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70화 (170/177)

# 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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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땅을 파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성분을 추출합니다.」

와구, 와구.

습관적으로 흙과 돌을 입에 넣고 씹어 삼키지만, 새로운 성분은 흡수되지 않았다. 어디 화산지대나 특수한 토양이라면 모를까 근처에서 더 얻을 건 있을 리 없었다.

파파파파팍.

번이 땅속을 이동하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갈고리 같은 두 팔로 땅을 파고 길게 자란 억센 손톱은 무엇이든 찢어발겼다. 심지어 그가 뚫은 구멍은 크지도 않다. 어른 하나 들어가기에도 비좁다. 게다가 울퉁불퉁해서 다른 사람은 여길 지나갈 엄두도 못 낼 거다.

번이기에 가능한 거다. 육체를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하게 할 수 있었으니 굵은 나무뿌리나 단단한 바위가 나오면 피해갔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자르거나 뚫을 수도 있었겠지만, 쓸데없이 힘과 시간을 소모할 필욘 없다. 그저 이동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지렁이, 두더지, 각종 땅에서 살아가는 벌레들까지 그 많은 생을 거쳐오며 번은 이제 지하가 무섭고 답답하고 두렵다기보다는 안락하고 포근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식물의 경험까지 기억해냈으니 더 말해 뭐할까.

그렇게 번은 지하로 기어갔다.

그리 깊지 않게 파뒀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청각엔 몬스터들의 숨소리가 잡힌다. 삼안을 뜨지 않아도 그걸로 방향을 찾아갈 수 있었다.

‘확실히 통제력이 약해졌어.’

크르르르!

쿠와아아앙!

몬스터들이 엉겨 붙어 싸우는 소음이 들려왔다.

여러 종류의 짐승이 한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걸 저지하는 것이 우두머리의 카리스마인데, 해골바가지가 미쳐버렸다면 장악력도 점차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긴 오래 버티긴 했지.’

처음부터 온전치 못한 녀석이었다. 자연을 거스르면 이렇게 반탄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100년을 못 살고 치매가 오는데, 녀석은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리치로 살았으니..

‘며칠이면 돼. 며칠이면.’

번은 해골에게 어둠을 나눠줘서라도 힘을 줄 생각이었다. 녀석이 신성국 군대와 상잔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단순하게 어둠을 나눠주는 것만으로 안된다면 융과 방법을 모색해서라도 녀석의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이쯤인가?’

번의 손이 멈췄다. 그의 고개가 위쪽으로 들렸다.

새근, 새근.

몬스터의 것이라고 하기엔 미약하고 익숙한 숨소리. 융이었다. 좀 더 후각에 집중하자, 그녀 특유의 체취도 느껴졌다.

파파팟.

번의 몸이 위쪽을 향해 들렸다.

“.......”

눈을 뜨자 세상이 보인다.

5미터를 훌쩍 넘어 10미터에 이르는 거대 몬스터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사방에 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안은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악취와 지독한 노린내.

“아후.. 미치겠네. 정말.”

그 안에서 융은 초조한지 입술을 깨물고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좋담.”

웬만한 여자였다면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미쳐버렸을 테지만, 과연 마녀인가? 그녀의 눈에 공포는 없었다.

하지만,

“엄마야!”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자, 놀랄 수밖에 없다.

“태자님!”

하지만 그게 번이라는 걸 깨닫곤 냉큼 품에 안겼다.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번은 육체를 사람 형태로 돌렸지만 나체였다. 하지만 융은 그런 것에 거부감이 없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아왔으니까.

“그 녀석은 어디 있나?”

“저기 저쪽에요.”

융이 돌아서서 팔을 뻗었다.

거대한 칠면조처럼 생긴 몬스터의 옆에 상대적으로 작은 어떤 형체가 쪼그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지만, 바닥은 피와 고기 조각들이 흥건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파편 사이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였다. 사람의 것이다. 녹색 마녀의 잔해일 것이다.

