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화 (7/110)

#007

이 숲에 득실거리는 마수와 산짐승, 돌연변이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란과 메르디나는 생각보다 더 뛰어난 실력의 검사였다. 특히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검을 섞어온 듯 합이 매끄러워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에 마수와 짐승들의 사체가 나뒹굴고 피가 흘렀다. 이런 광경도 오랜만이었다. 토파즈가 처음 이 자리에 오두막을 지었을 때는 낯선 먹잇감의 냄새를 맡은 온갖 마수와 짐승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토파즈는 한 번도 그 혈투를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뒷골목 빈민가에서 태어나 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검을 쥐고, 늘 전쟁 같은 삶을 살아온 토파즈였다. 머리 굴릴 시간은커녕 잠잘 시간도 빠듯한 환경이 익숙했다.

토파즈는 기꺼이 검을 들어 매일 오두막 앞에 피를 뿌렸다. 시간이 흐르자 이 근방에 오면 죽는다는 정보를 본능에 새긴 것들만이 살아남았다. 1년쯤 흐르니 숲의 먹이 사슬이 다시 쓰였다. 그렇게 토파즈는 작은 평화를 유지하게 된 것이었다.

낮에 평화롭게 거닐던 장소가 피로 물들기 시작하자 드디어 말을 들을 생각이 생겼는지 카르옌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밤이라서 사체가 노골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충 봐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안으로 대피한 줄 알았던 카르옌은 곧 웬 종이 뭉치를 들고 돌아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몸 상태로 마법을 쓰려면 준비가 필요해서요. 무척 부끄럽네요.”

그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발치에 종이를 아무렇게나 떨어뜨렸다. 종이에는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선이 마구잡이로 그려져 있었다.

“다들 뒤쪽으로.”

“……?”

카르옌의 말에 토파즈가 웬 미친 소리냐고 되물으려는데, 하란과 메르디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물리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토파즈는 의아해졌다.

“뭘 하려고?”

“쉿.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세요.”

토파즈는 그 기묘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와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는 두 기사의 묵묵한 얼굴에 설득되고 말았다. 저 마법사가 마당에 피나 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뒤로 물러난 순간이었다.

카르옌이 바닥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바닥에 흩어져 있던 종이들이 제멋대로 날리기 시작했다. 종이 낱장들은 서로 위치를 바꾸며 어지럽게 뒤엉켰다. 자세히 보니 어떤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둥글게 재배열된 종이 뭉치들이 이룬 것은 하나의 커다란 마법진이었다.

“얽매고 삼켜라.”

짧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토파즈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직관적이고 명령조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동시에 마법진에서 선명한 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푸드덕, 저 멀리 새들이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이변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눈앞에서 도무지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이에서 시작된 금빛은 마치 그물처럼 앞으로 뻗어나갔다. 평범한 이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으나 등 뒤에 선 세 검사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그것은 금빛 실로 자아낸 거미줄이었다. 그 위에 선 마수들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무력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카르옌이 손을 휘젓자 허공으로 한 겹의 그물이 더 뻗어나갔다. 숲을 비추는 찬란한 빛 때문일까, 마법사의 짧은 머리칼이 언뜻 금빛으로 보였다. 두 그물 사이가 점점 좁아지더니 곧 위아래로 완벽히 겹쳐졌다.

“…….”

두 겹의 그물 사이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체 한 조각, 피 한 방울조차도.

숲을 밝게 물들이던 금빛마저 사그라들자 웃자란 풀들은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게 흔들렸다. 그 모든 일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일어났다.

수십 마리의 마수를 흔적도 없이 쓸어버린 마법사가 뒤를 돌았다. 카르옌은 ‘식탁보를 만들고 있어요’ 따위의 말을 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토파즈님의 마당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요.”

“……하.”

그는 결코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나 얼떨결에 작위 계승 싸움에 휘말린 도망자 따위가 아니다. 토파즈는 제 손목이라도 걸 수 있었다.

* * *

“토파즈님. 마수가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데 함께 자도 될까요?”

그 무서운 마수를 한 번에 쓸어버린 마법사가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가서 하란에게 팔베개해 달라고 해.”

“농담이시죠?”

“응.”

“하란은 옆에서 제가 마수에게 뜯어먹혀도 모르고 쿨쿨 잘 겁니다.”

“그거야말로 농담이겠지.”

“반쯤은요.”

아무리 곱게 자랐어도 기사는 기사. 설마 진짜일까. 토파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오늘은 선객이 있는데.”

“네?”

카르옌이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침대 머리맡에 흰 여우가 숨을 고롱대며 잠들어 있었다. 아까의 소란에 놀랐는지 잽싸게 따라 들어와 집주인인 토파즈보다도 먼저 침대를 차지한 참이었다.

