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3)화 (13/110)

#013

일행이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토파즈는 주변을 살펴보고 오기로 했다.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곳곳에 오래되지 않은 발자국이 있었다.

그의 일행처럼 지름길을 택한 사람들의 흔적일 수도 있겠지만 방향이 두서없이 찍혀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토파즈는 그 발자국을 유심히 보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강줄기에서 물고기도 몇 마리 잡았다. 긴 나뭇가지에 물고기를 꿰어 돌아가니 두 기사와 한 명의 마법사는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메르디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고 하란은 뚝딱뚝딱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르옌은 그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가 토파즈를 발견하고 일어났다.

“토파즈님, 별일 없으셨나요?”

“응.”

“어서 앉으세요. 메르디나가 불을 피우고 하란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넌 뭐 했어?”

무심코 묻자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지휘했습니다.”

시키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이었다. 기대도 안 했다.

“이거.”

낚아 온 물고기를 내밀자 하란이 반색하며 나뭇가지를 주워 얇고 뾰족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물고기를 꼬치에 한 마리씩 꿰고 소금도 아낌없이 뿌렸다. 순식간에 요리의 가격대가 올라갔다. 꼬챙이를 모닥불 앞에 세우자 곧 익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고기는 어떻게 잡으셨습니까? 그물이나 작살도 없으셨을 텐데.”

“그냥 검으로 찔렀어.”

“……아하.”

하란이 그런 비법이 있었냐며 중얼거렸다.

식사는 야영치고 호화스러웠다. 절반은 하란의 요리 솜씨 덕분이었고, 절반은 카르옌의 마법 주머니 덕분이었다. 걸어 다니는 주머니로써 제 역할을 다한 카르옌은 생선이 꿰인 나무 막대를 어설프게 들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생선 가시를 하나하나 바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답답함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좀 줘 봐.”

결국 참지 못한 토파즈가 막대를 가로챘다. 그는 나무 그릇에 생선을 내려놓았다. 키올렌에서 다섯 개에 1실버를 주고 산 그릇인데, 토파즈가 직접 만든 것으로 착각한 카르옌이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왔다. 토파즈는 굳이 진실을 밝히지 않고 마음껏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토파즈는 생선 가운데를 갈라 요령 좋게 뼈를 제거했다. 잘 익은 생선 살을 내려다보던 카르옌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맨손으로 살점을 집어 그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무슨……. 짐승 새끼한테 먹이 주는 것도 아니고. 무심코 한 행동에 소름이 끼쳤다. 곧바로 다시 손을 물리려는데 카르옌이 잽싸게 고개를 내미는 것이 빨랐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카르옌은 흰 살점을 꼭꼭 씹어 삼키더니 느긋이 입꼬리를 당겼다.

“맛있네요.”

“…….”

눈이 마주친 하란이 조용히 눈썹을 까딱였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한 시선이 거슬렸으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파즈는 그릇을 카르옌의 앞으로 툭 밀어주었다.

“네 손으로 처먹어.”

“네.”

카르옌이 말끝을 늘이며 실없이 빙글거렸다.

* * *

바스락. 바깥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토파즈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기척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작은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마수나 산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기척을 느꼈는지, 안쪽에서 천막이 살짝 젖혀지더니 메르디나가 상체를 내밀었다. 하란과 카르옌도 깨어난 듯했다.

토파즈는 언뜻 보면 생각 없이 태평해 보여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 세 사람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쫓기고 있다더니 설마 벌써 따라잡힌 건가.

그러나 토파즈는 금세 그 가정을 지웠다. 훈련받은 이들의 발걸음 소리라기에는 지나치게 어설펐다.

“해치울까요?”

어느새 천막에서 나온 카르옌이 뒤에서 속삭였다.

“쉿.”

해치우긴 뭘 해치워. 토파즈는 조용히 하라며 카르옌을 뒤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토파즈의 검이 뽑히는 일은 없었다.

“가진 거 다 내놔!”

“…….”

“…….”

전형적인 외침과 함께 나타난 것은 복면을 뒤집어쓴 도적 떼였다. 숫자는 총 다섯이었다. 그러나 기척을 전혀 숨기지 못할 정도로 어설펐고, 들고 있는 무기들도 날이 무딘 검이며 농기구 따위였다.

카르옌은 토파즈가 성가시다는 듯 어깨를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사람을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고른 도적 떼에게 애도를 보냈다.

