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이분들이 도와준다고 하셨다고요?”
“그래! 기사님들이셔, 안나.”
안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집에 발을 들이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데다 넷 중 셋은 어두침침하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 이상했다.
그러나 안나의 의심은 생각보다 빠르게 거두어졌다. 집 안에 들어온 카르옌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기 때문이었다.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칼과 백옥같은 뺨이 드러났다. 부녀가 동시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집까지 내어준다니 고맙군. 하룻밤 실례하지.”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였다.
“아, 아닙니다. 누추하지만 편히 머물다 가세요.”
두 사람의 집은 소박했으나 깨끗했다. 둘 외에 다른 가족은 없는 듯했다. 싱싱한 화초와 먼지 없는 액자에서는 꼼꼼한 손길이 느껴졌다. 액자 안에 들어 있는 에릭과 안나, 그리고 젊은 여성의 초상화를 보던 토파즈가 고개를 돌렸다.
“물어볼 게 몇 가지 있는데.”
“네.”
“마을 치안대에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몇이나 되지?”
“……저희 부녀를 포함하여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훈련을 받았다고 해 봤자 기초 학교에서 검술 수업을 들은 수준이거나, 제 아버지처럼 검을 놓은 지 오래된 경우이고요.”
“그런데도 내일 마수를 막으러 가겠다고? 죽을 텐데, 틀림없이.”
토파즈의 단호한 말투에 부녀의 표정이 굳었다.
“위험하다는 것쯤은 저희도 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다시는 마을 안에 마수를 들일 수 없으니까요.”
“이십 년 전 일 때문인가?”
“……네. 아시는군요. 시모네는 이미 비극을 겪은 마을이에요. 제 어머니도 그때 세상을 떠나셨고요.”
정확히는 이십사 년 전, 한밤중에 마을에 비행형 마수가 침입했고 하필 ‘고요의 종탑’의 종이 고장 나서 피해가 컸다고 했다.
제국령에 있다면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의무적으로 설치되는 고요의 종탑에는 마수의 침입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종을 울리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종탑에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지만 모두가 고요하기를 바라는 종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들었다. 고요의 종이 울리지 않는 것이 곧 마을의 평화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셨지만 어렸던 저와 이웃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검 대신 오래된 농기구를 드셨습니다. 덕분에 살아남은 제가 이제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으니, 저도 제 가족과 이웃을 위해 뭐라도 해 볼 생각입니다.”
안나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말린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처럼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토파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 날 새벽. 토파즈 일행은 동이 트자마자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뒷산’이라고 부르는 산은 레프 산맥의 일부로 제법 가팔랐다.
마수들은 산자락 너머에 모여 있다고 했는데, 토파즈 일행은 산꼭대기를 다 오르기도 전에 마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마을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추측은 사실인 듯했다.
새벽녘 이슬이 내린 산은 젖어 있었다. 축축한 풀 냄새와 함께 희미한 꽃향기가 풍겼다.
“처음에는 거절하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메르디나가 말했다. 토파즈가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다’라며 식당에서 일어났을 때를 말하는 듯했다. 토파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마을 주민들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싸움일지 몰라도 토파즈에게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앞에 서는 건 무기를 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의무니까요.”
어젯밤, 영주 성에 갔다던 주민 세 명 중 한 명만이 시모네로 돌아왔다. 주민들은 영주 성 앞에 찾아가 영주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읍소했는데, 이야기를 들어주기는커녕 소란을 일으켰다는 죄로 경비병에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용병을 구하기 위해 따로 움직이던 한 명만이 화를 피해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뺨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필 엊그제 리스타바트 근처에서도 마수가 출몰했대요.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소란을 잠재우려고 기사며 용병들이 죄다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도와줄 사람은 찾지 못했지만 소식이라도 얼른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밤새 말을 몰아 돌아온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은 황당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새 영주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야 내 진작 알았소. 그런데 무고한 시민을 재판도 없이 가두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들은 농기구라도 들고 당장이라도 영주 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치안대장 에릭은 참담한 기색이었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만 기다리자며 또 한 번 주민들을 설득했다. 토파즈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마수를 쫓아내 줄 테니, 그 전에 주민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정말이십니까? 그래도 위험하니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됐으니 얌전히 있기나 해. 마을 안으로는 피 한 방울 튈 일 없을 테니까.’
토파즈로서는 민간인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오히려 방해였다. 게다가 그들 일행은 토파즈가 생각해 봐도 지나치게 튀었다. 작은 동네일수록 소문이 무서운 법이니 굳이 목격자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넌 되도록 얌전히 있어.”
토파즈는 용케도 제 걸음에 맞춰 산을 오르고 있는 카르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렌로샤 숲에서 썼던 것 같은 대규모 전투 마법을 쓴다면 조용히 움직이려던 목표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카르옌을 아는 누군가가 그를 찾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마법의 흔적을 찾을 테니까.
