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불청객을 받아들인 지 닷새째. 문밖에서 들리는 타인의 대화 소리도 제법 익숙해졌다.
토파즈는 머리칼을 묶고 방 밖으로 나섰다. 어젯밤에도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오다가 거실로 쫓겨난 카르옌이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토파즈님, 좋은 아침입니다.”
“뭘 하는 거야?”
하란은 부엌이라고 부르기에도 협소한 공간에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어제 토파즈님이 사냥해 온 순록 고기를 굽겠대요. 저렇게 생겼어도 입맛은 까다로워서, 요리도 꽤 한답니다. 걱정 마세요.”
“저렇게 생겼다니 뭐야?”
하란은 툴툴거리면서도 커다란 몸을 구겨 가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카르옌은 놀리듯 말했지만 하란도 거친 생김새는 아니었다. 단정한 인상에 행동거지도 엄격한 교육을 받은 기사 티가 났다. 물론 카르옌이야말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자란 인상이었지만.
“더는 육포나 뜯고 싶지는 않아서요. 아, 식재료는 여기저기 찾아보니 조금씩 있길래 제 마음대로 꺼내 썼습니다.”
“마음대로 해.”
손수 요리를 해 준다는데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토파즈는 재료를 단순히 굽거나 다 때려 넣고 끓이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배만 채우면 그만인데 왜 굳이 시간과 정성을 낭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일어나셨습니까.”
한 손에 바구니를 든 메르디나가 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버섯이 가득 든 바구니를 내려두며 토파즈에게 물었다.
“독이 없어 보이는 것으로만 따 왔는데,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독버섯을 피해 최대한 색깔이 얌전한 버섯들만 따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숲의 생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
“그쪽의 흰색, 그리고 갓 부분에 노란색이 섞인 건 모두 독버섯이야. 먹으면 여덟 시간 내에 죽을 확률이 절반쯤 되지.”
“그럼 나머지 절반은 사나요?”
카르옌이 긴 나뭇가지로 버섯을 쿡 찔러 보더니 물었다.
“아니. 나머지는 세 시간 내에 죽어.”
“…….”
기껏 따 온 버섯을 절반 넘게 솎아내라는 말에도 메르디나는 미련 없이 따랐다.
“그런데 넌 아까부터 뭘 하는 거야?”
토파즈가 카르옌을 향해 물었다. 그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바늘과 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르옌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바늘이 혼자 움직이며 열심히 실을 엮고 있었다. 그 기괴한 광경을 보며 묻자 카르옌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식탁보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녹색 좋아하세요? 붉은색이랑 노란색 실도 있긴 한데,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웬 식탁보?
“너 여기 눌러앉게?”
“그래도 되나요?”
“…….”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카르옌이 또 사르르 웃었다.
“하루라도 멋진 곳에서 식사하면 기분 좋지 않습니까. 금방 완성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마나 낭비도 가지가지였다. 요양을 해야 할 놈이 식탁보나 뜨고 있다니.
“다 나았나 보네.”
“……아니요. 콜록, 아직입니다.”
카르옌은 감기 환자도 아니면서 갑자기 기침을 쏟아내더니 이마를 짚었다. 바늘의 움직임도 슬그머니 느려졌다.
“그래도 이제는 요령을 알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도 피를 토한 걸 보면 아주 멀쩡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정도 마법쯤은 코 풀기보다 쉽다는 태도였다. 꽤 정교한 통제가 필요한 마법으로 보이는데 대체 이놈은 정체가 뭘까. 멀쩡하게 생긴 얼굴로 나사 하나가 빠진 걸 보니 마탑 소속 마법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토파즈는 생각을 멈췄다. 뭐든, 토파즈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자, 다들 드세요.”
토파즈는 하란이 식탁 위에 올린 구운 순록 고기를 한 입 뜯어 먹고 멈칫했다. 그는 다시 한번 턱을 움직여 고기를 씹고 천천히 삼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예?”
“고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카르옌이 반쯤 일어나 토파즈의 손에 들린 고깃덩이를 경계했다. 토파즈는 무심코 그 손을 피해 고기를 지키며 물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
그가 아는 순록 고기가 아니었다. 특유의 누린내는 전혀 나지 않았고 육질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위에는 뭘 뿌렸는지 향긋하면서도 짭조름했고, 입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 났다. 곁들인 버섯구이와도 잘 어울렸다. 카르옌이 안심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하란의 솜씨는 요리사 못지않게 훌륭한 편입니다.”
메르디나의 말에 토파즈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기사가 아니라 요리사를 하는 쪽이 좋지 않나?
