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2)화 (12/110)

#012

카르옌은 다시 비단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반원 형태의 푸른 돌을 꺼냈다. 종이를 누를 때 쓸 것처럼 생긴 문진이었는데,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마도구 같았다.

소리를 통제하는 용도였는지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마자 주변의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아마 그들의 대화 소리도 다른 이들에게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저희는 공간 이동 마도구를 사용해서 북부까지 왔으니, 저희가 며칠 만에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을 겁니다. 눈에 띄게 추적하지도 못할 테고요. 당장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널 쫓는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나 보네.”

“그야 제가 사라지면 가장 큰 이익을 볼 사람이겠죠. 제 형제, 혹은 형제들이요.”

카르옌은 작위 계승 싸움에서 흔한 일이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에게는 형제가 둘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저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아요. 제가 마실 차에 독을 타고 기사들을 매수해 죽이려 한 것도 분명 그들이겠죠.”

“정확히는 독은 아니었어.”

메르디나가 조용히 반박했다. 그러자 카르옌이 턱을 괸 손을 빼내며 우아하게 손짓했다.

“아, 그래. 메르디나 네가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어?”

카르옌이 기절해 있는 동안 밝혀진 내막을 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메르디나라고 했다.

“일단 카르옌이 섭취한 것은 ‘나나아스’라는 식물의 뿌리를 달인 차입니다. 나나아스는 물가에서 자란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정확히 어디에서 채취할 수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환상 속의 식물처럼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 존재합니다.”

“나나아스의 뿌리가 독처럼 작용한다고?”

토파즈도 새파란 꽃을 피운다는 나나아스에 대해서는 풍문으로만 들어보았다. 그러나 독처럼 쓰인다는 이야기도 지금 처음 들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평범한 식물입니다. <식물대백과>에 의하면 오히려 영약처럼 여겨졌다고 하고요. 다만…….”

메르디나는 마도구가 작동되고 있는 것을 재차 확인하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릇이 깨진 마법사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진 바는 아니지만 여러 고문헌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교차 검증해 얻어낸 사실이니, 거짓일 확률은 낮을 겁니다.”

“네 그릇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전에 말했던 병 때문인가?”

“정확히 말하면 병이 아니라 저주랍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누군가가 저에게 저주를 걸었죠.”

어릴 때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동화가 떠올랐다. 악마가 착하고 아름다운 공주를 시기해 저주를 걸었다던 이야기였나. 눈앞의 커다란 놈은 착한지는 모르겠고 공주도 아니겠지만.

“저희의 첫 번째 목표는 그 저주를 푸는 겁니다.”

“생각해 둔 방법은?”

“일단 정석은 저주를 건 사람을 찾는 거겠죠.”

“그게 누군데?”

“아직은 모릅니다.”

예상한 대답이라 김이 빠질 것도 없었다. 지체 높은 가문의 후계자가 저주에 걸렸다. 범인을 안다면 그동안 살려 두었을 리가 없었다. 저주를 푸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저주를 건 마법사를 제거하는 것이었으므로.

“의심 가는 사람이 조금도 없어?”

“너무 많아서 문제랍니다. 제가 저주에 걸린 날은 큰 연회가 있던 날이었거든요. 저택에 아주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죠. 출입 명부에 적힌 이름과 사람들의 기억을 대조해 한 명도 빠짐없이 조사했지만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

“그런데 얼마 전에 새로운 단서를 하나 찾게 된 겁니다. 거의 20년 만에 얻은 귀한 단서이니 제가 독을 마신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카르옌이 생긋 웃었다. 그래서 그 단서가 뭐냐는 듯 응시하자 카르옌은 하란을, 하란은 메르디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메르디나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냈다. 그 종이 위에는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문양이 단서입니다.”

까만 별, 정확히 말하면 중간이 끊어진 별이었다. 뾰족한 모서리가 위를 향하도록 그려진 별은 언뜻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선 하나가 끊겨 있었다.

“독을 탄 범인으로 추정되는 주방 하인의 혓바닥에 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혓바닥?”

“네. 주방 하인이 입에서 피를 흘리자, 당시 옆에 있던 요리사는 그가 혀를 깨물어 자진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강제로 입을 벌렸다고 합니다. 그때 혓바닥에 그려진 이 문양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다가 끊어진 것 같은, 새카만 별 문양을요.”

메르디나가 종이 위로 손을 짚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다시 보려고 하니 순식간에 사라졌다며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요리사는 우리 집안에서 삼십 년 넘게 일했고, 아주 신중한 자야. 정말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면 네게 알리지도 않았을걸.”

카르옌의 단호한 말이 증언의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토파즈가 물었다.

“그 하인의 사인은 밝혀졌나?”

