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죽은 사람이 없는 게 기적이에요.”
어느새 마을 사람들은 에릭의 식당 1층에 모여 앉았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닌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부상자 둘은 사람들에 의해 시모네의 유일한 의원에 실려 갔다.
토파즈는 옆자리의 카르옌을 힐긋 살폈다. 초면인 토파즈 앞에서도 숨 쉬듯 마법을 써 대기에 이번에도 대책 없이 나서는 것 아닌가 했는데, 그는 생각에 잠겨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치유 마법에는 재주가 없나? 쓸 수 있더라도 굳이 나서지 않는 편이 도망자로서 현명한 처세이기는 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마법사의 존재는 너무 도드라졌다.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더더욱.
대화는 1층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청각이 좋은 토파즈는 조금만 집중하면 그들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수의 수가 열에 가깝다는 이틀 전 정찰에는 오류가 있었어요. 열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에요.”
에릭의 딸이자 치안대원인 안나의 말에 사람들이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확실해, 안나?”
“네. 최소 열셋. 그게 디마가 희생을 각오하고 다가가 확인한 결과예요. 그리고 그중에는 비행형 마수도 한 마리 이상 있었어요.”
“…….”
이번에는 탄식조차 없었다. 비행형 마수는 분명 상대하기 까다로운 종류였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단순히 막연한 두려움 이상이었다. 토파즈의 의문에 답을 준 사람은 하란이었다.
“제국력 천 년 전후로 마수에 피해를 본 마을이 많았던 것은 아실 겁니다. 요즘도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해도 당시에는 유독 규모가 큰 습격이 많았죠.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거나 주민의 절반이 몰살당할 정도로요.”
“시모네도 그중 하나였던가?”
“네. 몰살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한창 기승을 부린 것이 비행형 마수일 겁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치안이 왜 이렇지?”
“그 점이 좀 이상합니다. 제가 알기로 시모네는 기사 가문인 리스타브 남작의 영지인데, 그동안 영지 관리가 소홀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20여 년 전 습격에서도 남작이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영지에 나타나 주민들을 구했다고 들었고요.”
“그 남작이라면 얼마 전에 죽었을걸.”
반년쯤 전, 의뢰 때문에 시모네에 잠깐 들렀을 때 영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영주가 죽었다고 영지민들이 진심으로 슬퍼하는 광경은 그리 흔치 않아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수도에만 처박혀 있으니 북부의 소식에 어두워지는군요. 새롭게 가문을 이어받은 자가 있을 텐데, 그 이후로 영지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나 봅니다.”
그러나 잠깐의 혼란으로 보기에는 영주가 바뀐 지가 최소 여섯 달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북부에서 여섯 달이나 치안에 공백이 있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저기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메르디나가 창 아래로 보이는 골목을 가리켰다. 여섯 명의 인영이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모두 짧은 머리칼에 검과 도끼 등을 차고 있는 것이 얼핏 봐도 용병 티가 났다.
그들은 에릭의 가게 앞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다.
“기어코 부상자가 생겼다지? 그러게 괜히 나서지 말고 우리한테 맡겼으면 서로 좋지 않았어.”
용병들의 리더로 보이는 키 큰 남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거들먹거리는 태도였다.
“이게 누구 탓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안나가 분개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용병은 과장스럽게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우리는 분명 말렸는데 왜 우리 탓을 하시나.”
“당신들이 돈을 받아 놓고 꿈쩍도 하지 않으니, 저희는 살기 위해 나선 겁니다.”
“마을에서 우리 측 요구를 전혀 반영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지. 이번에 나타난 마수의 숫자가 열 마리는 된다며. 최소한의 생명 수당도 못 받는데 누가 움직이겠어? 우리도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는 사람들인데 푼돈에 목숨을 걸고 싶겠냐고.”
“처음 계약했을 때랑 말이 다르잖아요. 이미 계약금까지 선금으로 받아 가 놓고 이러는 건 직무 유기 아닙니까?”
“그깟 선금이야 돌려달라면 줘야지. 근데 우리는 여기에 붙잡혀 있느라 다른 의뢰를 하나도 못 받았는데, 그럼 그에 대한 배상금을 줘야 하지 않나? 우린 뭐 쫄쫄 굶어 죽으라는 거야?”
흡사 용병이 아니라 빚쟁이 같은 말투였다. 그들의 목에서 용병 길드 연합, 녹스의 용병패를 발견한 토파즈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삼류 용병인 줄 알았는데 길드 연합 소속 용병이었다니.
“그래서 주민들 목숨을 인질 삼아 그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뜯어내겠다는 거요? 마수가 코앞까지 왔는데 끝까지 이러는 건 다 같이 죽자는 뜻인가?”
마을 주민의 격양된 말에 용병이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우리야 다들 자기 한 몸 지킬 능력은 있으니 걱정 마시오. 남 지키려고 애쓰다가 개죽음당하느니, 불명예를 감수하더라도 살아남는 쪽을 택해야지.”
