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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77화 (177/177)

# 결말 -완- #

신, 악마, 인간이 한대 어우러져 싸우고 있었다. 화악, 화악! 폭풍이 몰아치고 밝은 빛과 검은 뭉치가 계속해서 충돌한다.

“좋구나! 좋아! 크하하하! 바로 이거야!”

그 사이를 번쩍! 번쩍! 금빛 뇌전이 지났다.

황제는 온몸에 흐르는 가공할 힘의 폭주를 만끽했다. 언제 또 이런 강함을 맛볼 수 있을까?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힘. 악마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황제는 연신 번을 공격했다.

콰앙! 쾅!

아슬아슬하게 번이 황제의 검을 피해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십위의 검을 주워 대충 휘둘러도 미증유의 힘이 담겼다.

“..”

번은 황제의 검을 막으며 옆에서 밀고 들어오는 샨의 공격도 막아내야 했다. 샨은 이제 목표를 바꿨다. 황제의 사지를 잘라 무력하게 만들 생각이었는지 집요하게 황제를 따라붙었다.

“죽여! 죽이라고! 죽이란 말이다!”

샨이 고함쳤다. 이 악연을 끊어내는 것은 번이 직접 황제의 목을 치는 것. 자기가 뿌린 씨를 거두는 방법뿐이었다.

“저놈을 봐! 타락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거고!”

악마에게 침식당해 황제의 두 눈동자엔 흰자가 없었다. 오직 뱀처럼 번들거리는 새까만 암흑만 번들거릴 뿐.

그 흑요석 같은 동공에 번의 모습이 비쳤다.

갈등하고 있다.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거두지 않으면 다시 기억을 봉인하고 또 얼마의 윤회를 거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영혼에 각인 된 죄와 벌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다시 만나 그걸 인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다.

무의미한가?

‘그럴지도 몰라.’

완전무결한 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 굳이 그걸 마다하고 험로를 걷는 번을 다른 신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크하하하! 죽어라! 이노옴!”

광기에 푹 담긴 얼굴로 외치는 황제를 보며 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허리로 접근하는 검을 옆으로 툭 쳐내 방향을 바꾸고 샨의 공격을 대비하려 몸을 빙글 돌렸다.

“하아.”

여러 삶을 반복하는 것에도 분명 장점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충분히 겪어보았다. 샨의 말처럼 이 이상은 그저 고집이 낳은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타락하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아이.

‘나의 업보.’

그래서 쉽게 손이 안 나간다. 원하면 언제든 취할 수 있지만 그러질 못한다. 이놈의 미련 때문에. 그리고 알고 있었다. 황제를 죽이는 순간 번은 이제 더는 자비와 은혜의 신이 아니게 될 것을 말이다.

인간을 가장 사랑했지만, 인간에게 등을 돌린 신.

어쩌면 불신不信의 신神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피하지 마라! 언제까지 무시할 셈이냐!”

황제는 짜증이 치미는 얼굴로 말했다. 당사자들이 아니라 해도 누구나 알 거다. 번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황제는 모른다. 번이 그를 죽인다는 의미는 하나의 목숨만 거두는 것이 아니다. 일신一神이 인간 전체와의 관계를 끊어내겠다는 의미다.

뭐, 이러한 것들을 황제가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미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분노와 집착에 잡아먹혔으니까.

“싸워! 나를 보라고! 나를!”

후우우우웅!

몰아친 바람이 다시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황제는 방어에 전혀 힘을 할애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격이다. 어떻게든 번을 상처입히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 간절함이 검 끝에 맺혀 예기를 더해서일까?

핏핏핏핏핏핏!

번의 피부에 빨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 샨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둘 사이를 난입했다. 몸을 쫙 펴는 그의 전신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쩌엉-!

둘을 떨어뜨린 뒤 황제를 쫓으려 하는 거다. 하지만 번이 옆으로 빙글 돌아 샨의 루트를 막았다. 황제에게 가려면 자신을 넘으라는 듯이.

“그만 좀 하라고!”

인간에 가장 가까운 신.

“병신아!”

샨은 이제 인내심이 바닥난 것 같다.

“크흐..”

충격에 밀려 뒤로 날아갔던 황제가 중심을 잡고 다시 뛰어올랐다. 한껏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더 강한 힘을 원하고 있었다.

