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11)화 (11/110)

#011

그렌로샤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키올렌은 광산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 의해 생겨난 마을이었다. 북해와 가까운 이곳에는 오랫동안 사람 사는 마을이 없었지만, 레프 산맥 근처에서 마석이 잇따라 채굴되면서 최북단까지 광산 개발이 시작되었다.

본래 무기를 만들 때나 섞어 쓰던 마석은 마도구의 보급화가 이루어진 이후 수요가 몇 배로 치솟았다. 마석을 캐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자본가와 광부들이 그렌로샤 숲 바로 아래까지 모여들었고 그 결과 키올렌이라는 작은 마을이 생겼다.

험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짐마차와 순록 썰매가 오갈 수 있는 길이 닦이고, 여관이며 상점 따위가 들어선 이유도 모두 수요가 끊이지 않는 마석 거래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군요.”

메르디나가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낮고 소박한 건물들뿐이었지만 거리는 제법 활기찼다. 가판대에 과일이나 약초를 내놓고 파는 상인들부터 ‘조식 무료’ 따위의 팻말을 들고 호객하는 여관의 일꾼도 있었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키올렌이 더 큰 도시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마수의 출몰과 더불어 일 년의 절반은 눈이 쌓여 고립되다시피 하는 기후 탓이었다. 혹한의 추위가 밀려오는 겨울에는 북쪽까지 오는 외부인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온화한 계절이었다. 상인과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 제국의 최북단을 관광하러 온 여행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일행 중 셋이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눈에 띄지 않으니 잘된 일이었다.

“토파즈님,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눈가가 겨우 보일 정도로 후드를 푹 눌러쓴 카르옌이 물었다. 꼬박 하룻밤을 걸어 숲을 통과한 탓에 여기저기 꼬질꼬질한 것이 딱 여행자처럼 보이는 행색이었다. 그나마도 토파즈가 있어 길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과정이었다.

토파즈는 대답 대신 어느 크림색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이 마을 가게들의 절반이 그렇듯 간판에 순록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삼 층짜리 여관이었다.

간판에는 ‘친절한 순록 여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본래는 상호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그렇게 불러대는 탓에 간판까지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토파즈는 익숙하게 여관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란과 메르디나, 카르옌은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보고 고심하더니 각각 요리를 주문했다.

“토파즈! 오랜만이네.”

요리를 내온 중년 여성은 이 여관의 주인이었다. 여관 주인이 알은체를 해 오자 토파즈도 한결 부드러운 낯으로 인사를 받았다.

“네. 잘 있었어요?”

“오늘은 웬일로 혼자도 아니고.”

그 말에는 어깨만 으쓱였다. 토파즈의 성격을 익히 아는 주인은 더 캐묻지 않고 요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장기 의뢰를 받아서 북쪽을 떠나게 됐어요. 앞으로는 잘 못 올 거예요.”

주인의 눈이 커졌다. 눈동자에 잠시 복잡한 빛이 서렸지만 그는 이내 웃어 보였다.

“그래? 시원섭섭하네.”

“섭섭은 알겠는데 시원은 뭐예요.”

“멀쩡한 젊은이가 우중충한 낯으로 드나드는 꼴 안 봐도 되니, 내 속이 시원하지.”

토파즈가 피식 웃었다.

“고마웠어요.”

“다치지 말고. 나중에 이 근방에 들를 일 있으면 또 와. 빈털터리로 와도 수프 한 그릇은 대접해 줄 테니.”

“어련하실까. 그러다 가게 망해요.”

여관 주인은 토파즈와 몇 마디 더 나누다가 그를 찾는 목소리에 자리를 떠났다. “맛있게 드세요.” 하고 일행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맙소.”

메르디나가 짧게 인사하며 제 몫으로 시킨 동그란 파이를 칼로 잘랐다. 호밀 가루로 만든 파이 반죽 안에 잘게 다진 고기와 채소가 들어 있었다. 하란이 흥미를 보이며 자신의 꼬치와 하나 바꿔 먹자고 제안했다.

반면 카르옌은 자신이 시킨 수프 그릇에 별반 관심을 주지 않고 테이블 위에 한쪽 팔을 괴었다. 식사 예절을 깐깐히 지킬 것처럼 생겨 놓고 가만 보면 가장 방만했다.

“여관 주인과 잘 아는 사이신가 봅니다.”

“그냥 적당히.”

“적당히요?”

가까이에 있어 후드 안쪽으로 카르옌의 눈이 보였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내리자 반듯한 콧대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날 도와줬었어.”

“소문만큼 마음씨가 좋은 이인가 봅니다.”

“소문?”

“아까 길거리에서 들었습니다. 남루한 행색의 아이들이 ‘친절한 순록 여관’에 가서 식사를 청해 볼까 고민하던걸요. 지금 저기에 있네요.”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배를 곯은 티가 역력한 소년과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손에 쥔 파이를 먹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좀 먹으라고 타박하면서도 방금 주방에서 나온 새 요리를 그들의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여관의 손님들은 그 광경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카르옌의 말처럼, 익히 소문이 날 정도로 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토파즈도 여관 주인에게 빚을 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기 전에 일부러 들른 것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카르옌은 본인 앞의 묽은 게살수프를 한 입 떠먹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북부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해산물 요리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는데 메뉴에 있다는 게 독특했다.

