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카르옌은 검 부딪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커튼 없는 작은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의 셋째 자식으로 태어난 이래 늘 암살 위협에 시달려 온 카르옌은 잠귀가 무척 예민했다. 작은 기척에도 쉽게 깨어났고 깊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낯설고 딱딱한 침대에서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몸이 안 좋은 탓도 있겠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카르옌은 살면서 몸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적어도 한 살 생일 이후로는.
카르옌은 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마력을 순환시켜 보았다. 그릇에 충만하게 차올라야 할 마나가 통제 밖으로 줄줄 새어 나갔다. 금이 간 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다행히도 카르옌은 금 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새어 나가는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압도적인 양의 물을 붓는 것이었다. 무식할 만큼 효율이 나쁜 행위였으나 카르옌은 익숙하게 답답함을 억눌렀다.
오두막 밖으로 나가자 예상대로 마당 한쪽에서 누군가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토파즈와 메르디나였다. 며칠 전 메르디나가 먼저 청해 시작된 가벼운 대련은 요즘 아침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하란은 이미 검을 맞댄 뒤인지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뺨에는 실선 같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하란, 네가 상처 입은 모습은 꽤 오랜만에 보네.”
카르옌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대련을 지켜보던 하란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라도 그가 변덕을 부린다면 우리가 이 숲을 살아서 나갈 가능성이 몇이나 될까?”
“단언컨대 없지. 난 전력이 되지 못할 테니까.”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 몸은 좀 어때?”
어제 오후, 카르옌이 토파즈의 등에 업혀 돌아왔을 때 하란과 메르디나는 검을 뽑아야 할지 부축을 도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토파즈는 두 사람이 나설 새도 없이 침대에 카르옌을 던져두었다.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업고 돌아왔다고?”
“짐짝처럼 말이지.”
“그 순간을 놓쳤다니 무척 아쉽네.”
“지금 그게 문제야?”
카르옌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상하긴 해. 분명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나도 내 몸을 알 수가 없군.”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검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메르디나의 검이 저만치 날아가 땅에 박혔다. 메르디나는 곧바로 상반신을 뒤로 젖혀 연이어 목을 노리고 들어온 검을 피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을 잃었으니 명백한 패배였다. 메르디나가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지금 다시 겨룬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거야.”
토파즈의 어조는 건조하게 들릴 만큼 덤덤했다. 상대를 업신여기려는 의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반박하기 힘들었다.
제국의 인재들만 모여든다는 황립 아카데미 검술부를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메르디나였다. 그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정예 검사’였으며 실전 경험도 적지 않았다.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는 그와 견줄 수 있는 이가 몇 없었다.
그러나 토파즈와 검을 맞댄 후 메르디나는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에 갇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토록 호승심을 일깨우는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다들 배 안 고파요? 이제 그만하고 식사하죠.”
카르옌이 가볍게 손뼉을 부딪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평소라면 칼잡이들이란, 하며 대놓고 한심한 눈길을 던졌을 텐데 오늘은 그저 느긋한 말투로 식사를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내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메르디나는 호승심을 불태울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아는 기사였다. 그가 첫째로 두어야 할 것은 자존심도 실력 향상도 아닌 주군의 명령이었다. 메르디나는 검을 주워 갈무리하고 토파즈에게 예를 표했다. 토파즈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점심 식사는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세 검사와 마법사 하나가 즉석에서 통나무를 깎아 만들어 낸 간이 탁자가 마당에 놓였다.
오두막 뒤쪽 창고에서 반쯤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한 감자와 당근, 아침에 메르디나가 잡아 온 토끼 고기는 하란의 손을 거쳐 훌륭한 스튜로 탄생했다.
“더 드릴까요?”
“응.”
하란의 요리 실력을 알게 된 이후 그에게 아주 조금 더 친절해진 토파즈였다. 카르옌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토파즈를 경계하며 예민한 참새처럼 굴던 하란도 요즘은 먼저 스튜를 한 국자 떠서 건네줄 만큼 물러졌다.