도적 떼가 맨손으로 정리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삼십 초 남짓이었다. 메르디나는 살길을 찾아 도망치는 도적의 뒷덜미를 잡아 기절시켰고, 하란은 토파즈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 기절한 도적들을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마을에 도착하면 경비대에 신고하죠.”

탁, 탁. 가볍게 손을 털던 토파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느낌이 안 좋은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리 험한 산길이라고는 해도 반나절만 더 가면 마을이야. 여기서 도적이 활개를 친다는 건 마을의 치안이 결코 좋지 않다는 뜻이지.”

토파즈는 예전에도 몇 번 시모네에 들른 적이 있었지만 그동안 도적 따위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네 사람은 의아함을 품고 자리를 정리했다. 마침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 * *

레프 산맥을 기준으로 북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시모네는 키올렌만큼이나 작은 마을이었다. 키올렌과 달리 밭농사나 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종종 산맥 너머에서 마수가 출몰하기는 해도 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동쪽에 비하면 제법 조용한 마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토파즈의 불길한 예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마을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경비병과 말씨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골목마다 서넛씩 모여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 중 일부는 토파즈 일행을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경비대에게 도적들에 대해 알리려고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사람들은 모두 초조해 보였고 겁에 질려 있었다.

누군가 토파즈 일행에게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저기, 혹시 영주 성에서 오셨습니까?”

“……?”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경계와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토파즈 일행의 허리춤에 하나씩 매달린 검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일행이 서로 조용히 눈짓만 주고받으며 대답하지 않자, 곧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영주 성에서 나온 기사님들이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남자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일행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여행객이시라면 다른 마을로 가시는 걸 권해드리겠습니다.”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메르디나가 묻자 남자는 주변을 살피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며칠 전 뒷산에 마수가 출몰했습니다. 언제 마을을 습격할지 모릅니다.”

“마수가?”

일행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에릭이라고 소개했다. 마침 작은 식당을 운영한다고 하기에, 일행은 그를 따라갔다.

도착한 식당은 화려한 구석은 조금도 없이 소박했지만 그의 말처럼 작지는 않았다. 네 사람은 바깥이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요리를 가져다준 에릭이 막 말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세 기사가 차례로 고개를 돌렸고, 그보다 조금 늦게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치안대가 돌아왔어!”

그 말 한마디에 에릭이 쟁반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에릭뿐만이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뛰쳐나왔다. 조용한 긴장감을 유지하던 마을의 분위기가 다급하게 들끓었다.

“치안대가 돌아왔다고?”

“모두 무사해?”

마을의 동쪽에서 나타난 것은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 중 셋은 멀쩡히 걸어오고 있었지만 둘은 절뚝거리는 것을 옆 사람이 부축해 주고 있었고, 한 명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늘어져 있었다.

등에 늘어진 사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핏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토파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혈하느라 묶은 바짓단 아래로 비죽 튀어나와 있어야 할 발목이 보이지 않았다. 한쪽 발이 잘린 듯했다.

“세상에, 디마!”

“당장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올게!”

“대장! 좀 나와 봐!”

‘대장’이라는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에릭이 1층에서 달려 나왔다. 에릭은 여섯 명의 젊은이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앞에 멈춰 섰다.

“오, 안나. 정찰만 하고 온다고 했잖니. 디마는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 너는 다친 데 없고?”

“아버지.”

에릭의 딸인 모양이었다. 부녀는 포옹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치안대라니. 설마 치안유지대를 이야기하는 건가.”

아래의 광경을 내려다보던 카르옌이 낮게 읊조렸다. 후드가 바람에 날리며 구겨진 미간이 설핏 보였다.

치안유지대는 주민들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꾸린 집단이었다. 그러나 치안대가 활발히 운영되던 것도 다 옛날이야기였다. 용병 세력이 크게 성장하며 치안대는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평범한 시민들이 무기를 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북부 시골에는 아직도 치안대가 남아 있는 곳이 꽤 있어. 그렇다 해도 보통은 인근 순찰이나 유사시의 예비병 역할을 맡을 뿐인데…… 조금 이상하네.”

하란의 말대로 치안대가 직접 마수를 상대하거나 위험한 일을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몇 대 전의 황제가 법을 손본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25대 황제였던 테오도르는 마수가 출몰하면 해당 지역 영주가 직접 기사를 파견하거나 용병을 고용해 영지를 지키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따르지 않으면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그에 따라 황실에서 내려보내는 예산도 있었다.

그런데 왜 농사를 짓고 빵을 굽는 이들이 무기를 들어야 했단 말인가? 몹시 수상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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