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코끝으로 낯선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건조한 나무 냄새였다.
카르예니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늘처럼 청명한 눈동자가 한 번 깜빡거릴 때마다 점점 또렷해졌다.
그는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곳은 침대인지 바닥인지 헷갈릴 정도로 딱딱했고 이불도 거칠었다.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고개를 돌리자 휑한 방이 눈에 담겼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책상, 의자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다. 햇빛이 들이치는 창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햇빛이 역광으로 내리쬐어 잘 보이지 않았으나, 하란이나 메르디나는 아니었다.
짧은 튜닉 셔츠에 발목까지 감싸는 까만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였다. 검사가 입을 법한 복장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왼쪽 허리에는 검집이 매달려 있었다.
“깼네.”
기척을 느꼈는지 낯선 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책상에서 무얼 하는지 달그락, 달그락.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카르예니프는 침대에서 오른손을 떼어냈다. 가지고 있는 날붙이 하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본디 무기가 필요 없는 마법사였으니.
낯선 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동시에 하나로 느슨하게 묶고 있던 머리칼이 허리춤 위로 물결쳤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하고, 장미처럼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 카르예니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당신은…….”
토파즈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느꼈지만 눈을 뜨니 더욱 아름다운 남자였다.
가는 붓으로 그린 듯 섬세한 이목구비 탓에 가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흐트러진 흑발과 땀에 젖어 촉촉한 목덜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꺼풀 아래에 감춰져 있던 눈동자는 하늘보다 푸른 벽안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여기가…….”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막 깨어나서인지 경황이 없어 보였다. 토파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키올렌 마을 북쪽 숲, 그렌로샤야. 이틀 전에 네 일행이 이 숲에 들이닥쳤어. 넌 정신 못 차리고 잠만 자다가 지금 깨어났고.”
“아…….”
낮은 탄성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자의 손이 이불을 그러쥐었다. 곧 시체처럼 창백하던 뺨이 발긋하게 물들고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순간 방 안이 햇살로 가득 찼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군요.”
“…….”
토파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얼굴이라면 얼굴 하나 때문에 쫓겨서 땅끝까지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딱히 내가 해 준 건 없어. 네가 알아서 깨어난 거지.”
“소중한 집을 빌려주시고 치료까지 해 주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푸른 눈이 토파즈가 약초를 찧고 있던 작은 나무 그릇에 닿았다. 토파즈는 그릇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걸음을 가까이했다.
“조건은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였지.”
“아…….”
남자가 탄식을 흘렸다. 그는 이불 끝을 한 번 더 꾹 쥐었다가 떼어내더니 입을 열었다.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당장 떠날 여력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머무르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단 며칠만이라도 좋습니다.”
토파즈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너는 마법사인가?”
“네. 맞습니다.”
“어디에서 왔지?”
“수도 카샤프에서 왔습니다.”
일부러 일행과 입 맞출 시간을 주지 않고 물었는데도 눈앞의 남자는 고민 없이 대답해 왔다. 속일 생각 따위 없다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무슨 죄를 지었어?”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나비의 첫 날갯짓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맹세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쫓기고 있어?”
“가문의 작위 계승 싸움에 휘말렸습니다. 저는 독을 마시고 요양을 위해 가문의 별장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제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저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습니다.”
토파즈가 팔짱을 끼며 비딱하게 섰다.
“상당히 솔직하네. 겁이 없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호의로 도와주신 분께 거짓을 속삭이는 건 은혜를 기만하는 일이지요.”
남자가 정중하게 말했다. 수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낯을 보니 당장 목에 검을 들이대며 다그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일주일.”
“…….”
“네가 회복할 때까지 딱 일주일 더 머무르게 해 주지. 그 이후에는 조용히 떠나.”
남자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한참 뒤에 흘러나온 말은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시시한 질문이었다.
“저는 카르옌이라고 합니다. 은인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은인이라고 불릴 만한 자가 아니래도.”
“그래도 제게는 귀한 인연이시니, 부디 가르쳐 주세요.”
“……토파즈.”
대답을 들은 남자, 카르옌이 천천히 눈을 휘었다. 토파즈. 입 안으로 곱씹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은인과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창백한 낯으로 헤실거리는 카르옌을 보며 토파즈는 생각했다. 어쩐지 좀 이상한 놈인 것 같은데…….
* * *
이상한 놈이 확실했다.
“토파즈님. 꽃을 꺾어 왔습니다. 식탁에 장식하면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붉은 꽃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얼굴이 본 적 없이 화사했다. 여전히 핏기 없는 얼굴임에도 푸른 눈동자는 보석을 박아넣은 것처럼 쓸데없이 반짝거렸고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깨어난 지 세 시간째, 쓰러져 누워 있을 때조차 빛바랜 적 없는 미모가 지금은 과할 정도였다. 하란과 메르디나가 아까부터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르옌은 생글거리며 붉은 꽃을 내밀었다. 토파즈는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경고했다.