“하하, 영광이네요.”
하란이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여태까지 본 그의 미소 중 가장 진실해 보이는 미소였다. 토파즈는 자세를 바로 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하란은 작은 화덕에서 자꾸만 무언가를 꺼내 왔고, 카르옌은 우아한 손길로 그것을 잘라 개미 눈곱만큼 입에 넣었다. 그 옆에서 메르디나가 음식 냄새를 맡고 들어온 흰 여우에게 따로 빼 둔 생고기를 나눠주는 모습이 보였다.
“…….”
토파즈는 문득 주변의 풍경이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김이 솔솔 오르는 식사도, 식탁 위에 장식된 꽃다발과 연녹색 식탁보도, 타인의 그림자도.
* * *
한밤중이었다. 토파즈는 나무로 된 덧창을 절반쯤 열었다. 작은 틈 사이로 숲의 어수선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침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파즈가 몸을 돌렸다. 곧 문이 열리고 카르옌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문틈 새로 쏙 들어왔다.
“토파즈님, 하란과 메르디나가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고 합니다.”
“아직 들어오라고 대답 안 했는데.”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시침 떼듯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다시 두드릴까요?”
“됐어. 나갈게.”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할 때는 아니었다. 끼익, 카르옌이 직접 문을 열어 주며 밖으로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무척 신사다운 태도였으나 상대와 상황이 틀렸다. 토파즈가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마수한테 포위당했어.”
거실에 모여 있던 하란과 메르디나의 표정이 굳었다.
“예상은 했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네요.”
“최소 서른 마리는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많은 마수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요. 아니, 튀어나왔다는 말은 옳지 않겠군요.”
“그래, 숨어 있었던 거야. 그동안 우리가 달게 잘 수 있었던 이유는 걔들이 원래 오두막 근처로는 잘 오지 않기 때문이고.”
“당신 때문에?”
하란이 물었고 토파즈는 어깨를 으쓱였다. 긍정의 뜻이었다.
“낯선 냄새가 나니 궁금했겠지. 며칠 동안 눈치를 살피다가 몰려오는 걸 보니 너희가 약하다고 판단했나 본데.”
“왠지 자존심 상하는데요?”
“내가 살펴보고 올 테니 너희는 안에 있어.”
“함께 가요, 토파즈님.”
토파즈의 만류에도 카르옌은 그의 뒤를 졸졸 쫓아 나왔다. 카르옌뿐만이 아니었다. 하란과 메르디나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토파즈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때였다.
바스락.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린 것과 토파즈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앞을 막아서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마수의 목에 정확히 검을 찔러 넣었다. 멧돼지와 닮았으나 악어처럼 두꺼운 가죽을 두르고 있어 약점인 목 부근을 노리지 못하면 승산이 없는 마수였다.
쿵! 마수가 옆으로 쓰러졌다. 토파즈는 마수의 사체에서 검을 뽑아내고 손목을 반 바퀴 돌려 피를 털어냈다. 후두둑, 새빨간 피가 풀 위로 떨어졌다.
“괜찮아?”
물으며 고개를 돌리자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하늘을 그대로 박아넣은 것처럼 새파란 눈이었다. 이런 눈을 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가?
“아…….”
카르옌은 놀랐는지 어딘가 멍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게 안에 있으라니까.”
“아니요. 토파즈님이 아무리 강하시다고 해도 혼자 보낼 수는 없죠.”
카르옌이 여전히 나긋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란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뽑았다.
“방해꾼 취급은 신선하네요. 민폐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고 앞을 보시죠.”
하란의 말에 토파즈가 보지도 않고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촤악, 단숨에 절명한 마수의 검붉은 피가 마당에 흩뿌려졌다.
“왜 방해꾼 취급하는지 알 것 같아서 좀 짜증 나네요…….”
하란이 혀를 내두르며 그들의 뒤쪽으로 달려드는 작은 비행형 마수의 날갯죽지를 꿰뚫었다. 메르디나는 이미 저만치 앞으로 튀어 나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 끝이 날렵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토파즈가 검을 바닥에 푹! 깊이 내리꽂았다. 카르옌은 제 발 옆에서 단말마도 내뱉지 못하고 스러진 주황색 짐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다란 몸통을 보면 뱀 같은데 두께가 성인 팔뚝보다 두꺼웠고, 주황색 얼룩무늬가 있었다.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마수인가요?”
“아니, 걘 그냥 뱀이야. 물리면 죽는다는 점은 마수랑 다를 거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