에는 묵묵부답이고, 오히려 원래 있던 경비대마저 축소했다는군. 영지 사정이 어려워졌나 했더니 남작은 오히려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있고.”
“흐음.”
누가 들어도 수상한 구석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흔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카르옌이 거실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램프에 불을 붙이려던 손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토파즈가 만류를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이었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쉿. 토파즈는 검지를 세워 입가에 가져다 댔다.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창가에 선 하란에게 손짓하자 그가 벽 쪽으로 달라붙었다. 메르디나는 현관문 옆에서 몸을 바짝 낮췄다.
기척을 숨긴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수는 총 여섯이었다. 그들은 에릭의 집을 둘러싸듯 다가오더니 창문 쪽으로 반, 현관문 쪽으로 반 나누어 움직였다. 야밤에 살금살금 다가와 남의 집을 둘러싸는 놈들이 멀쩡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하란과 토파즈 사이에 있는 창문을 내리쳤다. 바깥의 충격에 의해 유리로 된 창이 깨지며 집 안쪽으로 파편이 잘게 쏟아졌다.
파편을 막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야겠지만 침입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작은 파편 하나가 튀어 토파즈의 뺨을 스쳤다. 북부는 유리 값이 비쌀 텐데. 집주인인 에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그리던 때였다.
여기저기 흩뿌려지던 유리 조각이 허공에서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토파즈는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의자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카르옌의 손끝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금빛 부스러기가 반짝였다.
시간이 멈춘 듯했던 착각은 잠시였다. 유리 파편이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더니 잘 맞는 퍼즐 조각처럼 서로 매끄럽게 몸을 합쳤다. 눈을 한 번 깜빡한 사이 유리는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것처럼 멀쩡히 창가에 붙어 있었다.
“뭐, 뭐야!”
“쉿.”
창문 너머에서 당황한 기척이 느껴졌다.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곧 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그러나 그쪽에는 이미 메르디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메르디나는 떨어진 문짝과 그 뒤에서 달려 들어온 장정 하나를 동시에 베어내고, 뒤따라 들어온 이의 발목을 차서 넘어뜨렸다.
파각, 두꺼운 나무 문이 반으로 쪼개져 침입자 세 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창문 오른쪽에 선 하란이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정상적으로 열어젖혔다. 그리고 긴 다리를 뻗어 창문 바로 앞에서 기웃거리던 침입자의 배를 걷어찼다.
“자하르! 젠장.”
곧 열린 창으로 날카로운 검이 찔러 들어왔다. 어두워서 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눈먼 검에 누가 맞아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하란은 어둠 속에서 정확히 검 손잡이를 쥔 손목을 노려 찔렀다. 그리고 창밖의 상대가 검을 놓치는 순간 멱살을 잡아채 집 안으로 내던졌다.
“한 놈이 도망치는데.”
“아마 가다가 재수 없게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을 것 같은걸.”
금방이라도 창문을 타 넘어 쫓아 나가려는 하란에게 대꾸한 사람은 카르옌이었다. 마법사의 언어를 해석하자면, 기꺼이 넘어지게 만들어 줬다는 뜻 같았다.
토파즈는 집 안에 쓰러져 있는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어제 마을에서 본 용병들이었다. 안 그래도 손봐 주려던 참인데 제 발로 굴러 들어오다니 수고를 덜었다. 토파즈가 입을 열었다.
“너희, 정말 녹스 소속인가?”
“크윽. 그러는 네놈들은 정체가 뭐지?”
“질문은 이쪽에서만 할 거야.”
토파즈가 하란의 발밑에 밟혀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겉옷 안쪽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뚝, 끈이 끊어진 목걸이에는 동색의 둥근 나무패가 달려 있었다. 앞면에 양각으로 나뭇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용병 길드의 마크인 교차하는 세 자루의 검이 새겨져 있었다. 토파즈가 손끝으로 그 무늬를 쓸었다.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용병 길드 연합, 녹스 소속임을 증명하는 패가 확실했다. 용병패는 신분패와 다름없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그 아래에 이름과 소속 지부, 지장도 찍혀 있었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도 정식 패를 주다니, 녹스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동패의 용병은 녹스 소속 중 가장 낮은 등급이었지만 그렇다고 동패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길드에 입단했다고 바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습 신분으로 최소 1년 동안 의뢰를 잡음 없이 수행했음을 상위 등급의 길드원 세 명이 보증해야 정식 패가 주어졌다. 그런 제도가 있기 때문에 녹스 소속의 용병들이 신뢰를 받는 것이었다.
“네놈들은 왜 우릴 방해하는 거지? 설마 다른 길드 놈들이냐?”
메르디나가 무릎 꿇려 놓은 세 남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마을 주민들과 설전할 때 가장 앞에서 협박을 내뱉던 무리의 리더 같은 남자였다.
그는 토파즈 일행을 길드 연합에 가입되지 않은 다른 길드의 용병으로 결론 내렸는지, 침이 튈 정도로 욕을 내뱉었다. 무척 분하고 억울한 얼굴이었다.
토파즈는 대답 대신 뚜벅뚜벅 걸어가 발로 그 뺨을 걷어찼다. 무릎 꿇고 있던 거구의 남자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컥, 대체…….”
“질문은 나만 한다고 했을 텐데.”
“…….”
가뿐하게 다리를 내려놓은 토파즈는 뒤에 서 있던 메르디나와 눈이 마주쳤다. 메르디나는 눈썹을 까딱였으나 구태여 말리지는 않았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니까 즐거웠어?”
토파즈는 남자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그가 품 안에서 한 뼘짜리 단검을 꺼냈다. 옆에서 함께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여자가 빈틈을 노리듯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언제 검집을 벗겨 냈는지도 모를 날카로운 단검이 여자의 발 옆에 내리꽂혔다.
“……!”
까딱 잘못했으면 새끼발가락이 날아갔을 위치였다. 카펫에 구멍을 낸 토파즈의 시선은 여전히 남자를 향해 있었다.
“하찮은 목숨이라도 아까울 수는 있겠지. 그런데 너희에게 선의로 목숨을 걸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던가? 너희가 한 건 거래잖아.”
“…….”
바닥에서 뽑아낸 단검 끝이 남자의 턱에서 목, 가슴팍까지 그림을 그리듯 이어졌다. 느긋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남자의 턱이 파들파들 떨렸다.
“돈을 받았으면 그 값을 한다. 용병의 기본 의무를 다하지 못하겠다면 패를 내려놓으면 돼. 네게는 지나치게 무거운 패인 모양이니.”
툭, 가슴팍에 매달린 동패를 치고 지나간 검 끝이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목을 건드렸다.
“그게 어렵다면 손목을 잘라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해 줄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토파즈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았다. 본능적인 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