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74화 (174/177)

# 대치하다 #

어떤 대답을 해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순 없을 것 같았다. 이제와 황제의 편을 들어 에비뉴를 돕는다고 해도 신성국의 군대가 지척까지 온 이상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를 배척하자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

가루비가 답하지 못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며 모두가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콰과과과과과광-!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진동과 함께 폭음이 터졌다.

-허업!

-설마 여기까지?

-불입니다! 불이 났습니다!

-어서 나가보아라!

푸스스.

먼지가 떨어지고, 사람들은 혼란과 공포에 점철된 얼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들이 차기 시작한거다.

후욱-!

메케한 냄새와 함께 자욱한 연기와 불길이 사방에서 넘실대자,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사제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하지만 이 와중에도 황제는 성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황제는 기어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태도였지만, 가루비는 머리를 흔들었다.

둘의 눈치를 보던 장로들이 조용히 채근하기 시작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기둥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어서요!”

“여긴 위험합니다.”

장로들이 성녀의 몸을 부축해 피신하려고 하자, 황제가 버럭 외쳤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대답하라! 성녀!”

당장에라도 뛰어들 것 같이 고함을 질렀지만, 옆에서 은사가 빠르게 움직인다.

쿠웅!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을 쳐내며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폐하.”

대체 어디를 어떻게 흔든건지 몰라도 건물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리 초인 반열에 오른 은사나 딘딘이라도 재수 없으면 깔려 죽는다.

“..대답하라!”

딘딘이 황제의 팔을 잡고 잡아끌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저쪽으로 멀어지는 성녀를 향해 외쳤다.

“대답하라고-!”

그의 집착 섞인 외침이 신전을 가득 맴돌아 퍼지고 있었다.

.

.

.

어둡고 답답한 공간.

지네 같은 것들이 귓가에서 기어 다니고, 아주 습했다. 절로 소름이 끼치는 곳이었지만, 여기 그 누구도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았다.

“잘 들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번은 231명의 발키리들을 보며 말했다.

신전 지하 통로가 좁아 이것도 한계였다. 과거 번이 어렸을 때 혼자 염탐하려고 뚫어놓은 길을 급하게 넓힌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더 많은 수를 데려왔으면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이 인원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신전의 주요 인물들 몇만 사로잡는다. 절대 죽이면 안 돼. 알겠나?”

“네!”

“주의하겠습니다!”

수도는 페트릭이 맡아 혼란을 극도로 끌어올릴 것이다.

“성물 따위는 버린다. 욕심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넵!”

그 사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챙길 걸 챙겨야 했다.

“다루.”

“네, 태자님.”

“너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만일 내 명령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면, 네 임의대로 판단해서 조치하도록 해.”

대답 대신 맡겨 달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다루를 보며 번은 신호를 보냈다.

‘가라.’

‘예! 태자님! 강녕하세요!’

잠시 후.

번을 제외한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약 40여 분이 지난 시점에서 번은 생각했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해.’

폭발로 일으킨 수도의 혼란은 금세 안정될 것이다. 에비뉴가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숨어있는 황제를 끌어내고, 약간의 시간을 벌고자 행한 일일 뿐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 번은 어둠 속에서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구구구구궁!

“······!”

지하까지 울림이 전해질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됐어.’

신전을 부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론 신성국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는데, 아무래도 그놈들의 수작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을 아주 단순하게 이어보면 쉽다. 그놈들이 원하는 게 뭘까? 놈들은 제국과 에비뉴의 전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종교전쟁이지.’

그놈들의 목표는 제 놈들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세를 가진 가이아 교단을 치려는 것이 아닐까? 란 결론에 도달했고, 놈들이 오기 전에 놈들의 할 일을 없애버릴 속셈으로 여길 박살냈다. 삭초제근이라고 하나?

‘네놈들도 선택해야 할 거다.’

