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모닥불이 작게 타올랐다. 토파즈는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 넓은 대접에 와인을 부어 마시고 있었다.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인의 주인인 카르옌은 오히려 입에 맞느냐고 물으며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어 주고 있었다.
지난밤 습격 이후, 그렌로샤 숲은 그 악명이 무색할 정도로 조용했다. 덕분에 한밤중에 마당에서 불을 피우며 술을 마시는 짓도 거리낌 없이 시도할 수 있었다. 이미 빈 와인 병이 몇 병이나 풀밭을 굴러다녔다.
“토파즈님, 취하지도 않는데 술은 왜 드시는 건가요?”
“누가 와인을 마시고 취해.”
“사람들은 보통 와인을 마시면 취한답니다.”
카르옌이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키득거렸다. 한 잔을 들고 내내 홀짝거리고 있었으면서 뺨이 벌써 발그레했다. 환자는 적당히 마시라고 잔소리할 셈이었는데 저 정도면 굳이 말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카르옌은 한 잔을 겨우 비우더니 그릇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는 양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턱을 기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토파즈를 바라보았다.
“토파즈님.”
“왜.”
“토파즈님…….”
“…….”
“이제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네요.”
그랬다. 애초에 일주일만 머무르도록 허락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대꾸하지 않자 카르옌이 고개를 무릎 사이로 떨구었다. 그러나 곧 다시 고개를 번쩍 들더니 묻는 말이 황당했다.
“저 데리고 살면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요?”
좋기는, 헛소리였다. 식탁 위에 놓인 꽃다발 대신으로나 쓸모 있을까. 애초에…….
“이런 곳에서 살아 봤자 뭐가 좋다고.”
“바깥사람들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숲도 꽤 좋습니다. 토파즈님이 계셔서 그럴까요.”
헛웃음이 나왔다. 외딴섬 같은 곳에서 살아봐야 좋은 기간은 일주일이 고작이다. 제 손으로 옷 갈아입는 것도 낯설어 보이는 도련님이 살기에는 더더욱.
“취했으면 잠이나 자.”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토파즈님은 이 오두막에서 평생 살고 싶으세요?”
“글쎄.”
어떻게 살고 싶다느니, 그런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아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혼자는 외로울 것 같아요.”
카르옌이 작게 중얼거렸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아침 이슬이 풀잎에 내려앉아 옷에 스몄다. 밤새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하란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바람개비나 돌리고 있었다. 호기심을 보인 흰 여우가 다가오면 살살 꼬여내 쫑긋 솟은 두 귀 사이를 쓰다듬기도 했다.
카르옌은 잠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모를 만큼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토파즈가 그를 짊어져 오두막 안에 던져 놓아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검은 어떤 분께 배우셨습니까?”
모닥불 건너편에 조용히 앉아 있던 메르디나가 말을 걸어 왔다. 토파즈는 질문의 의도를 가늠하다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용병이었어.”
“꽤 이름 높은 용병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랬지.”
토파즈는 벌써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더듬다가 덧붙였다.
“지금은 죽었지만.”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메르디나가 사과하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잿빛에 가까운 어두운 금발이 턱 끝에서 흔들렸다.
“됐어. 원하는 모습대로 살다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었으니까. 아마 삶에 미련 따위는 조금도 없을걸.”
미련이야 원래 늘 남은 자들의 몫 아니겠냐고 토파즈는 생각했다.
“제 짧은 짐작이지만 보통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랬지.”
제 지갑을 털려고 했던 소매치기에게 검을 알려 주었으니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었음은 틀림없었다.
대답을 들은 메르디나가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불씨가 작게 날렸다.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토파즈가 나무 그릇을 기울였다.
“이 숲에서 머무른 지는 몇 년이나 되셨습니까?”
그러나 뜻밖에도 질문은 이어졌다. 토파즈는 그릇을 기울이던 손을 멈추었다. 붉은 와인은 아랫입술만 살짝 적시고 물러났다.
고개를 들어 모닥불 너머를 살피자 차분한 청회색 눈동자가 토파즈를 주시하고 있었다. 토파즈는 손끝으로 나무 그릇의 거친 표면을 더듬으며 짧게 답했다.
“꽤 됐어. 3, 4년쯤.”
3, 4년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메르디나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게 왜 궁금하냐고 되물으려던 찰나였다.
“토파즈님은 왜 이 숲에서 혼자 머물고 계신가요? 밑에 마을도 있고, 다른 곳으로도 충분히 떠나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 질문을 한 사람은 메르디나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잠에서 깼는지 카르옌이 눈을 또렷하게 뜨고 있었다. 술기운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멀찍이서 여우와 노닥거리던 하란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일행이 숲에 들이닥친 이후, 가장 궁금해하리라 생각했으나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해 줄 만한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떠날 이유가 없어서.”
“숲에 스스로를 가두는 건, 토파즈님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 같습니다.”
“꼭 나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네.”
토파즈는 카르옌이 습관처럼 웃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더 알아가고 싶은데요.”
“내가 죄인이라서 숨어 사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런 분 아니라는 거 압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지?”