-원하나?

“그래!”

악마가 속삭였다.

-그럼 모든 의식의 흐름을 내게 맡겨.

어둠의 힘을 100% 끌어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평소라면 악마에게 몸과 정신을 다 내어주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분별력이 없었다.

그저 더 강해지고 싶을 뿐.

“가자-아아아아아!”

황제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눈

과 귀 입에서 밤하늘 같은 새까만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그야말로 악귀의 형상이다. 그 무서운 얼굴로 번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황제.

“크흡?”

샨이 급히 팔을 들어 막았지만 콰앙! 그의 몸이 훌쩍 밀려버렸다.

그리고 이제 황제의 앞엔 번만이 남았다.

“..”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번이 신이라 해도 악마 역시 신神의 분류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악마는 이 공격 하나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막거나 피해서는 번 역시 큰 피해를 입을 상황. 이제까지처럼 대충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죽어어어어!”

번은 자신을 향해 저주와도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다가오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숱하게 보아왔을 얼굴. 몇 번을 마주했고 또 마주할.

“..”

이 순간 번은 생각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자비인가? 은혜인가? 나는 대체 뭘 찾고자 여기까지 왔는가.

“잡았다! 이놈! 크하하하하하하-!”

-됐어! 우리가 이겼다! 캬캬캬캬!

이제 황제인지 악마인지조차 구분이 힘든 그가 번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한 호흡도 안 되는 찰나에 모든 것이 결정 날 것이다.

“안돼! 번! 피해라!”

샨이 다급히 외칠 정도로 다급한 상황!

“..”

번은 입을 잠깐 열었다가 다물었다.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지만, 여유는 없다.

스윽.

번의 손이 들렸다. 그에겐 지금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느껴졌다. 모두 정지한 공간에서 오직 자신만이 사물을 인식하고 이동한다.

번의 손이 황제의 얼굴을 가득 덮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있던 시간은 다시 흐른다.

-아, 안돼!

악마의 당혹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퍼엉-!

-폐하아아아아아!

-크흑!

-피하십시오!

딘딘, 집정관, 은사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성녀의 뾰족한 음성도 들려왔다.

푸스스스..

먼지같이 작은 알갱이로 폭죽처럼 거짓말같이 터져버린 황제의 머리. 그의 몸속에 깃들었던 어둠 역시 바람처럼 흩어졌다.

번은 결정을 내렸다.

“잘했다! 잘했어! 드디어 끊어냈구나!”

샨이 외쳤지만, 번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죄를 거두었으므로 벌 또한 거두어지리라.”

신의 망치가 일곱 가지 색의 후광을 입고 말했다. 그의 눈은 티끌 하나 없이 하얗다.

“천존이시어.”

샨이 무릎을 꿇었다. 신의 망치의 몸에 강림한, 99신 중에 가장 위대한 존재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

하지만 번은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그런 번에게 신의 망치가 다가섰다. 그의 손에는 빛으로 뻗어 나온 거대한 둔기가 들려있었다.

신의 철퇴다.

이제 껍질을 벗고 불멸자의 삶으로 돌아갈 순간이 왔다.

“어땠는가?”

신의 망치가 물었다. 번은 아주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쁘진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가?”

묘한 얼굴로 끄덕이는 신의 망치.

“이제 가세나.”

더는 신들이 인간의 일에 개입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인간은 그저 인간들끼리 어울려 살아가며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

번이 한걸음 물러섰다. 그 뜻을 알 수 없음에 갸웃하는 신의 망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가?”

“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정하지 않았나? 자네 손으로 뿌린 씨를 거두었잖나?”

“나를 위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게 녀석이 편히 영면하는 길이라 여겼다. 번이 윤회를 거듭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그 녀석 역시 저주와 같은 삶을 반복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거뒀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집착이자 번의 욕심에 기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겼기에 말이다.

“멈추지 않겠다는 건가?”

신의 망치가 무지개처럼 빛을 뿌렸다.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이 눈 부시다. 번이 원한다면, 그리 하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평온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

번은 대답 대신 저편을 본다.

흠칫.

성녀가 번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떨었다.

저벅.

번이 발걸음을 뗐다. 그녀를 향해서.

