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오두막으로 돌아가니 하란이 부지런히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쪼개진 장작이 가득했다. 메르디나는 한 팔로 장작을 산더미같이 들어 옮기며 한쪽에 쌓고 있었다. 바구니 하나 달랑 들고 돌아온 카르옌이 둘을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장작은 왜 패는 건가요?”
아무리 혹한의 추위로 유명한 최북단 지역이라고 해도 지금은 한 해 중 가장 따스한 일곱 번째 달이었다. 벽난로에 불을 피울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이 오두막에는 온수 장치도, 화기 조절 장치도 없으니까. 네가 일주일 동안 찬물로 씻고 말린 곡식만 주워 먹을 거라면 말리진 않을게.
“아……. 그러니까 씻고 요리하는 데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거라면 진작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카르옌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위험하니 조금 떨어져 계세요.”
카르옌이 허공에서 손을 움직였다. 저걸 수인(手印)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성의 없는 휘적임과 함께 허공에 작은 불꽃이 생겼다.
“이 불꽃은 가연물이 없어도 계속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제 마나로 유지하는 거니까요. 크기를 조금 키워도 괜찮을까요?”
“…….”
마법으로 만든 불꽃. 토파즈는 괜한 감상에 시달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꺼림칙한 기색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카르옌은 “색깔을 조금 바꿔 볼게요.” 하더니 불꽃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아름다운 푸른색 불꽃이 손끝에서 화르륵 타올랐다. 불꽃이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크기를 키워 주먹만큼 커다래진 때였다.
“쿨럭.”
불현듯 카르옌이 기침을 쏟아내며 입을 가렸다. 불꽃은 그가 집중력을 유지하지 못하자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적도 없이 꺼져 버렸다.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익숙한 피 냄새였다. 이내 입을 가린 커다란 손바닥 사이로 불그스름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카르옌!”
두 기사가 잽싸게 달려왔다.
“괜찮아?”
“음……?”
카르옌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왜 피가 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저런 멍청이가…….
“입 대.”
토파즈는 카르옌의 뒷덜미를 쥐어 고개를 숙이게 하고 품 안에서 꺼낸 무명천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쿨럭, 한 번 더 기침 소리가 나더니 희미한 혈향이 퍼졌다.
“닦을 천과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가져올게.”
하란이 오두막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인지, 카르옌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불은 피워드릴 수 없겠네요…….”
천에 막혀 조금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군. 토파즈는 성가신 얼굴로 더 힘을 주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숨을 잘 못 쉬겠어요, 토파즈님…….”
카르옌이 웅얼거리며 슬쩍 손목을 잡아 올 때까지.
* * *
한밤중, 조심스럽지만 기척을 완전히 숨기지는 않은 발소리가 오두막의 나무 바닥을 울렸다. 이내 끼익, 방문을 여는 작은 소음과 부스럭거리는 움직임도 느껴졌다. 누군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방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도둑고양이는 무언가를 훔치는 대신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토파즈를 살펴보는 듯했다.
“주무세요?”
나직한 물음과 함께 손이 얼굴 근처로 뻗어 왔다.
“아니.”
탁. 토파즈는 눈을 뜨지도 않고 그 손목을 잡아챘다. 눈을 뜨자 예상했던 대로 카르옌이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손목이 붙들렸는데도 카르옌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토파즈는 그의 손목을 떨치듯 놓아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 밑으로 쏟아지는 붉은 머리카락에 카르옌의 시선이 따라왔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던 건가. 어느 쪽이든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네가 무기를 들고 있었다면 난 널 공격했을 거야.”
“물론 그러셔야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어조였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이 마법사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토파즈님, 오늘도 제게 침대 곁을 내어주시면 안 될까요?”
카르옌은 자유로워진 양팔을 침대에 얹고 그 위로 하얀 뺨을 붙였다. 올려다보는 얼굴은 한 떨기 백합처럼 아름다울 뿐 위협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왜?”
“아까 보셨다시피 전 아직 환자인걸요……. 보살핌이 필요해요.”
“널 보살펴줄 친구들은 밖에 있잖아.”
“둘 다 환자 보살피는 데는 재능이 없답니다. 제가 다락방으로 올라가면 메르디나는 성가신 얼굴로 사다리를 치워 버릴 테고, 하란은 잠귀가 어두워서 옆에서 제 숨이 넘어가도 모를 거예요.”
“잠귀가 어두운 기사도 있어?”
