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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2)화 (2/110)

#002

그냥 떠보는 것이라기에는 단정적인 어조였다. 경계심이 짙어진 하란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메르디나가 소리 없이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마법사의 심장에서는 독특한 흐름이 느껴져.”

마법사들이 몸에 ‘그릇’이라고 불리는 마나 순환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맥 짚듯이 짚어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원래 죽었어야 하는데 용케 살아 있네. 이런 환자를 업고 그렌로샤를 헤매다니 무모했어.”

“어떻게 그런 걸 아십니까? 혹시 낫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아십니까?”

하란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나는 의사도 신관도 아니야. 설령 의사였다고 해도 별 방법은 없었을 것 같지만. 이 남자는 ‘그릇’이 아픈 것 아닌가?”

“…….”

“죽으려면 진작 죽었을 테지. 스스로 회복하고 있는 모양이니 가만히 내버려 둬도 살아날 거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질문이 많네.”

귀찮다는 듯 읊조린 남자는 한 손으로 두 기사를 밀어 내쫓고 성의 없이 잘 곳을 지정해 주었다.

“너는 다락방, 너는 거실.”

“당신은요?”

남자가 방 안을 눈짓했다.

“여기가 내 방이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란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들의 주군이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 해도 지금은 의식도 없이 잠든 채였다. 정체도 모르는 남자와 한방에 놔둘 수는 없었다.

“착각하는 것 같은데.”

서늘한 시선이 하란에게 닿았다.

“내가 너희를 죽일 거라면 아까 죽였을 거야. 이 오두막에 들이기도 전에.”

“…….”

“얌전히 머물러. 이 숲에 들어온 이들은 웬만해선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지.”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두 기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남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과연 그게 모두 마수 때문일까?”

“…….”

마주친 눈동자는 암흑처럼 짙은 까만색이었다. 두 기사는 생전 느껴 보지 못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이미 새벽이지만 조금 자도록 해. 숲의 아침은 늦으니까.”

덤덤하게 협박을 한 남자는 얼어붙은 둘에게 거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모포를 내밀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돌아가 삐걱대는 문을 대충 끼워 맞춰서 닫았다.

숨을 고르던 하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만 허튼짓하면 죽여 버린다는 말로 들리나?”

“동의해.”

하란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본 두려움 탓이었다.

“네게 칼을 들이댈 때까지도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어. 내가 네 뒤에 있었는데도.”

“마찬가지야.”

“하…….”

하란은 당장이라도 다시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가 주군을 구출해 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메르디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셋 다 단칼에 죽었을 거야. 누구의 손에, 왜 죽는지도 모른 채로.”

“대체 정체가 뭐지?”

한탄과도 같은 물음에 메르디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

“너도 있을 텐데.”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하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죽었잖아.”

“그렇게 알려졌지. 시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

“붉은 머리카락, 압도적인 무력, 전하가 마지막 순간 찾아갈 만한 유일한 사람.”

“설마…….”

“이 세 가지 요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니. 나라면 망자가 무덤에서 뛰쳐나왔다는 편을 믿겠어.”

“그럼 정말 ‘그’가 살아 있다고?”

* * *

숲의 아침은 나름대로 평화로웠다. 토파즈는 붉은 머리칼을 손으로 대강 빗어 높게 묶었다. 텅 빈 거실에서 빈 바구니 하나를 집어 들고 오두막을 나서자, 여느 때처럼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웃자란 풀과 그 사이사이로 피어난 새빨간 독초들, 노래가 아니라 악쓰는 소리처럼 들리는 새의 지저귐. 이제는 이 엉망진창인 광경도 제법 정겹게 느껴졌다.

이 숲에는 평범한 산짐승도 살았지만 마수가 더욱 많았다. 마수도 짐승도 아닌 돌연변이도 있었다. 이를테면 머리가 두 개 달린 늑대나 앙상한 날개가 달린 다람쥐 같은 것들이었다.

쿠어억. 토파즈의 눈앞에 나타난 집채만 한 불곰은 평범한 산짐승에 속했다. 날카로운 발톱에 긁히면 찢겨 버리고 말겠지만, 어쨌든 머리가 두 개이거나 독을 뿜지는 않았으니까.