지금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손가락 빨고 있었을 땐 강요할 수 없었다고 해도 이렇게 난리통인 타국의 수도에 들어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태자님! 태자님..!”

다루의 목소리다.

“······?”

원래의 계획이라면 다루는 성녀를 찾아가야 했다. 성녀의 신변을 확보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것이 약속 아니었나?

“무슨 일인가..?”

다루는 여기 와선 안 된다. 그런데도 그녀가 돌아왔다는 건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

“크, 큰일 났어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급히 외쳤다.

“여, 여기 황제 폐하가 계세요!”

“뭐?”

머리털이 곤두서며 핏기가 싸악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핑핑- 뇌가 가동하기 시작한다.

‘황제가 여기에?’

“은사나 딘딘은?”

“집정관과 십위까지 모두 다 있다고 해요!”

“염병..”

일이 꼬여도 아주 단단히 꼬였다. 수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로 예상은 했지만, 왜 하필 여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모를 땐 눈앞이 까맣다가도 결과를 알고 나면 시야가 화악 밝아지는 법. 신전이라면 궁에서도 가깝고, 사람들 눈을 피하기에도 좋다. 물론 황제쯤 되는 사람이 전혀 소문 없이 몸을 숨기긴 어려웠겠지만, 누군가 도왔다면 그리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으음.”

번은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그들이 바로 궁으로 향하진 않을 거야. 너는 당장 신전 밖으로 나가 소문을 퍼트려라.”

“어떤 소문이요?”

“신전이 제국의 용병들에게 공격받았고, 황제가 여기에 의탁하고 있었다고.”

“아.. 혹시 신성국의 군대를 이쪽으로 향하게 하시려고요?”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쩔 수 없지. 차라리 맞불을 놓는 게 좋겠어.”

“그럴게요. 태자님은 여기 계실 거에요?”

“일단 동태를 지켜보겠다.”

“알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아니, 오지 말고 너는 페트릭과 합류해 부대를 이끌어. 황제가 나타났다면 성녀는 에비뉴를 당장 떠나진 않을 거니까.”

다루는 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조심하세요..”

말했다.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번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끄덕여주었다.

다루가 떠나자, 번은 벽에 귀를 바짝 가져갔다. 그러면서 몇 가지 능력을 개방하기 시작한다.

-..어서 불을 꺼!

-일단 대피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가긴 어딜 가! 결정이 안 났잖아, 결정이! 성녀님은 어디 계시느냐..?

위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것보다 더 많은 발자국 기척도 느껴졌다. 한마디로 위는 지금 개판이란 거다. 당연하다. 100개가 넘는 폭탄이 한 번에 터졌으니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어디냐.’

번은 눈을 감고 차분하게 기다린다. 사제들의 목소리는 들어도 거른다. 그가 찾는 것은 하나.

‘어디에 있는 거냐.’

황제다.

여우가 신전에 숨어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손쉬운 작전을 세웠을 것인데, 그것이 아쉽다. 더구나 은사, 딘딘, 십위가 곁에 있다면 정면 승부는 힘들 것이다.

“······.”

그래도 한 번의 기습 정돈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대혼란 속에선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슬며시 드는 욕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10분.

-성녀님은 아직도 어디 계신지 모르오?

-모르겠습니다. 아마 안전한 곳에 피신해 계시겠지요.

20분.

-그런데 폐하께선 어디로 갔습니까?

-그분이 여기 계셨다는 것도 몰랐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30분이 지났을 무렵.

번의 귀에 솔깃한 얘기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다시 7황비가 계신 곳으로 갔다지요?

-봤다는 사람이 있소이다.

-흐음, 이거 온통 난리이니 큰일이오. 신성국의 군대까지 북문에 도착했다 하던데.

‘7황비..’

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기 있었던 거냐?’

유배당한 7황비라면 황제가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승낙했을 것이다.

‘한 방 맞았군.’

번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스스..