토파즈가 속으로 참새 생각을 한 것을 알았는지, 근처를 맴돌던 작은 새가 메르디나의 어깨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날개깃에 노란색이 섞인 새는 오목눈이처럼 작고 귀여웠다. 머리에도 노란 물감을 똑 떨어뜨린 것처럼 동그란 털이 한 줌 나 있었다.
“이런 곳에도 작은 새가 사네요.”
하란이 신기해하며 팔을 뻗자 새가 가볍게 날아 건너왔다. 새는 하란의 팔이 나뭇가지라도 되는 것처럼 총총거리며 뛰어다녔다.
비슷한 새가 카르옌의 머리 위에서도 빙빙 돌고 있었다. 카르옌이 하란을 따라 팔을 내밀었으나 새는 푸드덕 날갯짓 소리를 내며 다급히 멀어질 뿐이었다.
“성격 나쁜 사람한테는 안 가나 본데.”
“너무하네, 하란.”
카르옌이 상심한 척 어깨를 늘어뜨렸다. 토파즈가 무심히 말했다.
“성격이라면 걔들이 더 안 좋을 텐데.”
“네? 이렇게 귀여운데……. 악!”
손가락을 뻗어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하란이 소리를 질렀다. 새가 작은 부리를 벌려 장난치듯 검지를 집어삼켰는데 손가락이 끊어질 만큼 아팠다.
토파즈가 혀를 차며 새의 머리를 콱 움켜쥐고 하란에게서 떼어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가 흉포한 소리를 내며 푸드덕거렸다.
“이런. 괜찮아, 하란? 피가 나네.”
카르옌은 퍽 다정히 물었으나 하란의 미간 사이 주름이 더 깊게 파이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무슨 새한테 이빨이 있습니까?”
하란의 손가락에는 부리 자국이 아니라 선명한 이빨 자국이 두 개 남아 있었다. 뱀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자국이었다.
“겉모습에 속으면 곤란해.”
마수와 돌연변이 짐승이 가득한 이 숲에서 이빨 달린 조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토파즈는 아무리 작고 무해해 보이는 동물이라도 함부로 만지려 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손가락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먹이로 내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혈을 해 주겠다며 하란의 손가락을 꽉 붙든 카르옌을 힐끔 살피며 덧붙였다.
“네게 새가 안 간 건 마력이 너무 강해서일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나도 자연의 일부이니 조그만 새에게는 거대한 파도를 만난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에 카르옌이 눈을 크게 떴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반쯤은 달래는 것처럼 들린 탓이었다. 카르옌은 하란의 손가락에서 관심을 끄고 몸을 돌렸다.
“그럴까요?”
화사하게 웃어 오는 얼굴이 아까의 상심 따위는 금세 잊은 듯했다. 토파즈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하란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붙들며 속으로 외쳤다.
겉모습에 속고 있는 쪽은 당신입니다…….
* * *
“너희는 수도에서 왔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토파즈님도 수도 출신이신가요?”
하란의 질문에 토파즈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란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억양에서 느껴져서요. 저는 서부 출신이라 미묘한 차이점을 잘 느끼는 편입니다.”
“맞아.”
토파즈도 황궁이 있는 제국의 수도, 카샤프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태어났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기억이 어렴풋이 있을 때부터 그는 부모가 없었으며, 수도의 빈민가 중에서도 가장 빈곤한 자들만 모여드는 거리에서 뒹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용병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면서도 열여덟 살 때까지는 수도에 터전을 잡고 있었다. 그가 속한 용병 길드가 다른 도시에 뿌리를 내린 뒤부터는 수도에 굳이 들를 일이 없게 되었지만.
“요즘 수도는 어때.”