“당장 버려.”
“네?”
푸른 눈이 커다래졌다.
“그 꽃 독 있어.”
“아…….”
소중하게 안고 있던 꽃을 내려다보는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토파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숲에서는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럼 어떤 꽃에 독이 없는지 토파즈님이 제게 알려 주세요.”
“꽃 꺾을 시간 있으면 장작이나 패.”
“장작을요?”
고개를 갸웃한 그의 시선이 하란과 메르디나가 서 있는 쪽에 와서 닿았다. 우리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구나. 두 사람이 동시에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옌의 입가에 눈부신 미소가 걸리는 순간 메르디나가 눈치 빠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얼떨결에 메르디나를 숨겨 준 꼴이 된 하란에게 나긋한 목소리가 정확히 닿았다.
“저는 아직 환자이니 저보다는 하란이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잘할 수 있지, 하란?”
“…….”
토파즈야 누가 장작을 패든 상관없었기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무가 많던데, 먹을 만한 열매를 따 올까요?”
“아직 환자라며?”
“염려해 주시는 건가요? 토파즈님은 참 다정하시네요.”
“…….”
“그래도 거동이 멀쩡하니 조금쯤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열매가 붉고 꽃이 피지 않은 나무에 달린 것만 주의해서 따. 나무줄기에 상처가 있거나 잎이 발톱 모양인 것은 안 돼.”
“설명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는데……. 제가 또 실수할지도 모르니 함께 가 주시겠어요?”
토파즈는 눈썹을 곤혹스럽게 늘어뜨린 카르옌을 힐긋 올려다보고는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카르옌은 나무로 짠 바구니를 챙겨 그 뒤를 따랐다. 고개를 살짝 숙여 문을 통과하는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오두막의 문이 닫히자마자 하란이 중얼거렸다.
“아예 여기 눌러앉아서 살 기세인데?”
“…….”
메르디나는 말없이 벽에 걸린 도끼를 건네주었다. 하란이 침울한 얼굴로 도끼를 받아 어깨에 걸쳤다. 어깨가 무거웠다.
* * *
“토파즈님. 함께 가요.”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숲은 이상했다. 자신의 곁을 따라붙는 사뿐사뿐한 발걸음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종종 길을 잃고 숲 초입을 헤매는 어린아이를 밖으로 이끌어 준 적은 있었지만, 덕분에 유령이 산다는 소문까지 붙은 뒤로는 몇 년간 이 숲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얼굴을 드러낸 채 누군가를 오두막까지 데리고 오기는 토파즈도 처음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보니, 카르옌은 제법 건장한 남자였다. 작은 키가 아닌 토파즈가 조금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늘씬해 보이는 몸은 의외로 탄탄했다. 그럼에도 목 위에 달린 섬세한 얼굴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보면 더없이 청순해 보였다.
그가 잠들어 있던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토파즈는 제 침대를 차지한 불청객을 밤새 눈여겨보았다. 친절하게 병간호 따위를 해 줄 생각은 없었으나 의도와 달리 눈을 떼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가 무척 기묘한 탓이었다.
일행에게 물으니 독을 먹었다고 하던데, 일반적인 중독 증상과는 달랐다. 호흡 곤란이나 경련, 구토 등의 증상은 없이 그저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하던 얼굴과 푸른 입술은 저절로 혈색을 되찾았고,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할 만큼 회복되었다.
이 나라는 마법사가 세운, 마법사에게 관대한 땅이니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죽어간 마법사들을 알고 있었지만……. 토파즈는 생각을 끊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듣던 것보다는 평화로워 보이는 숲이네요.”
카르옌이 높은 가지에 달린 열매를 톡, 따서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열매를 요령 없이 딴 탓에 손끝이 붉게 짓물러 있었다.
그가 딴 열매 중 절반이 토파즈의 손에 의해 다시 버려지고 있어 바구니는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카르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채집이 아니라 즐거운 산책이라도 나온 태도였다.
“낮이니까.”
“해가 지면 많이 달라지나요?”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태양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튀어나오지.”
“그런 곳에서 혼자 살기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내 한 몸 지킬 능력은 돼.”
“멋지십니다.”
그런 위험한 놈과 단둘이 어딘지도 모를 숲을 헤매고 있으면서 태평하게 감탄이나 하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덜떨어진 건지 그도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토파즈는 곧 눈앞의 남자가 얌전하게 생겼지만 마법사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마법사라면 어딘가 나사 한 군데가 빠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뒤떨어진 현실감각과 비대한 자아 역시 그들의 보편적인 특징 아니던가. 토파즈는 가볍게 납득하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