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여기가 우리 무덤이 될지도 모르겠어.”
메르디나가 읊조렸다. 하란은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묘지와 어울리는 분위기라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었다.
숲속을 헤맨 지 수 시간째였다. 한번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곳이었다. 악명이 높아 각오는 했으나 숲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음산했다.
하늘까지 뻗은 나무들이 빼곡해 한 치 앞을 살피기 힘들었고, 숲의 초입을 지나자마자 멀쩡하던 나침반마저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골치 아픈 것은 마수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는 점이었다. 이 땅이 ‘죽음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제국에서 뛰어난 기사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두 젊은 기사는 마수들을 베어내고, 나무 기둥에 표식을 남기거나 천을 매달아 놓으며 길을 찾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행은 행운에 비해 무척 커다랬다. 첫 번째 불행은 그들이 번갈아서 업고 다녀야 하는 환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메르디나가 검에 묻은 끈적한 피를 털어내며 물었다.
“전하, 살아 있어?”
“……아마도.”
하란이 턱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하란의 등에 축 늘어져 있는 천 뭉치는 꼭 시체처럼 보였다. 메르디나가 가까이 다가가 로브 자락을 젖혔다. 환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신전 벽화에 그려진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꼭 감긴 눈꺼풀은 얇은 꽃잎처럼 섬세했고 이마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은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혈색은 좋지 않았다. 새카만 머리칼이 식은땀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메르디나가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맥이 뛰는지 확인해야 했다.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파리한 얼굴이었으므로.
하란이 환자를 고쳐 업으며 말했다.
“전하는 잘 먹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무겁지? 경량 망토 입힌 거 맞아?”
“입혀서 그 정도야.”
“나도 차라리 픽 쓰러져 버리고 싶네.”
하란은 불평하면서도 경계심을 낮추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그는 지나온 길을 되짚으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별로 소용없는 짓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방향을 잃는 숲인 것은 둘째치고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두 번째 불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왜 가야 하는지 그들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점. 추격을 피해 ‘그렌로샤 숲’으로 가자고 주장한 이는 지금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확실히 추격이 따라붙을 걱정은 없겠어. 이 숲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미친놈들은 우리뿐일 테니까.”
미로 같은 숲을 헤매다 보니 밤이 되고 말았다. 사방에는 안개까지 자욱하게 끼었다. 어느 순간부터 짐승인지 마수인지 모를 것들도 덤벼들지 않았다. 어쩐지 그게 더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어.”
하란의 판단에 메르디나도 동의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은 마도구를 잔뜩 갖고 있었다. 잘 뒤져 보면 하룻밤쯤은 죽지 않게 해 줄 만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앞서 걷던 메르디나가 멈춰 섰다. 먼 곳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빛이 보였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밝힌 빛이 틀림없었다.
“하란, 봤어?”
“…….”
“저쪽에 빛이…….”
대답이 없는 것이 의아해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목덜미에 차가운 것이 스쳤다. 메르디나가 숨을 멈췄다. 날카로운 검 끝이 목에 닿아 있었다. 한 치만 움직여도 깊게 파고들 것 같았다.
그 순간 메르디나는 설마, 하면서도 하란의 배신을 의심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란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군을 등에 업은 채 한 손으로 발검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늘 웃음을 걸치고 다니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
“……!”
제삼자가 검을 뽑고 다가오는 것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하룻밤에도 서너 명의 암살자들에게 노려지는 2황자의 호위였으며, 전쟁에도 여러 번 나가 본 기사들이었다. 이토록 적막한 숲에서 인기척도 읽지 못할 실력이라면 진작 그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누구십니까.”
메르디나가 등 뒤의 인영에게 물었다.
“내가 물을 말이야.”
등 뒤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말투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긴 그렌로샤야. 웬만한 이들은 한 발짝만 잘못 들여도 살아나갈 수 없지. 목숨이 아깝다면 돌아가는 게 좋아.”
메르디나는 단순히 발을 잘못 들인 척해야 할지 짧게 고민했으나 곧바로 그 생각을 폐기했다. 상대는 이미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다. 타인의 시선을 한순간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나뭇가지가 길게 뻗은 방향을 따라서 하룻밤 가다 보면 작은 마을이 있어.”
차분하다 못해 건조한 말투였으나, 튀어나온 말은 의외로 관대했다.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것일까. 메르디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을로는 갈 수 없습니다.”
