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개인적인 #
“과연! 범상치 않은 놈이로구나!”
신의 망치는 알고 있었다. 본래는 탑이 동강 났어야 할 공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절반만 부서진 것은 저놈이 막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어둠을 품은 놈들은 성력 충만한 저 망치에 담긴 기운에 노출만 돼도 바싹 타버린다. 그런데 저놈을 보라. 별 피해도 없어 보이지 않나? 그만큼 대단한 놈이라는 뜻 아닌가!
“이노노옴! 이것도 한번 막아보아라!”
그는 다시 한번 망치를 크게 휘두르며 탑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런데..
“기다려.”
너무도 손쉽게 번의 아귀에 잡혀버리는 망치.
“······?”
이럴 순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네 차례가 아니야.”
번은 그리 말하며 손을 뿌리쳤다.
“크흡!”
신의 망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주르르륵 미끄러졌다. 그러면서 본다.
‘이.. 무슨..?’
주변은 피가 낭자했다.
비릿한 혈액 냄새도 모자라 시큼한 오물 냄새도 났다. 이렇게 사람 몸속에 있어야 할 것들이 밖으로 나올 상황은 몇 안 된다. 이런 건 보통 전장이나 맹수 우리에서 나는 냄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는 빠르게 주변을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조금 전 일어난 사건을 알아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게다가 저놈.’
허虛했다.
마왕이라던 놈은 어디 가고, 저런 기운을 품은 놈이 떡하니 있나?
지금 번이 보이고 있는 힘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어떤 능력도 아니었다. 수많은 삶을 겪으며 학습한 스킬도 아니고, 오색 마나도 아니었으며 빛의 힘도 아니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성력. 하지만 팔라딘이나 사제들이 쓰는 그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그런 힘!
그래, 본질이었다.
오직 신神에게만 허락된 권능. 그것이 지금 번을 통해 구현되고 있었다.
“끄으으으..”
한 남자가 피투성이 얼굴로 바닥을 기었다. 머리가 깨진 것 같다. 왈칵, 다시 정수리 쪽에서 뿜어진 피는 오른쪽 눈두덩이를 타고 흘렀다.
“아니야.. 이럴 순 없어..”
그는 더럽고, 일그러진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거짓말이야..”
모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그를 아는 사람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본다고 해도 믿진 못할 거다. 대 에비뉴의 황제가 이런 모습으로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그랬다. 황제였다.
그는 먼지 묻은 피가 눈으로 들어가자 시큰한지 머리를 부르르 털어냈다. 그 사이 주변에 널린 어떤 것들의 파편을 본다.
저건 은사의 팔이다. 비록 볼품없이 돌 틈에 끼어 있었지만, 그의 것이 확실했다.
“······.”
저쪽에 있는 것은 딘딘의 다리다. 그나마 이 둘은 수행이 높아 목숨이라도 건졌지 십위는 시체조차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나?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남자까지 이긴 딘딘을 흡사 어린애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큭, 큭큭큭..!”
사람이면 못하겠지. 그러니 어처구니가 없는 거다. 신神이 대체 인간의 삶에 왜 참견하는가!
황제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기둥에 상체를 기댔다. 그의 열 걸음 앞에 번이 서 있었다.
“기분이 어때?”
이런 엿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리 내려보고 있으니, 즐겁나? 통쾌해?”
황제가 비아냥댔지만, 번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번의 머릿속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폭풍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힐끔.
저쪽으로 번의 시선이 움직였다. 기둥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성녀가 보였다. 그녀는 감히 다가오지도 못한다.
-안돼요!
조금 전.
번이 은사에게 발각당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때 번의 뇌를 구속하던 어떤 사슬이 투투투툭 끊어졌다.
그리고 알았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깨우쳤다. 대륙의 99신 중에 자비와 은혜를 담당하던 신 번. 오래 전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
성녀를 바라보는 번의 눈이 여러 감정으로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래, 저 얼굴이었다.
신이 아닌 인간을 사랑한 죄였을까?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외형은 인간의 그것이었지만, 그 속은 악마보다도 독했고 음험했다. 어미를 죽이고, 아비의 힘을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도 번은 아들을 죽이지 못했다. 녀석의 죄를 모두 떠안고, 벌을 받았다.
억겁의 윤회.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고통뿐인 삶. 그것이 그가 받은 환생이란 이름의 징역이었다.
신이었지만 무력하게 벌레에게 잡아먹히고, 미물이 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토끼로 태어나 여우에게 산채로 뜯어먹혀도 그의 벌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번은 질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한땐 연인이었고, 한땐 아들이었고, 한땐..
“하..”
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옛날 벌을 받기 전에도 이런 상황이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라. 네가 뿌린 씨, 너의 손으로 직접 거두라.
번의 마음속에서 울컥 파도가 일어날 때마다 그의 기운이 태풍에 휘날리는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인간이었다가 신의 모습을 갖추기도 하고 다시 지독하게 허虛한 상태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지. 네놈 나이에 불가능한 것들을 척척 이뤄갈 때, 이놈이 내 자식이 맞나? 몇 번이나 의아했거든. 그런데 이제야 알겠어. 처음부터 장난질에 놀아난 거야.”
황제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번이 인간의 탈을 쓰고 유희를 즐긴다 여겼다.
고작 그 정도라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 번은 쯧, 혀를 찼다.
황제가 그런 번에게 물었다.
