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전하. 그만 일어나시죠?”
불손한 어조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카르옌이 눈을 떴다. 침대맡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메르디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뒤에는 목소리의 주인인 하란이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메르디나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늦잠을 다 자고 별일이십니다.”
“아, 잠자리가 편안해서.”
선선히 대답하자 하란이 얼굴을 구겼다.
“전하의 목 따위는 맨손으로도 부러뜨릴 수 있는 자의 옆에서 말입니까?”
“응. 덕분에 꿈이 달더군.”
“하아…….”
카르옌이 상체를 일으키며 습관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누군가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나 최근 며칠은 정말 몸이 제 몸 같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있지?”
‘그’. 카르옌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두 수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하란이 팔짱을 풀며 침대맡으로 다가와서 섰다. 세 사람이 모인 것은 카르옌이 눈을 뜬 뒤 처음이었다. 하란이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전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그’가 맞습니까?”
“그런데 하란. 입조심 해야지.”
여전히 나긋한 어조였으나 온도는 서늘했다. 카르옌이 벽에 손을 대고 직사각형이 겹쳐진 간단한 무늬를 그렸다. 일순간 빛이 벽과 천장을 감쌌다가 사라졌다. 약식으로 발동된 방음 마법진이었다.
“실수했어, 카르옌.”
하란이 곧장 말투를 고쳤다. 함께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부터 심심하면 평민 행세를 하며 거리로 뛰쳐나가던 2황자였다. 덕분에 하란과 메르디나는 사석에서 주군에게 반말을 쓰는 것에 능숙했다. 카르옌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오두막 안에는 없는 듯한데. 외출하셨나?”
“아침 일찍 나갔어.”
“우리만 이 집에 두고? 지나치게 안일하셔서 걱정이야.”
“훔쳐 갈 것도 없는 집인데 뭘.”
“마음 같아서는 이 집을 통째로 훔쳐 가고 싶은데.”
“…….”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하란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잘했어. 하란, 메르디나. 용케 목숨 부지해서 여기까지 와 줬구나. 운이 나쁘면 사이좋게 무덤에 묻힐 각오도 했었는데.”
카르옌은 허전한 제 손가락 마디를 매만졌다.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 제국의 2황자가 황궁 한복판에서 독을 마신 것은 열흘 전, 황태자 책봉식을 정확히 한 달 앞둔 날이었다.
독은 시종 세 명이 먼저 기미를 본 찻물에 들어 있었다. 카르옌이 쓰러진 즉시 일꾼 한 명, 소문 한 마디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2황자 궁의 모든 문이 걸렸다. 그러나 배후를 캐기도 전에 범인으로 추정되는 주방 하인은 자살했고 카르옌은 사흘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황제는 요양을 명목으로 카르옌을 황궁에서 빼냈다. 황제가 휴가를 보내는 행궁이 있는 도시, 바이델이 목적지였다.
최측근인 하란과 메르디나를 제외하고도 기사 열둘과 마법사 둘이 행렬을 호위했다. 책봉식을 앞두고 막 황태자 친위대로 꾸려진 이들이었다.
“모두 죽었나?”
“……그래.”
메르디나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 안에 최초의 배신자가 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메르디나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참상이 여전히 선명했다.
메르디나는 그날 카르옌과 같은 마차 안에 타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황자의 경과를 곁에서 살피기 위해서였고, 실제로는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동료와 시종들, 심지어는 황자의 어머니인 황제조차도. 마차 곁에 바짝 붙어 말을 몰고 있는 하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역시 아닌 척하면서도 주변을 경계 중일 것이다.
독을 마신 카르옌은 사흘째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가끔 의식을 회복할 때도 있었지만 하루에 고작 몇 분이 될까 말까였다. 메르디나가 차창 밖의 기척을 살필 때였다.
‘메르디나.’
아주 작은 속삭임이 기사의 예민한 귀에 닿았다. 메르디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카르옌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있었다.
여기서 반갑게 이름을 외칠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던 메르디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카르옌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거의 입술만 달싹여 속삭였다.
‘우리는 행궁에 닿기 전에 습격당할 거야.’
‘…….’
‘첩자는 흑발의 마법사 포함, 최소 넷.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일단 도망쳐야 해.’
친위대 내부에도 황자를 노리는 이가 있다. 예상은 했으나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메르디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기사 넷 정도라면 메르디나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전투 마법사가 끼어 있다면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카르옌을 지키며 싸워야 했다. 어떻게 알아낸 정보인지 몰라도 카르옌은 분명 무리해서 마법을 썼을 것이다. 식은땀을 비 오듯 쏟고 있는 그는 전력이 되기는커녕 의식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고작으로 보였다.
카르옌은 손가락에 늘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냈다. 그의 왼손 약지에 두 개, 검지에 하나 끼워져 있던 얇은 금빛 반지는 그가 수년째 빼지 않고 끼고 다니는 것이었다.
‘제네베와 리스타바트를 지나 제국 최북단 마을인 키올렌까지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동 마도구야. 사용 가능 인원은 최대 4명.’
‘……!’
‘문제는 최초 좌표가 수도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지. 오차 범위를 고려해도 이 거리에서 시동하는 건 불가능해.’
공간이동 마도구는 만들 때 입력한 좌표대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오차 범위는 작은 마을 한 개 정도였다. 좌표를 수정하려면 아예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데, 하나 만들기에도 까다로운 도구였다.
