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습격 #
「태자는 보아라.」
급히 휘갈겨 쓴 것 같은 필체는 놀라운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신들과 안전한 곳으로..」
갑작스러운 습격. 제국에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동맹국 중의 하나인지는 몰라도 놈들은 매우 강했고, 대비할 틈이 없었음을 알린다.
「..추후에 기별할 것이니, 태자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의 혼란을 진압하라.」
서신을 모두 읽은 번은 지그시 병사를 노려보았다. 이것이 사실이냐? 라고 묻진 않는다.
“네가 아는 것을 말해보라.”
“저, 저는 워낙 경황이 없어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궁 내부를 지키는 무사 중 경비인력의 하나였는데, 갑자기 터진 변고에 서신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급히 궁을 떠났다고 했다.
“알겠다. 우리와 합류해라.”
“예!”
병사가 물러나자, 페트릭이 바짝 다가와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
번은 묘한 눈으로 저쪽을 바라본다.
“일단 가지.”
“알겠습니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저 앞의 낮은 둔덕에만 올라도 멀리 수도가 보일 것이다.
“으음..”
거리를 절반쯤 줄이자, 4km 정도 남은 거리에서도 하늘로 뭉게뭉게 치솟은 연기가 목격되었다.
“허..!”
페트릭이 말의 속도를 늦추며 번에게 물었다.
“어떤 놈들이 감히!”
번이 황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페트릭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부의 세력에게 궁을 빼앗기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일이 저렇게 될 때까지 왜 막지 못했던 걸까요? 내통자가 있었을까요?”
수도에 4만의 징집병이 있었다고 해도 궁이 털리면 손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모르지.”
궁이 불타고 있는 이 와중에 번이 묘하게 차분한 것을 보며 페트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상해서 말이야.”
“무엇이 이상합니까?”
“그렇잖아. 저길 보라고.”
번이 턱짓으로 연기를 가리켰다.
“이제까지 저랬던 적이 있었던가?”
예전부터 황제가 궁을 비웠던 기간만 따진다면 엄청나다. 게다가 집정관 치세도 아니고, 버젓이 황제가 궁에 있는데도 사건이 터졌다? 말이 안된다. 물론, 황제는 아무도 모르게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집정관이 딴마음을 품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저 정도로 허술하게 당할 위인들이 아니지 않나?
“여기서 대열을 정비하지.”
번은 완전히 말을 멈췄다.
“알겠습니다.”
행군 끝 열이 모두 도착하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앞쪽 병사들이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번은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궁 쪽으로 눈을 돌렸다.
“수상해..”
가정을 해보자.
서신대로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무리가 궁을 침투했다 치자. 하지만 그놈들이 100명 아니 500명이라고 해도 은사, 딘딘, 십위가 지키는 황제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아니지.”
그렇게 쉬웠으면 번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독약이나 어떤 함정 같은 것에 당했을까?
“아니야.”
차라리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는 게 더 믿기겠다.
집정관의 눈을 피해 궁을 침투한다고 계획한다면 대규모 인원으론 불가능하다. 번 역시 1만의 정예를 지하에 숨겨 놓았기에 안다. 황제가 머무는 궁이 얼마나 철옹성인지를 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잖아.”
만약 악마가 번의 몸속에 있었다면,
-뻔하지! 수작을 부리는 거다!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헛소문을 흘려 제국을 간 보려고?”
진짜 황제가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보다는 이 사건 자체에 어떤 흑막이 있다고 보는 게 더 맞겠다. 콩가나 어디 다른 왕실이 털렸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에비뉴는 말도 안 된다. 그 집정관이 어떤 사람인데.
“아니면.. 신성국?”
다방면으로 생각해보지만, 아무래도 가장 마음이 기우는 쪽이 생긴다.
“혹시 나를?”
그렇다. 시기 또한 절묘하지 않은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입궁할 예정이었다.
“흐음.”