“범죄자인가?”
검 끝이 목덜미에 가볍게 툭, 부딪혀 왔다. 맞다고 대답하면 친히 처분해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닙니다. 하지만 쫓기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메르디나가 침착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잘 벼려진 검날이 살갗을 얇게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 하란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손끝을 움찔거렸다.
“나라면 뽑지 않겠어. 내게 칼을 겨누기 전에 이 자의 목이 먼저 떨어질 테니까.”
그 목소리에는 악의도 만용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듯 담담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이 숲을 잘 아시는 분입니까?”
“난 그렌로샤의 숲지기야.”
남자가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뜻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메르디나는 목에 닿은 차가운 감촉을 외면하며 반박했다.
“그렌로샤에 숲지기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뭐, 내 멋대로 지키는 거니까.”
뜻밖에도 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 메르디나는 움직임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양손이 어깨 옆으로 올라갈 때까지, 다행히도 검 끝에 목이 꿰이는 일은 없었다.
하란은 남자의 검을 집요하게 쳐다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곧 그도 검집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내고 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수상한 자들이 아닙니다. 환자가 있어요.”
메르디나의 말에 남자의 시선이 하란의 등에 업혀 있는 천 뭉치로 닿았다.
“환자가 깨어나면 곧바로 떠나겠습니다.”
옳은 선택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메르디나는 어쩐지 이 기이한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검을 거두었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난 순간 하란이 오른손을 움직였다. 남자는 꼭 하란의 움직임을 본 것처럼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마.”
“…….”
“따라와.”
짤막하게 말한 남자가 먼저 등을 돌렸다. 조금 전 검을 겨누던 상대에게 대수롭지 않게 등을 보이다니, 조심성이 부족하거나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메르디나와 하란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힘을 합쳐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확신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지켜야 할 사람까지 있었다. 아니, 사실은 최상의 상태였더라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남자의 실력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남자는 키가 하란과 비슷할 정도로 컸다. 체격은 언뜻 날씬해 보였으나 섬세한 근육으로 군더더기 없이 짜여 있었다. 걸음이 날렵해 숲을 지나는데 부스럭 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남자는 숲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아까 메르디나가 불빛을 발견한 방향이었다. 그는 미로 같은 길을 조금도 헤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숲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종 짐승인지 마수인지 모를 것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기묘하게도 아무것도 달려들지 않았다. 누가 강자인지 이미 아는 것처럼.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듯 남자가 두 기사를 향해 돌아선 순간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며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내리쬐었다.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이었지만 어둠에 가려져 있던 서로의 얼굴을 비추는 데는 충분했다.
메르디나와 하란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숲속에 사는 유령인 줄 알았던 남자는 유령보다는 차라리 요정에 가까워 보이는 생김새였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와 단정한 콧대, 날렵한 턱선이 얼핏 보아도 눈길이 가는 미남이었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칼은 피처럼 붉었다.
손톱만큼 작게 보이던 빛이 점차 커졌다. 곧 통나무로 거칠게 지어진 오두막 하나가 나타났다. 오두막 문틈으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 사십니까?”
“그래.”
숲지기라고 자칭하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었다니. 태연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황당하다 못해 두려워졌다. 이런 숲을 앞마당으로 삼으며 사는 사람이라면 정체가 무엇이든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오두막 문짝이 곧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은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정도의 높이였다. 키가 더 큰 환자를 업은 하란은 허리를 숙여야 했다.
오두막 안은 기대보다 아늑했다. 거실과 부엌의 구분이 없는 공간에는 커다란 나무 식탁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식탁 한쪽에는 램프와 책 몇 권, 빈 바구니와 그릇, 어디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식탁 양쪽에는 통나무를 그대로 가져다 깎아 놓은 것처럼 길쭉한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뿐인 듯 다른 하나에는 옷가지와 모포 따위가 대충 쌓여 있었다. 남자는 척척 걸어가 거실 오른쪽에 달린 방으로 향했다.
“환자는 이쪽에 눕혀. 침대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책상맡의 나무 선반에는 정체 모를 것들이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하란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의 말대로 환자를 내려놓았다.
남자가 침대에 한 걸음 다가갔다. 메르디나와 하란은 동시에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남자는 천천히 손을 뻗어 환자의 이마와 심장 부근을 차례로 짚었을 뿐이었다. 환자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