“제가 생각한 수프랑은 조금 다르네요.”

몇 입 떠먹고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니 입맛에 안 맞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입이 짧고 까다로우니 픽픽 쓰러지는 거지. 토파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가 제 아들도 아니니 굳이 잔소리하지 않고 식사에 전념했다.

“토파즈님이 시킨 음식은 무슨 요리인가요?”

게살수프를 먹을 때는 떨떠름한 얼굴이더니, 배는 고픈지 토파즈의 요리에 호기심을 보였다. 토파즈는 제가 먹던 양고기구이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고 대신 게살수프를 가져와 스푼을 담갔다. 카르옌은 어쩐지 만류하는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드시려고요?”

토파즈는 대답 대신 게살수프를 한입 먹었다가, 카르옌을 향한 입맛 까다로운 도련님이라는 평가를 수정했다.

게살수프, 아니. 수프라고 불러 주고 싶지도 않은 요리에서는 맹물에 게를 껍데기째로 담갔다가 30초쯤 후에 뺀 맛이 났다. 한 마디로 밍밍하고 비렸다.

애초에 훌륭한 음식 맛으로 유명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돈 받고 팔아도 될 만한 수준이었는데, 이 게살수프는 토파즈가 먹어 본 메뉴 가운데 최악이었다.

이딴 수프를 세 번이나 떠먹다니 의외로 제법 관대한 미각이었다. 토파즈는 카르옌을 재평가하면서도 기계적으로 수프 그릇을 비웠다.

“맛이 괜찮은가요?”

토파즈가 무심한 얼굴로 수프를 떠먹으니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수프 그릇에 스푼을 담갔다. 자기가 느낀 맛이 착각이었는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선택이었다.

“토파즈님은 묽은, 음……. 맑은 맛을 선호하시나 봐요.”

눈가를 찡그리면서 애써 칭찬할 거리를 찾는 얼굴이 보였다. 토파즈가 스푼을 탁 내려놓았다.

“아니. 이건 맑은 게 아니라 쓰레기 같은 맛인데.”

냉정한 평가에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깨끗하게 빈 수프 그릇과 태연한 낯을 번갈아 보더니 자신이 몇 입 뜯어 먹던 양고기구이를 다시 슬쩍 밀어주었다.

“너나 먹어.”

“같이 먹어요.”

“…….”

한동안 스푼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테이블을 울렸다. 정확히 말하면 이따금 소리를 내는 것은 토파즈뿐으로, 나머지 셋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이럴 때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들의 출신을 짐작하게 된다. 토파즈는 더 깊은 곳으로 흐르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차단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 너희 계획은 뭐야?”

“아. 그전에 이것부터 봐 주시겠어요?”

카르옌이 품속에 늘 넣고 다니는 붉은 비단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보기 드문 순백색 종이였다. 그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는 종이를 토파즈에게 내밀었다.

“뭐야?”

“계약서예요. 한번 살펴보시고, 토파즈님이 원하시는 조건은 뭐든 추가해도 됩니다.”

토파즈는 눈으로 종이를 훑었다. 대충 용병 토파즈는 카르옌과 그 외 두 사람을 수도 카샤프까지 호위해 주고 대가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종이의 왼쪽 아래에는 카르옌의 것으로 보이는 유려한 서명이 이미 쓰여 있었다.

문제는 가장 아래쪽에 적혀 있는 ‘일당으로 1 골드를 지급한다.’라는 문장이었다.

“일단 선금으로 석 달 치를 지급해 드릴게요. 골드나 그에 상응하는 보석 또는 마석으로 드릴 수도 있고, 원하신다면 어음을 써 드릴 수도 있으니 토파즈님께서 편하신 대로…….”

“일당 1골드?”

토파즈가 딱딱하게 되묻자 말을 잇던 카르옌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 아무래도 액수가 만족스럽지 못하시겠죠……. 저도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제가 현재 융통할 수 있는 현금에 한계가 있어서, 수도에 무사히 도착만 한다면 마땅한 대가를 몇 배로 지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조금만 너그럽게 기다려 주신다면요.”

토파즈는 카르옌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일당이 1골드면 한 달에 30골드라는 소리였다. 30골드면 수도에서는 무리겠지만 북부에서는 집 두 채를 지을 돈이었다. 고작 한 달에 말이다.

토파즈가 용병으로 활동하던 전성기 시절에도 못 받아 본 액수였다. 용병 하나를 고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라는 뜻이었다.

말릴 생각 없느냐는 뜻으로 세 사람 중 가장 멀쩡해 보이는 메르디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토파즈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오히려 몰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하란이었다. 설마 수도 귀족들의 금전 감각은 다 이 모양이란 말인가?

“도련님, 제정신이야?”

카르옌이 눈을 깜빡거렸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시키려고. 매일매일 목숨의 위협이라도 겪을 예정인가?”

“음, 꽤 비슷하네요. 그렇지?”

카르옌이 무구해 보이는 낯으로 동의를 구했다. 하란과 메르디나가 과장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계약을 무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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