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8)화 (8/110)

#008

“꽃은 이 정도면 될까요? 너무 초라한가요?”

아니, 지나치게 화려한데. 토파즈는 무심코 대꾸할 뻔했다. 화려한 것은 꽃이 아니라 그 꽃을 한 아름 들고 있는 카르옌의 모습이었다. 아마 귀족이나 마법사가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년이었어도 금세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토파즈님, 함께 꽃을 꺾으러 다녀오지 않으실래요?’

‘…….’

이른 아침 식사를 하던 카르옌은 며칠 전 꺾어 온 꽃이 시든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카르옌의 손목에 자리 잡은 시퍼런 멍과 그 탓에 뺨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기사들의 시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정체 모를 일행이 숲에 쳐들어온 것도 오늘로 엿새째였다.

일주일만 더 머무르게 해 달라는 부탁을 기준으로 해도 사흘째. 그 사이 카르옌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독초로 가득한 숲에서 식탁 위에 장식할 꽃을 찾아다니는 미친 짓도 오늘이 마지막일 터였다. 꽃은 며칠 뒤면 시들겠지만 그때는 꽃을 갈아 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이쪽으로 가면 뭐가 있나요?”

소원대로 꽃을 잔뜩 꺾은 카르옌은 오두막으로 얌전히 돌아가는 대신, 그동안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은 방향을 향해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쪽은 절벽이야.”

“아, 그럼 바다가 있겠네요?”

카르옌의 눈이 반짝였다. 불길했다.

“한번 가 봐도 되나요?”

왜 저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내륙 지역인 수도에 사는 놈들은 바다라면 사족을 못 썼다.

“바다 본 적 없어?”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친척이 바닷가 도시에 살거든요. 북해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요.”

그야 북해를 보고 사는 건 대부분 군인이니까. 토파즈는 들뜬 목소리로 당연한 소리를 해대는 수도 촌놈을 측은히 여겨 앞장서 주었다.

카르옌은 한쪽 팔로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토파즈의 옷깃을 슬쩍 잡으며 바짝 뒤따라왔다. 커다란 놈이 애처럼 구는데도 밉지 않은 건 역시 얼굴 탓인가. 토파즈는 푸른 눈동자가 절반쯤 가려지도록 눈웃음치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은 풀숲을 헤치며 걸었다. 수풀 사이사이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것들은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숨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힘의 우위를 살피는 본능 때문이었다. 카르옌도 수상한 기척을 영 눈치 못 채지는 않았을 텐데 나들이라도 나온 듯 태평했다.

북쪽으로 쭉 걷다 보면 빽빽하던 나무가 점차 줄어들고 시야가 탁 트이는 곳이 나타났다. 그 너머에 바다가 있었다.

“아름답네요.”

카르옌이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절벽 아래로 펼쳐진 쪽빛 바다는 아름다웠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질 정도로 짙고 푸른 빛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래전, 사람들은 북해 너머에 마수가 사는 땅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그 너머에 다른 대륙이 없음이 밝혀졌지만 북쪽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를 마수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매해 북해에서 밀려오는 마수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북방 지역은 늘 전장이었다.

그리고 그렌로샤 숲은 북동쪽 바다와 그 아래 도시들 사이에 길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숲을 두려워하지만 토파즈는 이곳이 일종의 완충지대 같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바다에 우글거리는 마수들은 숲에 머무를 뿐, 그 밑으로는 잘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이곳이 정말 대륙의 끝이로군요.”

카르옌이 절벽 아래의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바다는 무척 깊었다. 떨어지면 누구도 살아나올 수 없을 정도로 파도도 거셌다. 낭떠러지 쪽으로 발을 내딛는 카르옌이 아슬아슬해 보여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팔목을 붙들린 카르옌이 놀란 눈으로 돌아서더니 작게 웃었다.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한 적 없어.”

무심히 대꾸하며 손을 떼어냈다. 토파즈는 문득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절벽 끝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져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고목이었다.

토파즈는 종종 이 나무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러면 파도가 절벽에 와서 부딪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 풍경을 누군가와 함께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이 풍경뿐만이 아니었다. 오두막에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토파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고개를 돌리자 카르옌은 어느새 바다에서 눈을 떼고 토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흑단 같은 머리칼을 흩트렸다.