번은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엉덩이 쪽에 자란 검은색 꼬리가 살랑거렸다.

크르르르르릉.

주변 몬스터가 움찔움찔했지만, 번의 기운에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어둠을 개방한 번은 이곳에서 제왕이나 마찬가지다.

챱챱챱챱!

해골이 쪼그려 앉아 연신 손을 놀려대고 있었다. 번은 멈춰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

걸신이라도 들린 놈처럼 바닥의 고깃덩이를 주워 먹고 있는 해골은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기괴하고 두려운 모습이다. 등 돌리고 빠드득 뼈째 생고기를 씹어 삼키는 놈의 모습은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번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심한..”

번의 목소리에 해골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훽-! 돌아보는 녀석의 눈에서 번뜩 검붉은 불꽃이 피어오른 것 같았다.

“..허..”

얼굴 여기저기는 다 허물어졌고, 코는 오른쪽 입술 위까지 내려와 있다. 순진한 애들이 보면 기절할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끄윽, 끄으윽..”

해골이 스윽 일어나 비틀거리며 번의 앞에 섰다. 아직 완전히 미쳐버리진 않았는지 번을 발견하자마자 달려들거나 하진 않았다.

“괴, 괴로워..”

녀석이 손을 뻗었다.

“나, 나 좀 어떻게.. 해줘···.”

연명치료로 고통스럽게 하루를 꾸역꾸역 버티는 환자처럼 녀석의 목소리엔 고통이 한껏 배어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흐아아아악! 배고파! 배고프다고!”

돌변해서 번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태자님! 위험해요!

뒤에서 융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터억-!

손바닥을 펼쳐 녀석의 얼굴을 감싸 쥔 번. 당연히 맨정신에도 상대가 안 됐는데, 이런 상태로 번을 어쩔 순 없다.

과득, 콰득, 콰드드득.

녀석의 얼굴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난다. 번은 무심한 눈으로 놈의 얼굴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버둥버둥, 녀석의 다리가 허공을 찼다.

“네가 복수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야.”

번은 손가락에 몽글몽글 어둠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저기 신의 개들이 있다. 놈들의 피를 마시고 뼈를 부수는 것이 네 소원 아니었나?”

“으으으으으..”

해골이 고통스러운지 버둥거렸다.

“정신 차려!”

왈칵! 왈칵!

번의 몸에서 뿜어진 어둠이 해골의 전신으로 깃들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는 건가?

“시, 신성..의 개...들..”

“그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이유를 잊지 마. 고작 한 걸음이다.”

번은 팔을 내려 녀석의 다리가 땅에 닿게 해주었다.

“나는..”

“마도왕국의 한을 기억해!”

“마도..!”

부르르 떨며 눈빛의 떨림이 멎기 시작하는 녀석.

‘됐군.’

번은 미소 지었다. 녀석이 정신만 차리면 오늘이나 내일 새벽 작전을 진행할 수 있을 거다. 하루나 이틀만 버티면 된다. 신의 망치만 잡으면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널 도우려는 것이니까.”

“끄으으으..”

이왕 시작한 거 확실하게 힘을 실어주려던 번은 꼬리뼈 깊은 곳에서 뽑아 올린 어둠을 출出의 원리로 녀석에게 뻗어냈다.

그런데,

“......!”

예상치 못한 일이 불쑥 터져버렸다.

“흐읍..?”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했지만, 늦어버렸다.

“이..?”

뭔가가 번의 몸에서 해골에게 넘어갔다. 번이 주려한 어둠보다 훨씬 농밀하고 악한 것. 기운이 아닌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은 번과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비틀.

해골이 번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곤 술 취한 사람처럼 두 걸음 물러나더니 눈을 치켜떴다. 그러면서 아가리를 벌렸다.

“크크크크크..”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너?”

번은 지금 묘한 상실감과 허탈함을 극심한 공복처럼 느끼고 있었다. 몸속의 어둠이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스스스스스.