“이 게임에 걸린 게 뭔가? 얼마나 대단한 놀음을 하기에 신이 직접 나서는가?”
번은 씁쓸하게 웃었다.
“게임이라..”
그때였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그긍!
쾅! 콰앙!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여든 먹구름은 온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고, 황제는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말해봐라!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으면 대체 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는가! 너희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모르겠냐는 말이다!”
전능한 네놈들이 모든 걸 다 하면 될 것을 왜 미숙한 인간들을 세상에 풀어놓아 힘들게 하나? 이래서 신이 싫다. 저 높은 곳에서 히죽 비웃으며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다그치는. 이럴 거면 차라리 통치를 하지!
“흐으으..”
화가 복받치는지 신음을 삼키며 번 쪽으로 기기 시작하는 황제. 그는 모르고 있다. 이 분노가, 설움이,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이 현실이 무력하고 비참하다 여길 뿐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인과와 과거의 흔적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번을 보면 화가 났다. 잘해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애처럼 투정을 부릴 때도 있었다.
질투.
그래, 언젠가 스캇이 생각했던 대로 질투가 맞다. 아주 원초적이고, 사람다운. 아들이 아비에게, 아비가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것이 맞물려 운명이란 이름으로 또 한 번 번에게 요구했다.
과거의 아비와 어미, 자식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흐으···. 말해.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번의 다리를 붙잡으며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아대는 황제를 내려보며 번은 괴로운 듯 미간을 구겼다.
“······.”
신의 혈통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각인된다. 이 녀석은 어떤 모습이든 뭘로 태어나든 지금처럼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거다. 사슴이었다면 우두머리가 되었을 거고, 범이었다면 산의 지배자였을 것이며, 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몇 번은 고양이 콧등을 물었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재능은 인간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고, 이 세계에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둬야 한다.
지금만 해도 황제는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혔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 할 것이니까.
자비가 낳은 괴물.
은혜를 기대했건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우르르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번쩍!
그러면서 벼락이 쳤는데, 그건 단순한 대기 작용이 아닌 어떤 메시지였다.
「이제 충분히 알지 않았나?」
지금까지 수없이 듣던 그 목소리.
머리가 단단해졌습니다, 성분을 흡수합니다, 무슨 무슨 능력을 얻었습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신의 목소리였다.
번의 선택을 반대하던, 과연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겠다던 그들의 신언神言이었다. 성녀 또한 이걸 진즉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번의 몸속에 여러 신이 함께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관조자이자 조력자이며 관중이 되기도 했고, 이젠 심판관이었다.
「인간에게 뭘 기대하는 건가? 그토록 떠돌았으면 이제 느낄 때도 됐지 않나?」
구르르르르릉!
쾅쾅!
벼락은 번의 미련함을 꾸짖듯 무섭게 떨어졌다.
그러다가,
콰앙!
뇌전 하나가 번의 바로 옆에 떨어져 내렸다.
“······.”
파지직 하고 사라져야 했을 곳에 사람 형체 하나가 남았다.
“샨..”
번이 신음했다.
동생 샨이 벼락을 뚝 끊어 손에 쥔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전생에 원수가 현생의 부부가 되고, 현생의 악연이 다음 생의 부자父子지간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인맥이 좋고 외향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60억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연을 맺을까?
처음부터 정해진 거다. 내가 만날 사람, 내가 마주칠 사람, 내가 사랑할.. 내가 죽일.. 혹은 죽인 사람이. 결국, 돌고 돌아 그것들은 내게 다시 오게 된다. 이것이 윤회. 번이 만났던 모든 동물과 인간들이 다 그 카테고리에 있었다.
이것은 아들이 태어나고부터 시작된 일. 윤회에 잡아먹히지 않아도 되는 신이 이걸 끊어내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제 그만 끝내.”
샨이 말했다.
녀석은 동생의 모습을 했지만, 번이 알던 그 어린 샨이 아니었다. 아니, 태초부터 알던 사이였으니 어쩌면 더 친숙할지도 몰랐다.
바다의 신 샨.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물로 씻어 끌어안고 포용하는 녀석과는 예전부터 잘 맞았다. 세상에 정화와 풍족함을 선물하는 바다. 하지만 그런 바다가 화가 나면 아주 무섭다. 어떤 배도 집어삼키며 수백 미터 해일로 해안을 때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샨이 그러했다.
성난 바다의 목소리로 외쳤다.
“미숙한 피조물 하나 때문에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는가!”
호통이다.
“정신 차릴 때도 됐지 않은가!”
샨의 몸에 강림한 탓에 온전한 힘을 사용하진 못하지만 신은 신! 그 호통만으로 주변 대기가 터지며 충격파가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갔다.
“흐으으읍!”
번의 발목을 잡고 있던 황제가 그 여파에 떠밀려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꺄악-!”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성녀도 기둥을 때리는 돌과 흙에 몸을 웅크렸다.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번은 묵묵히 굳은 얼굴로 샨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부족해? 그래서 그를 보호하나?”
조금 전 번이 황제를 보호했다는 것을 느낀 샨이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바람 속에 섞인 돌이 그의 머리를 반쯤 부숴놓았을 거다.
“얼마나 더 미련하게 똑같은 짓을 반복해야 직성이 풀리겠나!”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번은 똑같이 황제에게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미 예견된 일이다. 역사는 곧 다가올 미래이기도 하니까.
“나는..”
번이 샨을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