약 2시간가량 생각을 정리하던 번은 페트릭이 다가오자 묻는다.
“다른 소식은 없나?”
“모르겠습니다. 이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내볼까요?”
번은 끄덕였다. 우선, 발 빠른 자들 몇 추려서 동태를 파악하라고 했다.
“바로 출발하실 생각은 아니십니까?”
“돌아가는 꼴을 알아야겠어.”
“예.”
번은 병사들에게 긴 행군으로 지친 몸을 쉬라고 명령하고 뒷짐을 졌다. 천천히 걷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근처에서 지켜보겠다는 말인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봐야 할 것이 뭐란 말인가?
‘내가 덥석 물기라도 바라는 건가?’
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3시간이 더 흘렀다.
이제 어느덧 해는 지고, 주변이 어둠에 잠겼다. 궁에 났다던 불길도 사그라들었는지 눈에 띄는 게 없을 무렵, 아까 보냈던 병사들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나?”
페트릭이 묻자, 병사들은 대답했다.
“그것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궁이 불에 탄 것은 확실한데, 사람들도 그렇고 문지기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습격자들은?”
“그것도 오리무중입니다.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폐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도 목격한 이가 없습니다.”
소문은 돌고 있다고 한다. 궁에 변고가 생겨 황제가 급히 피신했다는.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엔 수도 분위기는 지나치게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단다. 뭐, 타국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으니 사람들이 피난을 가야 할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다?'
명령을 내릴 총수권자가 사라졌으니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일 수도 있겠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 황제나 집정관이 없다면 그 아랫사람이 뭐라도 해야 했을 것 아니겠는가? 람보르라는 체계 잡힌 관청까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알겠다. 쉬도록.”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번이 페트릭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해가 밝으면 궁으로 들어간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황제는 수도의 혼란을 잠재우라 했지만, 습격자의 정체도, 흔적도 없는 이 상황에서 성급히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
페트릭이 명령을 내리려고 돌아섰다가 번의 목소리에 멈춰 돌아보았다.
“무기는 오늘 밤 옮긴다.”
“오늘..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직접 간다.”
세븐 스타와 5개 신도시에서 은밀하게 제작해왔던 신무기를 전부 가져왔다. 그것들을 옮기는 인력만 300명이 필요할 정도로 종류도 많고,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미리 침투해 동향을 살피면서 다루와 합류해 기다릴 터이니, 자넨 내일 아침 계획대로 움직이면 돼.”
“차라리 내일 아침에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듭니다.”
“나도 그래. 여기 가만히 있다간 미쳐버리겠어.”
사람들을 통해 듣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럴 땐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부디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
번은 그날 밤 병사 300명과 함께 부대를 이탈해 수도로 들어갔다. 눈에 띄지 않게 잘게 쪼개 사방으로 흩어져서 5명이나 10명씩 이동하게 했다. 그리곤,
“너희들은 약속된 장소로 이동해라.”
번은 무리와 이탈해 혼자 골목을 누볐다.
황제가 궁을 비웠다! 차지하자! 와아아아! 몰려갈 만큼 번이 어리숙하지도 않았고, 그간 공들인 것들을 쉽게 꺼낼 생각도 없었다.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인데..’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없다고 대한민국이 마비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이미 짜여진 시스템이 있고,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기에 오늘을 어제처럼 살아갈 뿐이었다. 내일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게 서민의 삶 아닌가?
하지만 다른 부분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어긋난 것들이 보인다. 우선 수도의 치안을 맡는 경비대가 이상했다. 마치 오늘 할 일을 전달받지 못한 것처럼 그저 멀뚱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궁을 복구할 생각도 안 하고 말이지.’
번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섰다. 오가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게 들린다.
“제국 놈들이 고용한 용병이라지?”
“그렇다는구먼.”
“허어.. 그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올 줄이야! 이번엔 진짜 위험한 거 아닌지 몰라?”