“늘 그렇듯 새로운 유행이 찾아왔다가 물러가고, 보이는 곳은 언제나 활기차죠. 가장 빠르게 변하는 곳은 역시 번화가일까요? 최근에는 루소 공화국식 요리가 활발히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밤을 달게 졸인 간식과 얇게 구운 밀반죽에 채소를 싸 먹는 간편한 식사가 시장에서 유행입니다.”
루소 공화국은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나라였다.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황제도 왕도 없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정세가 안정되며 식문화가 급격히 발달했다고 하던가.
“지난겨울에는 매운맛 향신료를 가득 넣은 육수에 밀가루 면을 삶아 먹는 북방식 요리가 유행이었죠. 요즘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새로운 가게가 여럿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토파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혀가 아플 정도로 아린 맛이 나는 국수 요리 말인가?”
“네. 혹시 드셔 보셨습니까?”
“예전에.”
그런 음식이 유행하다니 세상이 말세였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여전히 연극이 성황이라 카르멘 거리에는 시간마다 마차가 몰려들고, 매일 정각에는 대신전의 종탑이 횟수대로 울리죠.”
“시끄럽겠네.”
“네. 아주 시끄럽습니다.”
카르옌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말소리가 꼭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올리브 1번가의 제과점 골목에서는 여전히 고소한 빵 냄새가 나지요. 수도에서 가장 이름 높은 대장장이, 페루만은 일흔 살이 넘었지만 아직도 매일 망치를 두드린답니다. 더 궁금한 곳 없으세요?”
‘요즘 수도는 어떠냐’는 모호한 질문이었는데도 카르옌은 마치 눈앞에 지도가 있는 것처럼 구석구석을 묘사했다. 덕분에 토파즈는 직접 수도의 거리를 거닐던 때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수도를 떠나온 지가 벌써 수년이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인지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토파즈는 스스로 놀랐다. 뭔가가 그립다고 느낀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아.”
나지막한 탄성을 토해 낸 카르옌이 품 안에서 붉은색 비단으로 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먹만 한 주머니는 무언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얇았는데, 카르옌은 그 안에서 한참이나 손을 휘저었다.
안을 뒤적거리던 그가 무언가를 쑥 꺼냈다. 동그란 형태의 나무 조각이었다. 겉면은 유약을 바른 듯 매끈했다. 앞면에는 길고 얇은 쇠붙이가 열 개 넘게 나란히 붙어 있었으며 뒷면에는 작은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라멜로폰이라는 악기입니다. 아스펠 군도의 전통 악기인데 현대식으로 작게 개량되었어요. 귀족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다가 보급화된 지 얼마 안 되었답니다. 양손으로 쥐어 보세요.”
카르옌은 어떤 쇠를 누르고 어떤 바람구멍을 막느냐에 따라 소리가 다르게 난다며 악기를 토파즈의 손에 쥐여 주었다. 토파즈는 고개를 내저으며 도로 내밀었다.
“악기 연주 같은 건 할 줄 몰라.”
“연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쇠붙이를 튕기듯 눌러 보세요. 소리가 좋아요.”
“…….”
토파즈는 망설이다가 그의 말대로 손끝을 튕겼다. 쇠붙이가 진동하며 맑은 소리가 났다. 살면서 악기라고는 쥐어 본 적도 없는 손에서 이런 소리를 내다니, 신통한 악기임은 틀림없었다.
“신기하네.”
“그렇죠?”
카르옌은 토파즈가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더니 신이 나서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주머니 안에서는 대체 왜 들고 다녔는지 모를 물건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돌아가는 마법 바람개비, 시나몬 가루가 잔뜩 묻은 마름모꼴 사탕, 종이에 감싸인 초콜릿, 심지어는 작은 피리와 새 모이가 담긴 통까지 있었다.
“편리하네. 그 가방은 아공간 주머니인가?”
“네. 능력이 변변치 않아서 많이 들고 다니지는 못합니다.”
토파즈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혹시 술도 있어?”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회심에 찬 표정으로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이내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척 봐도 비싸 보이는 900년대 산 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