“있고 말고요. 그러니 토파즈님께서 저를 살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숨이 넘어가면 나라고 별달리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는데.”
카르옌이 나직이 웃어 보였다.
“그래도 안심이 됩니다.”
만난 지 사흘, 오늘 새벽 막 눈 뜬 이의 입장에서는 고작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의 곁에서 안심이 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으나 토파즈는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숲에서 혼자 사는 남자의 머리통을 뜯어 연구해 보고 싶지만 눈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꾹 참고 있는지도 모르지.
토파즈는 짧게 고민했다. 낮에 피까지 토한 병약한 놈이니 조금 더 푹신한 곳에서 자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 침대가 하나뿐인 자신의 침대라는 점이 문제지만, 일단 침대는 두 명쯤 자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기껏 숨을 붙여 놨는데 간밤에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찝찝할 테고.
“누워.”
“정말인가요?”
허락이 떨어지자 카르옌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문틀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로 가련해 보이는 것도 제법 재주다 싶었다.
누우라는 듯 얇은 이불자락을 젖히자 카르옌이 잽싸게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으며 너무 따뜻하다고 중얼거렸다.
여름인데 그럼 따뜻하지 춥나…….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카르옌은 부스럭거리더니 토파즈 쪽으로 돌아누웠다.
“토파즈님은 경계심이 너무 없으시네요.”
“너 같은 애는 맨손으로도 때려잡을 수 있으니까.”
“제가 마법사인데도요?”
“주문을 외우기 전에 혀를 자를 수도 있고.”
“하하.”
카르옌이 낮게 웃었다. 그가 양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어 얌전히 올려두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물었다.
“제가 뭔가 보여드릴까요?”
토파즈가 대답하기도 전, 달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던 방 안이 황금빛으로 환히 빛났다. 토파즈는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풀어 둔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검집째로 카르옌의 턱밑을 겨누었다.
조금 전 카르옌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이불 위에 올려둔 두 손도 얌전했다. 토파즈가 어떤 낌새도 알아차리기 전에 마법이 발동된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카르옌이 전개한 마법은 공격성을 띠지 않았다. 벽을 타고 올라간 황금빛 가루가 천장 곳곳에 별을 수놓더니 곧 파스스 흩어져 버릴 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조금 전 카르옌이 토파즈의 목숨을 노리고자 했다면, 토파즈는 과연 막을 수 있었을까?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감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턱 아래에 차가운 검집이 닿을 텐데도 카르옌은 태연했다.
“모든 마법사가 긴 주문을 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마법사를 곁에 둘 때는 늘 조심하세요.”
“네가 주문도 수인도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보통 마법사들은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마친 뒤 언어나 손짓을 매개로 마나를 끌어낸다. 그 과정을 축약시킬수록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래서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가장 먼저 손과 입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었다.
만약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때 어떤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훨씬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지금의 카르옌처럼.
마법사의 탑에 알려지면 당장 연구 대상이 될 법한 비밀을 이야기해 놓고 카르옌은 장난스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제 친우들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알려 주지?”
특별 취급받을 만한 사이가 아닌데 지나치게 친근하게 구니 더욱 수상했다. 그러나 카르옌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다.
“제 은인이시지 않습니까. 한번 살려 주신 목숨을 이유 없이 해치지는 않으실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순진한 논리였다. 토파즈는 어쩐지 어린애를 상대하는 기분이 되어 그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집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얼굴이 실제로도 앳되다는 것을 자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너, 사람을 그리 쉽게 믿으면 안 돼.”
이유가 없어도 타인을 죽이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아니,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쪽이 맞을까. 자신의 발길을 막았다든가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조차 누군가에게는 핑계가 된다.
“쉽게 믿지 않습니다.”
카르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토파즈는 이불 밑에서 발을 뻗어 그의 발목을 툭 건드렸다. 발로 차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에 카르옌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나가.”
“네?”
“너처럼 수상한 놈은 내 침대에서 재워 줄 수 없으니 나가라고.”
“잠시만요, 토파즈님. 이제 정말 얌전히 있겠습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아……. 저 역시 몸이 회복되지 않은 듯합니다. 고작 마법 한 번 썼을 뿐인데, 음. 잠이 쏟아지네요…….”
“개수작 부리지 말고.”
“으음. 안녕히 주무세요, 토파즈님.”
카르옌은 꾸물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리더니 고른 숨을 내쉬었다. 너무 규칙적이라 오히려 거짓인 티가 나는 숨소리였다. 토파즈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불을 덮었다. 또 헛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