그의 감은 두 눈 위 이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없던 주름이 생기더니, 그것이 벌어진다.

깜빡. 깜빡.

삼안三眼의 발동이었다. 비록 몸속 어둠은 모조리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삼안은 기능을 해주고 있었다. 전처럼 주변의 어둠의 기운을 포착하진 못해도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는 있었다.

‘저쪽인가?’

위를 향한 번의 세 번째 눈엔 지상의 저 멀리 이어지는 구조물이 보였다. 7황비가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주지 않는다면 직접 계승하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번이다.

살랑.

저 탑 언저리에 여우 꼬리 끝이 보이는 듯했다.

바바바박.

흙을 파내는 그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

.

“저기 있군.”

말을 탄 사내가 성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1만의 신의 사자가 도열하고 있었다. 순백의 갑옷과 백마를 탄 이들의 위용은 대단했는데, 그 어떤 군대보다 깨끗하고 청렴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물러서시오! 아무리 신성국의 사자라고 해도 허가 없이 들어올 순 없소!”

수도가 난리여도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오늘도 제구실을 충실히 해주고 있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도 굳건히 서서 1만의 군대를 막아섰다. 물론 성벽 위에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궁수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수도 곳곳에 지원을 나간 탓에 그 수가 일백이 안 됐다.

“부관.”

신의 망치라 불리는 사내.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남자가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예!”

“뒤를 맡아라.”

“넵!”

그게 끝이었다.

-끼히히히히히힝!

그가 탄 말이 번쩍 앞다리를 들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성문을 향해 튀어나갔다.

“허, 허어업! 멈추시오!”

문지기는 몸을 휙! 돌리며 버럭 외쳤지만, 그도 성벽 위의 궁수도 차마 공격명령을 내리진 못했다. 1만의 신성국 군대가 앞에 있는데, 감히 신의 망치에게 활을 쏘겠는가?

“부대!”

신의 망치가 성문을 통과하자, 부관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명神命! 출出!”

“출!”

“출!”

팔라딘들이 든 망치가 하얗게 발광했다. 그 빛이 어찌나 강하고 아름다운지 주변 2km까지 뻗어 나갔다.

-머, 멈추..

문지기의 허탈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신성국 군대는 이렇게 성벽 안으로 들어왔다. 신의 말씀을 수행하는 그들에겐 세상에 그 어떤 장애물은 없었다.

‘악惡 따위가 신전에 잘도 숨어들었구나.’

수도를 가로질러 신전 초입에 들어선 사내는 쿡쿡 웃었다.

세상엔 상극이란 게 있다. 얼룩말이 사자 무리에 뛰어들지 않고 불이 물에 닿으면 꺼지듯 악마나 마귀같이 악한 것들은 절대 신전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놈은 확실히 달라도 뭐가 달랐다.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그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이것이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증거이기도 하다.

‘이쪽이군.’

어둠을 품은 이상 그의 추적술을 피할 순 없다.

‘보자. 어떤 놈인지.’

교황의 말처럼 마왕이 부활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군대가 출정한 것엔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런 건 자신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는 받은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면 그뿐.

“오호라!”

말을 타고 신전 길을 질주하던 그는 저쪽에 탑이 보이자 말에서 뛰어내리며 호기 있게 외쳤다. 그러면서 손에 든 망치를 힘껏 던진다.

빙글빙글.

2미터도 안되던 망치가 탑을 향해 뻗어가며 10미터까지 자랐다. 망치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의 막대한 신성력이 그리 보이게 했을 뿐.

“나와라! 저급한 악마여!”

콰아아아아아아앙!

망치가 탑을 때렸다.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탑을 이리 만들 수 있는진 모른다. 상어에게 허리를 뜯어먹힌 물고기처럼 옆구리가 휑해진 탑 안에서 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네놈이구나!”

신의 망치가 호쾌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자 망치가 그의 손아귀를 향해 날아왔다.

“······.”

황소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신의 망치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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