“무슨 짓이야!”

샨이 외쳤다. 하지만 번은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성녀를 향해 일정한 걸음으로 나아갈 뿐.

“이이익! 너 설마!”

샨이 급히 번의 뒤를 따르려 하는데 그의 팔목을 누군가 움켜쥐었다.

“왜 말리십니까?”

신의 망치다. 샨이 미간을 구기며 묻자 그가 답한다.

“그의 의사를 존중하게.”

“존중이라니! 저 녀석!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 또한 그의 선택이라네.”

신神.

완전무결하지만 그래서 정靜적인 존재들. 그러나 번은 달랐다.

마치 인간처럼 헤맨다. 그 자신이 무엇을 찾아 떠도는지조차 모르면서.

그렇게 모두가 번을 지켜볼 때 성녀의 앞으로 걸어간 그는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겠나?”

그 목소리에 성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 손을 잡으면 다시는 신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사실이리라.

신의 여자.

그저 목소리만 전하고 뜻을 전파하던 그런 것이 아닌 진짜 그의 여자가 되는 거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가..”

번 역시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강요하지도 않는다.

욱씬!

그 미소를 본 성녀의 가슴이 아렸다.

번은 다시 걷는다.

“잠깐만요!”

등을 돌리는 그를 향해 성녀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죠?”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 사람들을 훑었다.

성녀, 은사, 집정관, 딘딘..

“..”

번은 그렇게 다시 걸었다.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성녀는 이미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인간의 곁에 있을 것이다. 지켜보고 함께하며 고민하고 투쟁할 것이다.

번.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 자리한 신.

“괜찮겠습니까?”

멀어지는 번의 뒷모습을 보며 샨이 묻는다.

“지켜봐야지.”

“다 끝났는데 왜 고통을 자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믿는 것이겠지.”

신의 망치는 이제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약한 인간의 몸에 무한정 강림할 순 없으니까.

그가 번의 등을 보며 손을 뻗었다. 다시 먼 길 떠나려는 벗에게 작은 선물하나 하고자.

번쩍!

시간과 공간을 조율하는 천존.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언젠간.. 자네가 원하는 답을 찾길 바라네.’

모두가 신이 되려 할 때 홀로 인간이 되고자 자처하는 존재.

빙긋.

천존은 뜻 모를 미소로 그렇게 배웅했다.

.

.

.

“..아?”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명우야! 정신이 들어? 엄마 보여?”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정신만 차리면 된다. 부러지고 깨진 곳은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으니까.

“엄..마?”

“아아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으흐흐흐흑!”

엄마는 명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아들이 의식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뭐가 어떻게..”

명우는 이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한바탕 어떤 요란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 차에 치었어! 죽을 뻔했다고!”

“차에..”

명우는 중얼거렸다.

“어머님.”

의사의 목소리에 간호사가 엄마의 몸을 부축했다. 치료를 해야 한다. 의식이 돌아왔을 뿐 아직 위중한 상태다.

“이겨내자. 엄마가 밖에 있을게. 알겠지?”

자신의 손을 꼭 쥐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며 끄덕였다.

그리고 이때.

“..?”

뭔가가 명우의 머리를 스쳤다.

바르르..

몸이 떨렸다. 소름이 돋았다.

“..!”

작살에 맞은 것처럼 눈을 뒤집고 떨어대는 명우의 모습에 의사가 급히 말했다.

“쇼크다! 맥박 채크해!”

간호사가 엄마를 다급하게 끌고 나갔다.

“명우야! 명우야아아아아!”

엄마가 애절하게 외쳤지만 지금 명우에겐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른 목소리가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신이 없는 그곳에서 자네가 원하던 답을 마음껏 찾길 바라겠네.

스스스스스..

의식이 확장한다. 뇌는 폭발할 것 같이 요동쳤고 그사이 망가진 육체가 아문다.

“이.. 이게?”

의사가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꺄악!”

간호사들도 놀라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두둑, 우둑.

부러진 뼈가 맞춰지고 찢어진 피부엔 매끈하게 새살이 돋았다.

기적!

“말도 안 돼..”

쇼크로 심장이 멈출 것을 대비해 제세동기를 손에 들고 있던 의사는 자시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이윽고.

“..”

그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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