“그럼 저도 기사인 척할까요?”
“네가?”
토파즈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카르옌이 웃으며 마법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손에 잡혀 딸려 나온 것은 희고 기다란 검 손잡이였다. 그가 검 한 자루를 쑥 뽑아냈다. 이쯤 되면 저 안에 없는 물건이 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이래 봬도 검술을 배운 적이 있어 어지간한 기사 한 명 몫은 한답니다.”
정말이지 미덥지 않은 소리였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산 아래로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할까. 토파즈는 짧게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을 마치기도 전에 수풀을 헤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였다.
토파즈는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 몸통만 한 검은 뱀의 턱 아래로 검을 찔러 넣었다. 단단한 비늘과 살갗을 꿰뚫고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틈을 주지 않고 옆으로 달려드는 마수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카르옌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일순간 풀과 꽃향기가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검 끝이 제 앞으로 달려든 마수의 머리를 베었다. 검을 내찌르고 다시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자세가 생각보다 그럴듯했다. 토파즈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아주 훌륭한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혼란 틈에서 그럭저럭 자기 하나는 지킬 수 있을 정도였다.
“방어나 신경 써.”
짧게 말한 토파즈가 카르옌의 뒤를 노리는 마수의 미간을 정확히 갈랐다. 갑각류처럼 딱딱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토파즈의 검은 그마저 꿰뚫었다. 파편과 함께 피가 튀었다.
“감사합니다.”
카르옌은 뺨에 튄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웃었다. 그는 전갈 같기도 꽃게 같기도 한 마수를 힐긋 보며 말했다.
“음, 키올렌에서 먹은 게살수프가 떠오르네요.”
마수를 보며 그따위 생각을 하다니 비위가 좋았다. 그러나 토파즈도 조금 의아하던 참이었다.
마수에 대한 연구는 지난 천 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바다 너머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것이라는 가설이 폐기된 이후로도 여러 가지 이론이 등장했다. 현재는 ‘마수는 마나가 고여 있는 곳에서 자연적으로 태어난다’는 주장이 거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었다.
마수의 생김새는 보통 근처에 사는 종의 생김새와 흡사하기 때문에 원래 대륙에 살던 생물이 마나를 흡수해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지형에 유리하게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라는 반박도 있었지만, 어쨌든 저 마수는 산간 지역에서 발견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형태였다. 레프 산맥을 넘어 북동쪽 해안에서 넘어온 것일까.
“마을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몰아넣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사람은 각자의 앞에 달려드는 마수들을 하나씩 처치했다. 순식간에 숫자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저거.”
하란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이었다. 꼭대기에서 마수 한 마리가 잠자리처럼 얇은 날개를 펼치며 네 사람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방향이 마을 쪽임을 확인한 토파즈가 가장 먼저 뒤쫓아갔다.
마수의 비행 속도는 무게에 비하면 기이할 정도로 재빨랐으나 토파즈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는 산을 뛰듯이 내려갔다.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산 아래, 반쯤 부서진 성벽 바로 안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동이 트자마자 모였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병장기를 들고 있는 이들이 절반, 그들을 말리는 이들이 절반이었다.
에릭이 부서진 성문 입구를 등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에서는 토파즈가 보이지 않았겠지만, 토파즈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때 마을 입구의 종탑에서 묵직한 종소리가 울렸다.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크고 다급한 소리였다.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굳었다.
고요를 깨는 저 종소리의 의미를 모르는 제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굳어 있던 사람들은 이내 눈앞에 나타난 마수를 발견하고 더욱 경악했다.
“마, 마수다!”
“정말 비행형이야!”
“오, 신이시여!”
사람들은 두려움에 무기를 내려놓거나 반대로 온 힘을 다해 꽉 쥐어 왔다. 그 와중에 에릭은 마수의 뒤를 쫓아 달리는 토파즈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토파즈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똑같이 마나를 다룰 수 있어도 마법사와 검사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마나를 몸 밖으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검 끝이 닿는 범위 내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게 억울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검 끝이 닿게 하기 위해서는 더 빨리 달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머리 위로 새카만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어느새 토파즈는 마수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한 번의 도움닫기로 성인의 키를 뛰어넘는 부서진 성벽 위로 올라섰다. 토파즈는 성벽 윗부분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이제 마수는 코앞에 있었다.
휙, 쭉 뻗은 오른손을 횡으로 길게 갈랐다. 종이 한 장을 베는 것처럼 가벼운 소리와 함께 마수의 몸이 둘로 갈라졌다.
토파즈의 등 뒤에 서 있던 주민들은 입을 벌린 채 붉은 머리칼이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에 힘이 풀려 무기를 떨어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토파즈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마수의 피는 성벽을 기준으로 정확히 마을 바깥으로만 흩뿌려져 있었다. 토파즈는 얼빠진 얼굴의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숙박비로는 모자라지 않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