“그래도 피신하셨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엔 점차 인적이 드물어졌다. 번은 한참을 그렇게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움직였다. 그의 눈꼬리에 짓궂은 어떤 것이 걸렸다.
스윽, 스윽.
유령처럼 빠르게 움직여 한 폐가의 입구로 쏘옥 들어간 번은 익숙한 듯 주방으로 향했다. 여기 지하로 통하는 비밀 문이 있다.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이동하며 생각한다.
‘누군가 명령을 내리고 있어.’
얼핏 보면 모르겠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도시의 공황을 억제하고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문도 흘리고 있고.’
분명 수도 밖에서 들었을 땐 습격자들의 정체를 모른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까 사람들을 지켜보니 그들은 ‘제국이 고용한 용병’이라고 하나같이 떠들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뭔가?
‘의도했듯, 의도하지 않았듯 뭔가 어긋난 거야.’
가장 이상한 것은 황제의 서신이다. 분명 거기엔 군사를 이끌고 수도의 혼란을 진압하라고 써 있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혼란은커녕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모를 테니..’
어쩌면 내일 본격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황제가 말했던 그 ‘혼란’이.
“그렇겐 안 되지.”
통로가 좁아지기 시작하자 번은 몸을 낮춰 기기 시작했다. 참으로 빠른 속도였다. 보통 사람이 전력으로 뛰어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번은 신속하게 지하를 이동하고 있었다.
“궁이 불탄 것은 팩트.”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습관적으로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그러면서 정리하려는 것이다.
“황제와 집정관이 자리를 비운 것도 팩트지만.”
번의 예리한 통찰력은 하나를 거짓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습격자는 처음부터 없었을 거야.”
위장은 어렵지 않았을 거다. 복면 같은 거 쓰게 하고, 황제가 ‘못 보던 놈들인데? 너희는 누구냐! 제국이 보냈나?’ 외쳐주면 간단한 일이니까.
스윽, 스윽.
어느덧 번이 원하던 목적지에 닿았다. 그곳엔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중 하나가 번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반색한다.
“태자님!”
“바티산.”
4황자 바티산과 다루, 1만 정예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이었는데, 23명이 좁은 곳에 있다 보니 열기가 후끈하다.
“모두 제 역할을 잘해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설명하지.”
번은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무기는 전부 들어왔나?”
번이 거리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으니, 300명은 이미 도착했으리라.
“예!”
“경계가 허술해서 문제는 없었어요. 경비들도 맥빠진 사람들처럼 굴고. 오늘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징집병들은?”
“그렇지않아도 주시하고 있었는데,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어요.”
궁이 불타고 황제가 사라졌는데, 4만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좋아. 잘 들어. 최대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담벼락이나 공공시설물 위주로 폭약을 설치한다.”
번은 ‘폭爆’ 열매와 ‘불火’ 열매를 개량해 강력한 화기를 지닌 폭발물을 다량 만들었다. 나일 강 주변에서 재배하고 열매를 수확해 세븐 스타 지하에서 만들어 배에 싣고 여기까지 옮긴 것이다.
“언제요?”
“수도에 말씀입니까?”
다루와 바티산이 놀라 물었다. 번은 단호하게 끄덕였다.
“그래. 모든 준비는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마쳐야 할 거야.”
약 3,000개가 넘는 것들을 다 설치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인력이 문제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게 어렵다. 빛에 반응하는 타이머를 부착해두었기에 자릴 지킬 필요는 없겠지만, 설치해둔 것이 발각되면 골치 아파진다.
“오오오! 오늘 밤 거사를 시작하는 것입니까?”
바티산이 기대된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옆에서 다루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황제가 어디 있는지 파악할 수 없잖아요.”
번은 다루를 보며 웃었다.
“그래서 하는 거다.”
작전명, 여우사냥.
“오늘 밤 우리는 궁을 불태웠다던 그 습격자로 위장한다.”
주변 어딘가에 웅크리고 숨어있을 여우에게 내일 떠오르는 태양은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