갈색 털의 불곰은 토파즈가 먹잇감인지 아닌지 가늠하다가 달려들었다. 땅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토파즈는 바닥의 돌을 발로 차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돌을 왼손으로 쥐고 길게 던졌다.

퍼억! 주먹만 한 돌이 불곰의 미간 사이에 정확히 직격했다. 불곰은 미간 사이에 박힌 것이 단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울부짖더니 뒤로 풀썩 쓰러졌다.

아침부터 귀찮게 하긴.

토파즈는 손을 털고 다시 나무 열매를 따서 바구니 안에 넣었다. 이 숲에는 사람이 먹어도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이 아무렇게나 퍼져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꼼꼼히 확인해야겠지만―애초에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 숲에서 나무 열매 따위를 털어먹지도 않겠지만―은둔 생활도 몇 년째인 토파즈는 대충 냄새만 맡고도 구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웬만한 독을 먹어도 며칠 앓으면 털고 일어나는 신체 덕분에 조금 안이하게 구는 면도 없지는 않았다.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부턴가 동행이 생겨 있었다. 풀숲 사이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여우였다. 토파즈는 익숙하게 나무 열매를 한 움큼 던져 주었다. 여우가 신나게 달려들어 찹찹 소리를 내며 열매를 주워 먹었다.

토파즈는 삐걱거리는 오두막 문을 열어 둔 채 안으로 들어왔다. 바구니는 식탁 위에 놓고, 항아리에서 소금에 절인 고기 한 덩어리를 떼어냈다. 마을에서 사 온 말린 곡식을 그릇에 한 주먹씩 담고 산양젖을 부었다.

제법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어젯밤 뛰쳐 들어온 불청객만 없었더라면.

“깼으면 나와서 밥이나 먹어.”

똑같은 그릇 세 개를 탁자 위에 퉁, 내려놓은 토파즈가 입을 열었다.

“…….”

“…….”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위에서 두 사람이 차례로 뛰어내렸다. 잔뜩 경계하는 것 같더니 잠을 자기는 잤는지, 어제보다는 나아 보이는 몰골이었다.

“어젯밤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웃으며 말을 걸어 온 남자는 짙은 갈색 머리칼에 약간 그을린 듯한 건강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오른쪽 귀에서 검고 납작한 마름모꼴의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법한 인상으로 웃고 있었지만, 어젯밤 시퍼렇게 뜬 눈으로 경계하던 얼굴 쪽이 훨씬 진짜처럼 보였다.

“저는 하란입니다. 이쪽은 메르디나.”

딱히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토파즈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 모를 이들의 이름보다는 말린 곡식이 눅눅해지기 전에 건져 먹는 일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바삭, 바삭, 입 안에서 곡식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안 먹어?”

멀뚱히 보고 있던 하란과 메르디나가 그의 맞은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안타깝게도 스푼은 하나뿐이었지만 여기서 투정을 부릴 정도로 생각 없는 놈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무 그릇을 통째로 입가에 대고 마셨다.

두 검사와 마법사 한 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몹시 특이했다. 특이한 만큼 수상하기도 했다. 수수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썰미가 조금만 있어도 질 좋은 옷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투며 행동거지에서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티가 났다.

자신을 하란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그릇 바닥에 붙은 곡식 덩어리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는 꼴을 봐도 그랬다. 이 숲을 헤매며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었을 리가 없으니 웬만한 인간이라면 당장 코를 처박고 바닥까지 긁어 먹었을 텐데. 저놈은 스푼 없이 저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가늠도 못 하는 기색이었다. 한심하게 쳐다본 토파즈가 제가 사용하던 스푼을 던졌다.

휙.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받아낸 하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

그릇을 향해 고갯짓하자 그가 그제야 스푼으로 남은 곡식 덩어리를 떠먹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메르디나는 이미 체념한 얼굴로 바구니 안의 나무 열매나 주워 먹고 있었다.

메르디나의 그릇에는 벌써 제 몫의 아침 식사를 다 해치운 흰 여우가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처박고 있었다. 완전히 뺏긴 모양새였다.

“이 여우는 숲지기님이 키우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누가 이 숲에서 할 일 없이 짐승 따위를 기른다는 말인가. 토파즈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제게 주둥이를 들이미는 여우를 대충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우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하란과 메르디나는 시선을 조용히 교환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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