토파즈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 냉소를 마주하면서도 카르옌은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이상한 마법사. 토파즈는 또 한 번 생각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낯선 이들을 집에 들이고, 치료해 주고, 밥까지 주시는 분이죠.”
“밥 줬으니까 착한 사람이다? 단순하네. 그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뒤통수 맞아.”
“경험담인가요?”
“……그래.”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등을 맡길 만큼 믿었으나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천운으로 살아났고, 정신을 차려 보니 키올렌까지 흘러 들어와 있었다.
살아남았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생 용병 짓을 하며 떠돈 토파즈는 가족도 돌아갈 집도 없었다. 이 숲을 떠날 이유마저도.
사는 내내 그가 원한 것은 자유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권리. 자유를 좇기 위해 용병마저 그만두었으나 그 끝은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겹고 허망했던 그는 숨어들어 고립되기를 택했다. 이대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이유가 필요하다면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웅크려 앉아 있던 카르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슬을 머금은 풀잎이 그의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키올렌에 내려가서 가끔 용병 의뢰를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토파즈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저희는 긴 여정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제 병을 고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입니다.”
“…….”
“아주 위험한 여정이지만, 토파즈님처럼 강한 분이 곁에 있어 준다면 안심이 될 것 같은데…….”
카르옌이 토파즈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췄을 뿐이지만 꼭 기사가 맹세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둘 중에 굳이 따지자면 기사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인데도.
“토파즈님, 저를 지켜주세요.”
카르옌이 손을 내밀었다. 희고 고운 손이었다.
“이 숲에서 나가 저와 함께 떠나 주세요. 제가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토파즈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 남자는 마치 오래된 소망이라도 고백하듯 눈꺼풀을 떨고 있었다. 정말 간절하기라도 한 것처럼.
숲 밖에는 이미 동이 텄는지 높게 뻗은 나무 사이로 햇살이 찬찬히 비집고 들어왔다.
이 일행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지난 몇 년간 누구도 침범하지 않은 땅으로 들이닥치더니 토파즈의 일상을 헤집었다.
이 손을 거절하면 토파즈는 일주일 전 그랬고 일 년 전에도 그랬듯 그만의 작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정말 평화였을까?
영원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숲을 한 바퀴 휘돌고 온 바람이 토파즈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붉고 긴 머리칼이 어깨에 닿아 흔들렸다.
문득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몸 안에서 움텄다.
토파즈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검을 뽑았다. 하란과 메르디나가 반사적으로 검집에 손을 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척에서 검을 뽑는데도 카르옌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토파즈가 손목을 꺾었다. 검날이 자신의 목덜미 쪽을 향했다. 그제야 카르옌이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막을 새도 없이 서걱, 소리가 났다.
하나로 묶인 붉은 머리칼이 귀 언저리에서 싹둑 잘렸다. 이 숲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잘려 나갔다. 어깨가 가벼웠다.
세 쌍의 눈동자가 똑같이 커져 있었다. 두 기사는 검을 뽑으려다 말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카르옌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아진 머리카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놀란 얼굴이 똑같은 걸 보니 친구가 맞긴 한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봐?”
“머리칼을 그렇게 볏짚 베듯이 자르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볏짚 베는 걸 본 적은 있고?”
“…….”
할 말이 없는지 눈썹만 까딱거린다. 볏짚은커녕 풀 베는 것도 본 적 없을 도련님이다.
“너, 돈 많지?”
“네?”
“의뢰를 맡기려면 보수를 줘야 할 것 아니야. 내 보수가 적은 편은 아닌데, 감당할 수 있겠어?”
“……!”
카르옌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원하시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얼마를 부를 줄 알고 겁도 없이.”
호구 잡기 딱 좋은 발언에 혀를 차자 카르옌이 입꼬리를 당겼다. 보기 좋은 미소였지만 분명 가소롭다는 얼굴이었다.
“토파즈님이야말로…… 제가 얼마를 드릴 수 있는 줄 아시고요.”
“너 혹시 엄청나게 나쁜 놈이야?”
돈 많은 놈은 대부분 나쁜 놈이더라는 경험적 근거를 떠올리며 묻자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당히 나쁜 놈이죠. 그래도 돈 떼먹은 적은 없답니다.”
솔직한 대답에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람 소리와 닮은 웃음에 세 쌍의 시선이 다시 한번 모여들었다.
“그거 다행이네.”
토파즈는 진심으로 대꾸하며 손으로 머리를 대강 털어냈다. 붉은 머리카락이 실처럼 흩날렸다.
어쩌면 잘못된 결정을 반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작 일주일 남짓 본 인간들에 대해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신의로 가득해 보이는 저들도 언젠가는 서로의 등에 칼을 꽂으려 달려들 수도 있고, 토파즈의 끝은 또 한 번 피와 배신으로 얼룩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도망자 네 사람이 하필 이 저주받은 숲에서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토파즈는 이 알 수 없는 운명에 잠시 몸을 맡겨 보기로 했다.
긴 여정의 초라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