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76화 (176/177)

# 지독히 개인적인 #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않아.”

대한민국에서 설명우로 살았던 삶.

매일매일 이어지는 혹독한 공부와 아침 일찍 일어날 때마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이 괴로웠었지만,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다. 그래, 어쩌면 모든 삶이 그러했다. 새로 태어나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보는 기분도, 거미로 태어나 형제들과 아웅다웅 엉키며 놀 때도.. 나쁘지만은 않았던 거다.

배부르게 먹고 초원에 널브러져 낮잠을 즐기던 날의 기억도 좋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꿈을 가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저 하늘로 비상할 수 있을 거야. 몸이 좀 더 자라면 둥지를 벗어날 수 있겠지! 라며..

그러한 것들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런 모든 삶 중 느낀 것이라면 인간이 가장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먹고 자는 것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존재.

그래서 번은 믿으려 했다.

변할 수 있다고. 변할 거라고.

언젠가는 기어코 답을 찾아내는 것도 인간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답답한..!”

샨이 울컥했는지 번개를 휘두르며 번에게 뛰어들었다.

번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콰앙!

폭음이 터졌다. 마치 소형핵폭탄이 터진 듯 엄청난 충격이다. 데구루루 밀려나며 벽에 처박히는 황제. 건물이 무너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간다. 그는 무의식중에 옆을 더듬다가 만져지는 촉감에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딘.. 딘.”

“폐하..”

황제는 딘딘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너무 허탈하면 되레 이렇게 된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미안할 게 뭐 있나.”

다리를 잃은 딘딘은 이제 전처럼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아니, 몸보다 마음이 더 크게 다쳤을 거다. 제국의 검을 꺾고 대륙 최강의 사내라는 위명을 얻은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번의 상대도 되지 못했으니까.

“어떤 선수들이 참가했는지도 모르는 판에 뛰어든 내 탓이지.”

“폐하께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을 뿐입니다.”

“사람 새낀지, 짐승 새낀지 알아보고 거르는 것도 내 책무의 하나야.”

설마 그게 신이리라곤 생각 못 했다.

“그때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콰앙! 쾅!

사방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땅이 푹푹 꺼지는 것도 모자라 쩍쩍 갈라지고, 대기가 요동쳤다. 저런 건 누구도 못 한다. 그야말로 신들의 싸움. 황제는 허망한 눈으로 그 싸움을 지켜보다가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

“폐하를 지켜라!”

은사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땅밑을 뚫고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기습에 딘딘은 황제의 팔을 잡고 급히 뛰었고, 십위는 무기를 꺼내 들고 모여들었다.

은사가 1초만 늦게 알아차렸어도 황제는 죽었으리라. 그만큼 완벽한 공격이었고, 날카로웠다. 번의 칼끝이 황제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으니까. 그건 아슬아슬하게 갈비뼈 사이에서 멈췄다.

“크윽..”

낭패한 얼굴로 바닥에 처박히는 번을 보며 황제는 쓰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순식간에 은사가 번의 목에 칼을 겨눴고, 딘딘이 번의 뒤에 서며 도주로를 차단했으며 십위가 에워쌌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목이 싹둑 잘려 떨어질 상황.

“처음부터 네놈의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뭘 하며 지내고 있느냐?

-현자의 서를 읽고 남은 시간 틈틈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허! 현자의 서라? 어디까지 읽었느냐?

-69권입니다.

번의 칼에 찢긴 가슴의 피도 닦을 생각하지 않고, 황제는 발로 번의 가슴을 지르밟으며 말했다.

“너는 이 애비를 존경하지 않지?”

“······.”

번은 어금니를 악물고,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핑핑- 돌아가며 이 순간을 모면할 방법을 계산 중이었다. 분명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은사가 번의 예상보다 훨씬 더 예민했던 거다.

황제는 번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 주둥이로 말해봐라.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나? 널 인정해줄 도구? 네 알량한 재능을 칭찬해줄 어른?”

“······.”

번이 대답하지 않자, 황제는 은사의 검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번의 배에 쑤셔 박았다.

“······!”

“폐하!”

다들 놀랐지만, 황제는 잔인하게 웃었다.

“이놈 보라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아.”

말과 함께 손잡이를 쥐고 비트는 황제.

“변명이라도 해보지?”

“끄으..”

고통은 차단했지만, 칼이 뱃속을 뒤집는 기분은 절로 신음이 비집고 나오게 한다.

“폐하..”

딘딘이 황제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칼끝이 번의 심장을 향해가고 있는 걸 느낀 거다. 하지만,

“······.”

스윽 돌아보는 황제의 눈을 보며 딘딘은 손을 멈췄다.

살기殺氣.

번을 살려둘 생각이 없는 황제의 의지가 전해졌다.

‘그래, 차라리···. 이편이 좋을지도.’

언제나 냉철하고 장난스러우며, 그러면서도 강인했던 분이 번과 엮이면 항상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끄덕. 딘딘은 물러났다.

‘이제 끊으십시오.’

아비가 아들을 죽이는 이 순간을 세상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저기 은사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알기 때문이다. 혈육의 도리와 나라의 미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당연히 내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게다가 번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된다고 하면, 빼도 박도 못할 일. 이전엔 그저 심증뿐이었지만, 아까의 기습으로 모든 게 증명되었다.

“말해보라니까?”

황제는 번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숙였다. 그러면서 검을 잡아뺐다. 쑤욱 뽑히는 동시에 밀려오는 어떤 무력감에 번은 입을 연다.

“당신이..”

목이 메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힘겹게 땐다.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밀어낸 게 아니다.”

“······?”