카르옌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는 흰 여우가 경쟁자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눈꼬리가 조금 있으면 바닥에 닿을 듯했다.

“좁아도 괜찮으면 들어오든지.”

“네.”

카르옌이 냉큼 대답하며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어쩐지 침대에 여우 두 마리를 들인 기분이었다.

잠자리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온기에는 고작 며칠 새에 익숙해져 버려서, 토파즈는 옆에서 카르옌이 꼼지락거리든 코를 골든 상관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토파즈의 꿈은 대체로 붉었다. 한때 동료였던 이의 목이 눈앞에서 잘리고, 뜨거운 화마가 발끝을 감쌌으며 손은 피로 흥건했다.

타인의 원한을 살 일도 많이 했고 그가 가슴 속에 품은 원한도 많았다. 그러니 꿈자리가 편안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악몽 속에서조차 발버둥을 멈췄다. 그저 이 밤이 지나가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불구덩이에서 숨이 멎기를 기다리는 가련한 짐승처럼. 짐승과 달리 그를 가엾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러나 오늘 토파즈를 깨운 것은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침잠도, 희미한 아침 햇살도 아니었다. 이마에 닿은 시원한 감촉이었다. 곧잘 잠자리를 파고드는 흰 여우의 것이라기에는 커다랗고 조금 더 서늘한 손.

그게 인간의 손임을 자각하자마자 토파즈는 그 손을 잡아 꺾고 상대의 몸을 밀쳐 짓눌렀다. 무의식에 각인된 움직임이었다.

깜빡.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칼과 침대에 짓눌린 몸, 조금 난감해 보이는 표정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아.”

잠기운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이곳은 그의 도피처인 숲의 오두막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얼빠진 얼굴은 작은 평화를 헤집은 장본인이었다.

“놀라셨어요? 죄송합니다.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깨워드리려다가 그만.”

카르옌의 목소리는 발톱 세운 짐승을 달래는 것처럼 낮고 조용했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케엥. 머리맡에서 잠을 자다가 봉변을 당한 흰 여우가 침대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에 비해 카르옌은 미동도 없이 그의 밑에 깔려 있었다. 갑작스럽게 밀쳐졌는데도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토파즈보다 더욱 침착해 보였다.

“토파즈님. 제 손목이야 부러져도 다시 붙을 테니 괜찮지만…… 토파즈님이 놀라시면 제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토파즈는 그제야 아직도 카르옌의 손목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함부로 손대지 마. 잘못했으면 뼈를 부러뜨렸을지도 몰라.”

“그래도 괴로워 보이셨는걸요.”

오지랖도 정도껏이다. 토파즈는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넌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살갑게 굴어?”

“제가 본래 타고난 성정이 보드랍고 그렇습니다.”

카르옌이 뻔뻔스레 대답했다.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는 말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토파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위의 램프에 불을 밝혔다. 뒤를 돌자 구겨진 침대 시트를 펴는 카르옌이 보였다. 그의 뺨에 선홍빛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러나 토파즈의 시선은 그 그림 같은 뺨이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물렀다. 카르옌의 흰 손목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미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니 곧 시퍼렇게 멍이 들 것 같았다.

“……겨우 그 정도로 멍이 든다고?”

토파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정말 손목이 부러질 정도로 힘을 준 것도 아니고, 딱 제압할 정도로만 힘 조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피부가 흰 편이라서 티가 많이 나는 것뿐입니다. 저는 괜찮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카르옌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토파즈가 그의 팔을 다시 끌어와 손목을 움켜쥐었다.

“읏.”

아니나 다를까 손목을 약하게 쥐자마자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면서 왜 숨기지?”

“……제 잘못인데 괜히 토파즈님의 마음이 불편하실까 봐 그랬습니다.”

“넘겨짚지 마. 그 말대로 네 잘못인데 왜 내 마음이 불편하겠어.”

카르옌이 침대에 앉은 채 토파즈를 올려다보았다. 언뜻 투명해 보일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제가 잘못했어요, 토파즈.”

토파즈는 책상에 달린 서랍을 뒤졌다. 동그란 통에 담긴 흰 연고를 손끝으로 푹 떠서 카르옌의 손목에 펴 발랐다.

허여멀겋긴 해도 보기보다 뼈가 굵고 단단한 손이었다. 알싸한 향기가 나는 연고가 팔에 발리는 것을 본 카르옌이 낮게 읊조렸다.

“토파즈님은 참 다정하십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사람은 여태 너뿐이야.”

차갑게 대꾸하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카르옌이 웃었다.

“그럼 제가 더 많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약 바르게 조용히 좀 해.”

“약은 팔에 바르는데 입도 조용히 해야 하나요?”

“입에도 처발라 줘?”

“얌전히 다물고 있겠습니다.”

입에 넣어 보고 싶은 향은 아니었는지, 카르옌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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