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73화 (173/177)

# 선택의 순간 #

거짓말도 살집이 붙으면, 어느새 거인이 되어 쿵쿵! 땅을 울리며 걸어 다니게 된다. 진짜 습격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면 어떤가? 놈들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인 것을.

“무기를 설치하고, 주변에서 아침까지 지켜보라고 해. 문제가 있을 시 바로 알리라 전하고. 다시 말하지만, 인명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상징적인 것들을 위주로 노려.”

번의 말에 바티산과 다루가 크게 끄덕였다.

.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수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어둠을 걷어내며 환한 아침을 맞았고, 이 밤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본격적으로 별 자국을 지워갈 때, 일이 터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수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굉음에 사람들은 번쩍번쩍 눈을 떴다.

-에구머니나!

-지진이다!

-무슨 일이야!

-불이야!

하지만 그 소란에도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한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몸을 계속해서 뒤척거렸다.

“으으음.. 으으..”

흠뻑 젖은 몸은 얇은 옷을 바짝 끌어당겼고, 하얀 피부와 가녀린 몸은 속수무책으로 악몽에 유린당했다.

-선택하라 했다. 가루비.

목소리가 강요했다.

-가루비.

싫어! 그만해! 그녀는 몸부림친다.

-가루비.

목소리는 계속해서 재촉했다. 이 다음 나올 말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끔찍했다.

-신과 함께 죽겠나? 아니면 나와 함께 살겠나?

“허어어어억!”

벌떡 일어나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가 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안돼···.”

-불이야!

-지붕이 무너진다! 피해!

-안에 사람 없나?

-모르겠습니다! 확인되지 않습니다!

멀리서 소란이 들려왔다. 고함과 비명.

“설마..”

그녀는 황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아..”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꿈에서 본 그 장면은 아니었다. 저 멀리 연기들이 사방에서 피어오르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달랐다.

비틀.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창틀을 손으로 잡고 몸을 지탱했다.

그때였다.

쾅쾅!

노크 소리에 그녀가 몸을 돌렸다.

“성녀님! 큰일 났습니다! 성녀님!”

그녀가 비틀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자,

“크흠.”

사제 하나가 눈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땀에 흠뻑 젖은 성녀의 몸이 너무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 해도 수컷의 본능까지 완전히 지우진 못했으리라.

“아.. 미안해요.”

성녀는 옷걸이로 가서 겉옷을 걸쳤다.

“무슨 일인가요? 밖이 소란스럽던데.”

“그게 큰일 났습니다!”

사제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토해내듯 말했다.

“수도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화재도 끊이질 않고 사건 사고도 잦았지만,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일이 벌어졌단다.

“제국이 고용한 용병들이요?”

“그렇습니다. 벌써 소문이 자자합니다. 수상한 자들을 봤다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도 밖에 있던 신성국의 군대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갑자기 왜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조금 전에 들어온 정보입니다.”

신전은 도시의 폭발보다는 신성국의 군대에 더 민감했다. 게다가 황제는 자취를 감췄다고 하고, 제국이 고용한 용병들이 날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한다 묻는다면···.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대회의가 열렸나요?”

“그렇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성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잡아주시겠어요?”

“기꺼이.”

사제의 손에 의지해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성녀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으로 보이는 창문.

‘그날이 다가오는 건가?’

정말 그 꿈속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신이냐, 번이냐를 놓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녀 삶을 통째로 갈아엎는 것이나 마찬가지. 주저 없이 신을 선택하리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할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성녀님?”

“아, 미안해요. 가요.”

발에 힘을 주었다. 어쨌든 현재로썬 그녀의 개인적인 선택 보다는 신전의 안위가 먼저였다. 수많은 사제와 신도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이니까.

그렇게 도착한 대회의장.

안쪽에선 벌써부터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평소엔 온순한 사제들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신성국과 함께 한다면 점수를 딸 수 있을 겁니다.

-그렇소. 우물쭈물하다가 괜한 오해를 사기보다는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하는 게 피해를 줄일 수 있소!

강경파는 바로 노선을 갈아타자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고작 점수 따자고 행동해야 하오? 정신 차리시오!

-한심하오! 뭐가 중요한지 정녕 모르겠다는 말이오?

온건파는 이럴 때일수록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아하니 강경파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오! 성녀님.”

“오셨습니까!”

“어서 자리하시지요!”

비록 여자지만 성녀의 발언권은 무시할 수 없다. 그녀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당신들이 옳아요.’라고 지지한 뒤, 이게 신의 뜻입니다, 라고 한마디 붙이면 그게 진리가 되니까.

웅성웅성.

평소 보이지 않던 사제들까지 전부 회의장에 들어와 있었다. 평소엔 꽤 넓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몸 가눌 수 없을 만큼 사람으로 빼곡했다. 근 1천 명이 성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부담되는 순간.