“네가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보며 욕심에 사로잡힌 거지.”

“무엇이 욕심이란 말입니까? 나는 그저 살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둘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과연 그럴까?”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번을 노려보았다.

“너는 2황비와 7황비를 제거했다.”

“그건 그들이..”

“결과만 보면 되는 일이야. 이번 일 역시 네가 성공했다면 나는 죽어 있겠지.”

황제는 비웃었다.

“실패했지만, 네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

번은 부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신전을 나가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성급했다. 집정관과 스캇이 합류하고, 4만의 징집병을 이끌기 시작하면 뚫지 못할 테니까.

“처음부터 당신은 내게 황좌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움직인 것뿐. 이것이 잘못입니까?”

“나도 지킨 것뿐이다.”

황제는 번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황위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에비뉴의 절대자로 살고 싶었다. 그 뒤의 일은 어찌 되든 상관없지 않나?

“전에 말했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고. 너는 이번에도 나를 다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게.”

황제가 검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마지막을 예감한 듯 은사와 딘딘이 자세를 잡았고, 십위가 눈을 빛낸다.

“네 죽음을 불렀다.”

쯧, 혀를 차며 황제는 번을 잠깐 바라보았다.

사실 황제도 번의 재능을 아꼈다. 죽이긴 너무도 아까웠고, 어디까지 성장하나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콩가로 보냈고.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

이때였다.

바스락.

십위 하나가 저쪽으로 순식간에 뛰어갔다. 그리고 그쪽에서 뾰족한 비명이 울렸다.

-안돼요!

성녀였다.

집정관이 그녀를 향해 뒤쪽에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내게..”

황제가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번의 가슴에, 정확히 심장이 있는 곳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안되는 건 없다.”

-꺄아아아아악!

번의 죽음을 직감한 성녀의 비명이 울려 퍼질 그때!

화악!

번의 몸에서 빛이 터졌다.

“······!”

“..크흡?”

“폐하!”

황제는 분명 느꼈다. 검 끝이 번의 심장을 쪼개는 것을 말이다. 성녀는 커녕 신이 와도 이건 못 살린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경우는 그 역시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콰르르르르르르..

번을 감싼 공기가 끓어오른다.

피가 줄줄 흐르던 상처는 온데간데없고, 옷과 머리칼이 태풍을 만난 듯 휘날렸다.

파아아앗!

번의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은 10미터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 과정에서 황제가 잡고 있던 칼이 터져나가며 살기에 반응해 그들을 난자했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누군가의 배를 갈랐다.

스윽. 번은 일어섰다.

그렇게 잊힌 기억이 죽음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밀어닥친 과거의 악몽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자비.

은혜.

99신 중 가장 인간을 사랑했던 신.

“크, 크윽! 네놈..!”

황제가 분노한 눈으로 치를 떨며 외쳤다.

“······.”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여 기억을 모두 봉인하고, 자식 대신 벌을 받길 택한 가련한 신.

“넌 대체 뭐냐아아아아!”

번이었다.

.

.

조금 전 일을 떠올리던 황제.

그의 귓가에 누군가 속삭이듯 말을 건다.

“억울해?”

흠칫!

“억울하지?”

옆에 있던 딘딘의 목소린 아니었다. 이상함을 느껴 옆을 돌아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덜미가 놈의 손에 잡혔기 때문이다.

흐으으..

놈의 벌어진 입에서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황제는 이어지는 놈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힘이 필요하지 않아?”

황제의 뒤에 착 달라붙은 수상한 놈을 보며 딘딘이,

“폐, 폐하..”

옆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우뚝 멈춘다.

까드드득, 까드득.

놈의 앙상한 손가락들이 황제의 목을 좀 더 강하게 쥐었기 때문이다. 위협이었다.

“네가 원하면, 힘을 주마.”

해골의 모습을 한 악마.

그가 지금까지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다가 황제에게 튀어온 거다. 패륜, 반역, 전쟁, 싸움, 질투, 혼돈은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것.

“저놈을 죽이고 싶지 않나? 인간들 노는데, 신이 간섭하면 안 되잖아? 이건 불공평한 거라고.”

악마의 말은 달콤했다. 그리고 지금 황제는 그런 달콤함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현실이 너무 써서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내가 뭘 하면 되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도 묻지 않는다.

“그저 나를 받아들이면 돼.”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건? 내 영혼이라도 필요한가?”

“없어! 전혀!”

악마는 달콤함을 더욱 가미해 외친다.

“저놈만 죽이자고.”

악마의 검은 혀가 길게 나와 살랑거렸다.

“너와 내가.”

할짝. 혀가 귓불을 핥을 때, 황제는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대답했다.

“하지.”

옆에서 딘딘이 흐느끼듯 말했다.

“폐하.. 안 됩니다.”

딘딘에겐 보였다. 절대 상종 말아야 할 어둠이 황제의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폐하..”

간곡한 목소리로 말려보지만, 이미 황제는 마음을 정했다.

“하려거든 어서.”

황제의 말에 악마는 크크크! 웃으며 말했다.

“마음 편히 받아들이라고.”

스스스스스..

황제의 등에 업히듯 달라붙는 악마는 마치 여름 햇살에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황제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흐으으..”

괴로운 듯 치를 떨어대는 황제에게 목소리가 들렸다.

-거부하지 마.

황제는 사지를 벌벌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이 개입한 싸움, 이미 판에 뛰어들었으니 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 또한 신의 힘을 가지는 것.

그것이 비록 악惡이라 할지라도.

번뜩!

떨림이 멎었다.

해골의 모습을 했던 악마는 어디에도 없었고, 황제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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