“독극물 중독이었습니다. 독을 입 안에 숨기고 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자결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혓바닥의 문양이 어떤 마법의 흔적이라면 제거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처음부터 제거할 생각이었거나 어떤 조건에 따라 발동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메르디나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이 문양이 카르옌에게 저주를 건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가정하에 뒤를 쫓으려고 합니다. 당장 매달릴 수 있는 단서가 이것뿐이기도 하고요.”

“정보가 나올 구멍부터 찾아야겠네.”

“네. 하지만 당장은 가용할 수 있는 정보 수집 경로가 없어서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가진 건 돈뿐인데, 뭔가 방법이 있을까요?”

카르옌이 재수 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며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토파즈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여관의 간판을 누가 바꿔 달았는지부터 황실 마구간의 말이 몇 마리인지까지, 모르는 게 없는 정보상 하나를 알긴 해.”

“그거 놀라운 수완이네요.”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토파즈는 그 정보상을 만나면 높은 확률로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아직 본거지를 옮기지 않았다면 넨베르그 시(市)에 있을 거야. 다행히도 까마득히 멀지는 않네.”

넨베르그는 북부와 동부를 잇는 거점 도시였다. 그렇게 일행의 첫 번째 목적지가 결정되었다.

여관을 나서기 직전, 토파즈는 카르옌이 테이블 위에 동전을 올려두는 것을 목격했다. 휘황한 광채를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1골드짜리 금화였다. 이 여관 메뉴판에 적힌 요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켜도 꺼낼 일이 없는 금액이었다.

“뭐 하는 거야?”

“아. 이 집 게살수프의 맛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요.”

“…….”

할 말을 잃을 정도로 특이한 취향이었다. 토파즈는 가진 건 돈뿐이라는 말로 겸양을 떨던 도련님을 단속하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여관을 나서며 주인에게 게살수프는 당장 메뉴에서 빼 버리라고 마지막 조언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북부에서 동부까지 길게 이어지는 레프 산맥은 험준한 곳이었다. 키올렌에서 넨베르그까지 가려면 그 산맥을 따라 마차를 타고도 열흘 가까이 가야 했다. 키올렌에서 다음 마을로 빠져나가는 데만 꼬박 이틀이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차라리 걸어서 가지.”

토파즈가 제안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키올렌에서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가려면 경사가 낮은 곳으로 난 길을 빙빙 돌아서 가야 했다. 돈과 시간을 모두 낭비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두 발로 걸어 산을 헤치면 산맥 서쪽 아랫마을인 시모네까지 하룻밤이면 닿을 수 있었다. 지름길을 이용하여 오히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이었다.

토파즈는 이미 그런 식으로 시모네와 그 근방의 마을들을 오간 적이 종종 있었다. 문제점이 있다면 그 하룻밤은 야영을 해야 하며, 일행 중 걱정되는 인물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당사자는 “재밌겠네요.” 같은 태평한 소리를 하며 도보 이동을 찬성해 왔다.

토파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카르옌이 숲속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 못 걷고 힘들다고 비실거릴 줄 알았는데 곧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렌로샤 숲에서 빠져나올 때도 느꼈지만, 마법사치고는 체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업고 갈 일은 없을 듯하니 다행이었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마음먹으면 지금부터 달려서 밤이 저물기 전에 시모네에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토파즈 혼자였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야영 준비를 해야겠어.”

“네.”

나무가 빽빽한 산이라 야영할 곳을 찾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일행은 그나마 평평한 땅을 찾아 나섰다. 대충 나무나 바위에 기대어 쪽잠을 자도 그만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저 허약한 마법사가 꽁꽁 얼어붙어 다음 날 얼음 동상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머지 두 기사는 제법 쓸 만해 곧 야영할 만한 땅을 찾아냈다. 하란은 검집을 삽처럼 들고 돌과 나뭇가지를 골라내며 땅을 다졌다. 그리고 키올렌에서 사 온 마법 천막을 꺼냈다.

메르디나가 지지대를 세우고 순서에 맞게 천을 걸었다. 마법 천막은 천을 펼치기만 하면 ‘보온’ 마법으로 내부 온도 조절이 되어 최근 모험가들에게 인기였다.

센 바람이 불면 쓰러질 수도 있고 바닥은 맨바닥과 다름없이 딱딱했지만 적어도 입이 돌아갈 염려는 없다는 소리였다.

카르옌은 그 모습을 태평히 구경하며 말을 얹었다.

“바닥에 푹신한 솜을 넣고 ‘축소’와 ‘경량’ 마법을 걸어서 휴대할 수 있게 만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이왕이면 ‘방어’도 추가하고.”

‘보온’에 ‘축소’도 모자라 ‘경량’과 ‘방어’라니. 그런 호화스러운 마도구를 살 돈이 있는 사람이 길바닥에서 야영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물론, 지금 토파즈의 눈앞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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