“혹시 신탁은 없었습니까?”

그녀가 자리를 잡자, 오른쪽에 선 장로가 급히 묻는다.

“없었어요.”

“하아.. 무심도 하시지.”

“그분께선 정녕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길 바라신단 말씀이십니까?”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장로들의 한탄에 사제들이 조용해졌다. 아무리 강경파라도 ‘책임’이라는 단어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신전의 안위를 위해 주장을 펼치는 것이지 같이 망하자고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때, 한 사람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지금 수도는 그 어느 때보다 큰 혼란을 맞았습니다! 저 간악한 제국의 개들은 일천 건이 넘는 사고를 일으켰고, 그 불길이 번지며 지금 수도 전역이 화염으로 뒤덮이고 있습니다!”

그는 강경파의 사제였는데, 말도 잘하고 성격도 호탕해서 평소 젊은 사제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이라도 나서서 도와야 한다는 것 아니오?”

늙은 사제가 답했다.

그의 말도 맞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모른 척하는 것은 사제의 도리가 아니었으니까.

“아니지요. 적선도 내 주머니가 차 있을 때 하는 겁니다. 오늘은 우리 신전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 우린 이 결정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가 달라질 것이며, 아울러 우리 신전을 따르는 수만, 수십만의 신도들의 미래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의 말에 주억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렇지. 불신자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지.”

“신도 믿지 않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할 시기가 아니라오.”

“우린 우리 일부터 생각합시다.”

늙은 사제는 버럭 외쳤다.

“이런 이기적인 말이 어디 있소! 다들 미쳤소? 우리만 생각하자니! 그게 저 신성국의 논리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했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전이 파괴되고, 우리가 다 죽으면 그땐 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젊은 사제의 말이 너무도 현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 시간 안에 결정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조만간 신성국의 군대가 도착하면 우린 어찌해야 할지 그들에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들이 제국과 연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누군가의 말에 젊은 사제는 단호하게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이제까지 그들이 보인 움직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 역시 몬스터에 유린당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누구도 우릴 손가락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이거 진짜 큰일이 아니오?”

사람들이 묻자, 젊은 사제는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녀.

그녀를 향해 힘주어 말한다.

“여기 있다가 신성국의 군대에 무참하게 짓밟히던지.”

젊은 사제는 아까 성녀가 도착하기 전에 말했었다. 이곳으로 오는 신성국의 군대가 어쩌면 이곳 신전을 노리고 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그들에게 우리 뜻을 전하고, 화친을 맺던지.”

이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녀님. 부디 가련하고 우매한 길잃은 양들에게 길을 열어 주십시오.”

“······.”

성녀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또 다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어떤 결정을 내리던 반대파에게 시달릴 것이다. 또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평생을 걸쳐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외면할 순 없다.

이것이 그녀의 본분이자 역할이니까.

“저는..”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떼는 그때,

“······?”

젊은 사제를 바라보던 그녀의 고개가 갸웃했다. 젊은 사제의 뒤로 누군가 바짝 다가서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더니.

“위, 위험..?”

성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푸학-!

젊은 사제의 목이 둥실 떠올랐다. 몸 전체가 아니라 머리만 위로 말이다.

촤아아아아악!

머리 잃은 목에서 솟구치는 피가 땅에 닿을 때까지 사람들은 이 끔찍한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너무 황당해서 현실이 믿기지 않는 거다.

털썩.

결국, 젊은 사제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그의 뒤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넉넉한 후드를 쓰고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성녀는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아무리 황제라지만 신성한 곳에서 살인이라니! 종적을 감췄다는 그가 왜 여기에 있지?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랄들 하고 있다.”

그의 손에 들린 단도 끝에서 핏방울이 뚜욱 뚜욱 바닥으로 떨어질 때,

“히이이이익!”

“폐, 폐하?”

“당신이 왜 여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급속도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만히 있는 자들이 눈에 띄었는데,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은사와 딘딘, 집정관과 십위였다.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

사제들이 고함쳤지만, 황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살인이 아니다.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역적을 벌한 것이지.”

황제의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잘못하다간 전부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다. 분명 그러한 회의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

황제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말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신관이란 것들이 제 살 궁리만 하고 있으니.. 쯧. 내가 이래서 이것들을 믿지 않았다니까?”

신전에 유배당한 7황비의 거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황제와 측근들은 회의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지켜보며 참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사제들을 노려보았다.

황제가 단도를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성녀.”

“예, 폐하..”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라.”

“······.”

“그대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아까 꾸었던 꿈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와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다.

“저, 저는..”

그녀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인상을 쓰고 있을 때, 황제는 다시 묻는다.

“말하라. 그대의 신은 지금 뭐라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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