그때였다. 툭,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긴 머리칼이 장막처럼 눈 앞을 가렸다. 바람에 날아가던 머리끈을 재빨리 붙잡았지만 낡은 머리끈은 끊어져 이미 쓸모를 다한 뒤였다. 토파즈는 성의 없는 손길로 머리칼을 그러모으며 미간을 좁혔다.

“제가 다시 묶어드릴까요?”

“그래 보든지.”

막상 허락이 떨어지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꼴이 우스웠다.

“싫어?”

“아니요. 지금 묶어드리겠습니다.”

카르옌이 등 뒤로 와서 섰다. 긴 그림자가 토파즈의 몸을 덮었다. 카르옌이 부스럭거리더니 어깨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어떤 끈이 마음에 드세요?”

척 봐도 값비싸고 부드러워 보이는 비단 머리끈들이 손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 푸른색과 녹색이었다. 일행 중에 머리를 묶을 만한 길이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푸른색.”

“아, 분명 잘 어울리실 거예요.”

등 뒤에서 들리는 희미한 웃음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곧 손끝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윗부분부터 부드럽게 빗어 내리던 손이 머리칼을 한데 쥐고 모으며 귓바퀴와 목덜미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꼭 어린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었다. 장난을 친다고 말하기에는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전체적으로 서툴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으나 신중하게 손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말리지 않았다. 비단 끈이 사락사락 머리칼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했어?”

“네.”

곧 카르옌이 뿌듯하게 대답했다. 거울이 없어 자세히 확인해 볼 수는 없었지만, 대강 손으로 더듬어 확인해 본 토파즈는 할 말을 잃었다.

삐뚤빼뚤하게 묶인 데다 여기저기가 튀어나와 안 봐도 엉망이었다. 서툰 손길이라고 느끼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대체 왜 묶어준다고 한 거야?”

“으음…….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뭔가 잘못된 줄은 아는지, 손으로 긁적거리는 뺨이 복숭앗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 묶기도 귀찮았던 토파즈는 풀어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카르옌이 뒤에서 나직이 말했다.

“진작 연습해 둘 것을 그랬네요. 다음에는 더 예쁘게 묶어드리겠습니다.”

“됐어.”

다음은 없을 것이다. 옆으로 돌아온 카르옌의 시선이 토파즈의 옷자락에 닿았다.

“토파즈님, 옷이 지저분해졌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시선을 내리자 옷자락 끄트머리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숲길을 헤치는 동안 카르옌의 머리칼과 옷깃이 여기저기에 걸려 떼어주다가 묻은 것이었다.

“제가 깨끗하게 해 드릴까요?”

카르옌이 빙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제 손으로 빨래는커녕 옷을 갈아입은 적도 몇 번 없을 것처럼 고운 손이었다.

“빨래를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고?”

그 말에 카르옌이 아주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곧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깨끗하게’요.”

“……!”

태연하게 흘러나온 주문과 함께 마나가 움직였다. 토파즈가 시선을 휙 내렸다. 서늘한 감각이 몸을 감싼다 싶더니 흙이 묻었던 옷자락이 깨끗해져 있었다. 토파즈도 익히 알고 있는 ‘청결’ 마법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토파즈가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옷뿐만 아니라 몸까지 방금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상쾌해졌다.

“…….”

오월까지 눈이 내리는 숲속에서 목욕을 하려면 일 년에 절반은 꽁꽁 얼어붙는 물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몸을 담그거나 목욕물을 길어 데우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씻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늘 귀찮음을 감수해야 했는데, 마법으로는 5초 안에 가능하다니…….

제법 쓸모 있네. 토파즈가 카르옌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고치려는 찰나였다.

눈앞의 마법사가 휘청인다 싶더니 앞으로 픽 쓰러졌다. 토파즈는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 전까지 조잘거리던 마법사는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또 기절한 것이었다.

“하…….”

토파즈는 카르옌의 몸을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틈만 나면 픽픽 쓰러지는 주제에 생각보다 무거웠고, 쓸데없이 길어서 발끝은 질질 끌렸다. 토파즈는 미간을 좁히며 기다란 몸을 다시 고쳐 들어야 했다.

커다란 짐짝 하나를 메고 다시 숲속을 헤쳐야 한다니…… 목욕 한 번의 대가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나?

실로 오랜만에 두통이 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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