죽는 건 너희뿐이라는 소리였다. 도적보다 못한 놈들이라며 소리치는 주민의 목소리에도 용병들은 꿈쩍없었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아는 얼굴이었다.
“우리 요구를 받아들일 거면 오늘 여섯 시까지 우리가 묵는 여관으로 오시고, 안 오면 우리는 마을을 떠날 테니 그렇게 아시오.”
용병들은 제 할 말을 마치고 유유히 떠났다. 남은 주민들은 한탄을 쏟아냈다.
“이런 식으로 가격을 높인 게 대체 몇 번째요?”
“반년 사이에 비용이 다섯 배가 올랐어! 이대로면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고 사는 집들은 밥도 굶어야 할걸.”
“그렇다고 당장 오늘 마수 밥이 될 수도 없잖아요.”
“이제라도 마을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거 아닐까?”
“평생 일궈온 걸 버리고 떠나자니, 죽자는 거나 다름없소. 게다가 아이나 노인들은 어쩌고?”
약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곧장 반박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하루아침에 터전을 버리는 건 택도 없는 이야기라는 주장이 득세했다.
“그럼 역시 저 용병들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도 울화통이 터져 죽겠지만, 일단 이번 위기는 넘겨야죠.”
“하지만 지난번에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면서 돈을 뜯어 갔잖아. 더는 믿음이 안 가. 위험한 상황이 되면 우리가 죽어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도망칠 게 뻔해.”
“안 되겠어요. 나라도 무기를 들겠어요. 마을 안쪽으로는 절대 못 보내! 우리 딸은 아직 세 살이라고요.”
주민들은 불안함에 용병들에게 찾아가 돈을 더 주자는 이들과 차라리 직접 무기를 들겠다는 이들로 나뉘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며 사람들을 다독인 것은 치안대장 에릭이었다.
“잠깐만, 다들 진정합시다. 영주 성으로 간 이들이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이면 돌아올 거예요. 영주님이 기사를 보내주지 않으면 도와줄 다른 용병이라도 구해 보겠다고 했으니, 우리 내일까지는 기다려 봅시다.”
“그래.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잖아. 마수들은 빛을 싫어하니 그 잠깐 사이에 별일이 있진 않을 거야.”
그 말에 설득력이 있었는지 격앙되어 있던 주민들이 누그러들었다. 정확히는 빛이 아니라 태양을 싫어하는 것이었고, 모든 마수가 그렇지도 않았지만.
“그럼 저는 부상자들의 상태를 보고 올게요.”
“그러렴, 안나. 조심히 다녀와라. 그럼 난 마저…… 헉.”
말을 잇던 에릭이 숨을 들이켰다. 곧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토파즈의 일행을 손님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듯했다.
“손님들,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만……. 식사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셨나요?”
다시 봐도 치안대장이라는 직책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키가 제법 크기는 했으나 칼이라고는 식칼 정도나 겨우 들어 봤을 것처럼 유약한 인상이었다.
“마을 사정이 복잡해 보이던데.”
“아, 예에……. 모두 들으셨군요.”
토파즈 일행이 소란을 모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릭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난감하면서도 머쓱해 보였다.
“들으셨다면 사정을 대충 아시겠지요. 저희야 평생 일군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처지지만, 손님들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떠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에릭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토파즈는 아래층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 와중에도 깨끗이 비운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용병들은 영지와 계약된 용병이 아닌가? 왜 주민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아……. 그들은 주민들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영지의 지원이 사라져 저희가 한두 푼씩 모아서 의뢰를 맡겼지요.”
“저들 외에 다른 용병은 없어?”
“이런 시골구석까지 찾아오는 용병이 많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저들만 있던 건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자들이 마을과의 계약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용병들을 훼방 놓았다고 하더군요.”
마을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 자신들밖에 없어지자 그 뒤로 마음껏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토파즈의 표정이 굳자 에릭은 체념한 얼굴로 물었다.
“금방 떠나실 거라면 말과 식량을 준비해 드릴까요? 곧 망할 마을이라도 그 정도는 준비해 드릴 수 있답니다.”
“떠날 생각은 없어.”
“예?”
토파즈의 대꾸에 에릭이 눈을 크게 떴다.
“우리는 여기서 하룻밤 묵고 떠날 예정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근처에 괜찮은 여관이 있는지 알려 준다면 좋겠소만.”
끼어든 메르디나의 어조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 당장 마수가 출몰할지도 모르는데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에 에릭은 당황했지만 곧 세 사람의 허리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검을 곁눈질했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영주 성에서 오신 분들은 아니더라도 기사님들이신 듯한데……. 맞으십니까?”
일행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으나 에릭은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확신한 듯했다. 그가 테이블로 다가와 간절히 청했다.
“기사님들, 부디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토파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도망치는 처지라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는 세 사람과 차례로 눈이 마주쳤다. 토파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