‘내가 너와 하란을 데리고 딱 한 번 이동 마법을 펼칠 테니, 정해진 좌표에 도착하면 너희가 나 대신 이 마도구를 사용해.’
‘너무 위험합니다.’
공간에 간섭하는 마법은 마법 중에서도 최상위의 마법이었다. 그것도 일행을 둘이나 데리고 마법을 펼치는 것은 몸 상태가 멀쩡한 카르옌이라고 해도 상당한 힘을 써야 했다.
‘차라리…….’
메르디나는 차라리 자신과 하란이 막는 동안 혼자 도망치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는 듯 엄격한 눈길이 메르디나를 향했다.
‘해야 해, 메르디나. 기회는 한 번뿐이야.’
‘……전하.’
카르옌이 입꼬리를 당겼다.
‘그때까지 내 숨이 붙어 있다면 키올렌 마을 북쪽의 그렌로샤 숲으로 가 줘. 아니, 죽었더라도 이왕이면 그 숲에 묻어 주면 좋겠는데.’
메르디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마차 밖에서 굉음이 울렸다. 검 부딪치는 소리와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말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났다. 바퀴가 부서졌는지 마차가 기울어지고 바깥에서부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메르디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카르옌의 앞을 막아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란이 검은 머리 마법사의 목을 단번에 베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주문을 완성하지 못한 배신자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마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녔는지, 거기에는 왜 하필 땅끝 마을인 키올렌으로 가는 좌표가 걸려 있었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메르디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이 숲에 도착해 붉은 머리칼의 남자를 본 뒤에야 의문이 조금 풀렸다.
“넌 ‘그’가 살아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 이곳에 있다는 것도.”
분명 죽었다고 알려진 이였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카르옌이 쉽게 긍정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뒤에야 내뱉는 긍정이었다. 하란이 입을 열었다.
“우리를 믿지 못했구나.”
“내 목숨을 맡길 정도로는 믿었지.”
“그의 안위가 너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단 말인가?”
카르옌이 입꼬리를 당겼다.
“이제야 알았다면 실망인걸, 하란. 내가 내내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고.”
“카르옌. 너…….”
“그만.”
메르디나의 만류에 하란이 입을 다물었다. 하란은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으면서 카르옌과 관련된 일에만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란이 머리를 식히려는 듯 다시 팔짱을 끼며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그래,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어차피 너희도 알게 될 이야기니까.”
카르옌이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몸 상태는 어때.”
“좋지 않아.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지만 지금처럼 불쾌한 적도 처음이군. 꼭 밧줄이 온몸을 옭아매고 있는 기분인데……. 너희는 다친 곳 없나?”
“큰 상처는 없어. 마도구 덕에 추격대를 따돌렸으니.”
“우리가 도망친 이후 만난 제일 위험한 존재가 바로 네 은인이었어.”
하란의 말에 방 안에 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 기색이었다. ‘은인’의 이야기를 할 때면 카르옌은 오래전부터 그랬다.
카르옌은 방 안을 둘러보더니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하고 손을 휘적였다. 곧 그의 앞에 동그란 물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표면이 얼굴을 비추었다.
“몸이 좋지 않다며.”
“걱정 마. 내게 마법은 오른손을 움직이는 일과 마찬가지야. 이 정도도 못 쓰면 걷지도 못할 테지. 다만 예전보다 훨씬 귀찮고 느린 방식으로 써야 한다는 게 성가셔. 다른 마법사들은 모두 원래 이딴 식으로 마법을 쓰나?”
“황립 아카데미의 데네브 교수가 그 말을 들으면 억울해서 엉엉 울겠어.”
한때 그의 담당 교수였던 이가 울든지 말든지 별반 관심이 없는 카르옌은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보느라 바빴다. 그가 새카만 머리칼을 손끝으로 집어 올리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란처럼 칙칙한 머리 색이라니, 낯빛이 너무 어두침침해 보이는군.”
졸지에 칙칙한 머리 색 취급을 받은 하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민 절반의 머리카락이 흑색 또는 갈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황당한 소리였다. 게다가 하란은 엄연히 갈색 머리칼이었다. 하란은 흑발과 갈색 머리의 차이에 대해 피력하는 대신 지적했다.
“그 염색 마도구 네가 만들어서 넣어둔 거잖아. 이럴 때 쓰라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그랬지. 하지만 역시 ‘붉은색’으로 만들어 둘 걸 그랬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니까.”
‘붉은색’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끝에 닿은 머리칼이 붉게 물들었다. 카르옌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흰 피부에 달라붙은 핏빛 머리칼은 어딘가 위험한 느낌을 풍길 정도로 잘 어울렸으나, 카르옌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본 뒤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깟 눈속임으로는 그의 찬란함을 조금도 따라갈 수 없군. 역시 지금은 ‘칙칙한 색’을 참는 수밖에 없나.”
말을 마치는 순간 머리 색은 다시 흑발로 돌아와 있었다. 하란은 저놈이 황자만 아니었어도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다는 불경한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곤란한데……. 그는 안 그런 척해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단 말이야.”
쓸모없는 말을 떠들어 대던 카르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는 집고양이처럼 귀를 쫑긋 세운 채였다. 그가 손으로 수인을 몇 가지 그리더니 방음 마법을 해제했다.
“나가 봐야겠어. 그가 사냥감을 잡아 돌아오고 있군.”
입가에 매달린 웃음이 짙었다. 아주 기꺼운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