어느새 꼬리도 말라 비틀어진 식물 줄기처럼 오그라들었다.

“..크하하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는 해골.

아니, 녀석은 번이 알던 그놈이 아니었다.

“무슨 짓이지?”

번이 악마에게 물었다.

그래. 악마다. 최근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뭘 하는지 꿍하고 처박혀 있던 그놈이 해골에게로 넘어간 거다.

“보면 몰라?”

히죽 웃는 악마는 해골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개성을 감추진 않았다. 장난스럽고 영악하며 친근했다.

놈은 건들거리며 짝 다리를 짚더니 갸웃하곤, 우두두둑 허벅지를 뒤틀었다. 뼈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며 곧게 펴졌다.

“몸뚱이가 아주 개판이네.”

녀석이 투덜거리다가 씨익 웃었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아.”

녀석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번이 인상을 구기며 성큼 한발 다가섰더니 악마는 훌쩍 세 걸음 물러섰다.

“아아, 가까이 오지 말라고.”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악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까지 너와 함께 살길 바랐는데? 지겹지 않냐?”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아아, 그건 아니야. 기회가 왔기에 잡은 것뿐이지. 너도 이 편이 좋지 않아? 이제 마음 편히 그 계집이랑 즐기라고. 지켜보는 악마도 없는데. 크크크!”

이 순간에도 농담을 지껄이는 악마를 보며 번은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면 녀석이 튀어 나간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놀라긴 했지만 사실 번도 언젠간 놈을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계약은?”

“크크크크..!”

악마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을 한껏 벌렸다. 한참을 그리 깔깔대던 녀석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자세하게 말하진 못하겠지만, 하도 딱해서 말해준다. 그간의 정도 있고.”

“......?”

“처음부터 우리 계약은 맺어지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거든. 크크크!”

“뭐라고?”

“곧 알게 될 거야. 그럼 잘해보라고!”

녀석이 뒤로 훌쩍 뛰었다. 그러자 뒤에서 날아온 대머리 독수리 한 마리가 녀석을 발톱으로 낚아챘다.

“너.. 이 새끼..!”

번은 뛰어올라 놈을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태자님!”

융의 뾰족한 비명이 다시 울렸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쿠웅!

쿠르르르르.

갸갸아아아아아!

산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주변에 버티고 섰던 대형 몬스터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가자! 싱싱한 피와 달콤한 영혼이 기다린다!

악마를 낚아챈 독수리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몬스터들이 반응했다.

캬우우우우우!

대열이고 뭐고 없다. 잘 뛰는 놈은 독수리를 따라 쭉쭉 나아가고, 큰놈은 작은놈들이 발에 밟히든 채든 상관없이 움직인다.

집단 광기!

“허..”

번은 급히 움직여 융의 허리를 감싼 뒤 자릴 이동했다. 수만의 몬스터가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얼룩말이나 사슴 무리가 움직여도 위험한데, 지금은 그것관 상대도 안 되는 포악한 맹수들이 내달리고 있다.

“태자님..”

번은 메뚜기처럼 뛰어 자릴 피해 비교적 안전한 곳에 내려섰다.

“어떡하죠···?”

융이 물었지만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게, 이제 어떡하나? 악마가 이런 식으로 해골의 몸을 강탈해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놈은 남쪽으로 향했다. 신성국 군대와 맞설 생각 따윈 없는 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놈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피와 살육뿐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번이 이마를 찡그리며 우르르 남쪽으로 달려가는 몬스터 군단을 바라보았다.

“왜 저쪽으로 가는 거죠?”

답은 알고 있다.

“쉬우니까.”

“네?”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 나니 녀석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순 없어졌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놈이 저 방향으로 가는 이유.

“빌어먹을.”

축제다. 폭죽 대신 피가 분수처럼 터지는 광란의 파티.

마왕 행세를 하라고 해골을 써먹었는데, 악마가 들러붙어 진짜 마왕이 되어버렸다.

“하필..”

판이 뒤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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