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69화 (169/177)

# 미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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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열이 칼을 차고 돌아다니면 누구라도 유심히 볼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이 물동이를 지고 강 쪽에서 오면 의심하는 이들은 없다.

발키리 최정예 5천 명은 그렇게 배에서 내려 수도로 흘러들고 있었다. 어떤 여인은 상인으로, 또 어떤 여인은 주변 아낙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걸었다. 이들은 3만 발키리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뛰어난 자들이었고, 오늘을 위해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해왔기에 능숙하다.

“추적은?”

선봉에서 다루가 묻자, 뒤따르던 여인이 황급히 따라붙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좋아. 긴장을 놓지 마. 이제 수도다.”

“예!”

그녀들의 차림은 남루했다. 꼭 부랑자들 같았는데, 최근 에비뉴엔 벨버른이나 다른 점령지에서 찾아오는 이런 여인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기에 특별하진 않았다. 5개 신도시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도나 큰 상권이 발달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흐흐, 고것들 참, 몸매 하나 좋구먼! 말이라도 걸어볼까?

-기다리자고. 얼마 후면 술집에서 볼 수 있겠지. 괜히 잘못해서 경비대에게 치도곤당하지 말고.

하릴없이 성문 근처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그녀들을 보며 농을 했다. 몸뚱이가 재산인 여자들이 도시로 흘러들어 갈 곳은 제한적이었으니 그리 보는 거다.

“벨버른에서 왔다고?”

문지기는 다루를 위아래로 힐끔 보며 묻는다.

“네..”

“갈 곳은 있고?”

“이제 찾아봐야죠.”

문지기는 다루를 보며 씨익 웃곤 저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달이 지지 않는 밤이라는 여관에 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 잘해줄 거다. 내 이름은 쟈크다.”

“고맙습니다. 꼭 기억해둘게요.”

“그래. 또 보자고. 통과!”

쟈크가 여인들을 소개해주고 뒷돈을 받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여기 남문을 통해 수도를 오간다. 북문, 동문, 서문까지 합치면 대체 얼마나 많은 유동인구가 있는지 셀 수도 없다. 그만큼 고된 일이고, 조금만 정체해도 뒤에 길게 줄이 늘어서니 빨리빨리 처리해야 했다.

“다음!”

뒤를 힐끔 보며 다루는 8명의 발키리들과 함께 수도로 들어섰다.

“보급을 마치면 바로 작전을 수행한다.”

“알겠습니다.”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가도록.”

“예!”

수도로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1만의 정예가 수도로 흘러들고 있을 것이고, 하루에 모두 집결하면 의심을 피할 수 없으니 며칠에 걸쳐 천천히 모여야 한다.

또한, 앞서 도착한 이들은 그들을 위해 보급을 준비해야 했다. 발키리들이 시장을 향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다루는 잠깐 서 있다가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도엔 사람이 많았다. 거의 포화상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북적였는데, 그래서일까? 다루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몇 개의 골목을 돌아 약속장소에 도착한 다루가 멈춰 선다. 그러자 뒤쪽에서 손이 하나 뻗어왔다. 인기척을 느꼈지만 피하지 않았다.

“부대장.”

“마스터.”

후드로 얼굴을 가린 바티산이 그녀를 이끌고 안쪽 좁은 공간으로 이동했다. 작은 문이 있었는데, 허리를 숙여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어두웠다. 곰팡내 가득하고 빛 한점 들지 않는 오래된 주택.

“이쪽으로. 발밑 조심하고.”

“예.”

끼이이이익.

바티산은 바닥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그러자 지하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이 나타났다. 그 아래로 내려가며 호롱에 불을 붙인다.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져갔다.

“고생 많았군.”

“아닙니다.”

“추적은 없었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대가 그리 느꼈다면 없는 것이겠지.”

지하는 끝이 없는 듯 길었다.

수도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바티산 역시 처음 여길 내려왔을 땐 경악했었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이 지하통로는 번이 수년간 막히거나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통로들을 이어놓아 이젠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둘은 한참을 걸었다. 거의 반나절 이상을 이동한 것 같았다. 빛이 들지 않으니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도 없고 답답했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당분간 이게 집이 될 테니까.

“다 왔네. 여기야.”

“아!”

모퉁이를 돌자, 사람의 손길이 빼곡하게 닳은 공간이 나타났다.

“나도 지도가 없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니까 잘 기억해둬야 하네. 알겠나?”

“예. 그러면 이 위가 바로?”

“그렇네. 황자님이 머무시던 거처와 연결되어 있지.”

다루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벽면 가득 빼곡하게 찬 글자들은 황실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프로필이었고, 그림은 주변 지도였다.

이곳에서 어린 번이 꿈을 키워갔으리라. 대체 혼자 몸으로 어떻게 이런 지하통로를 완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네는 여기서 대기하다 그 순간이 오면 황비님과 황자의 신변을 맡아야 하네.”

“그분들껜 말씀드렸습니까?”

“아니. 모르고 있는 게 좋을 거라 하셨네.”

“하긴.. 그렇겠네요.”

“궁을 비우진 말라 말해 두었으니, 거사 일에도 멀리 가진 않으실 거네. 하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니 방심하지 말고.”

갑갑하긴 하겠지만 1만 명이 빼곡하게 숨을 수 있는 지하공간. 이제 그날이 오면 모두가 한가지 목표를 위해 위로 나갈 것이다.

“밖은 내가 통제할 테니, 자넨 안쪽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잘 관리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건투를 비네.”

“감사합니다. 마스터.”

바티산이 떠나려다가 문득 멈춰 섰다.

“아, 참.”

“······?”

“일전에 태자 전하께서 거사 전에 신무기를 지급하실 거라 하셨는데, 그것에 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아직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서 말이야.”

“아, 옮겨오는 중일 겁니다. 저희가 반입하면 의심받을 것 같아 사내들이 맡고 있습니다.”

“그랬군. 수레 같은 걸 이용하나?”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알겠네. 그럼 고생하게.”

바티산이 손을 흔들며 나가자 홀로 남겨진 다루는 다시 주변을 보았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벽도 쓸어보고,

「이번 경연! 반드시 이긴다! 아자!」

「마나가 대체 뭐야!」

「왜 나만 이래!」

그가 남겨 두었을 글자를 보며 풋! 웃기도 했다. 어렸던 그분이 이 글자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

보았다.

꼬챙이가 아닌 손톱 같은 것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긁어 쓴 것 같은 거친 글자들.

「이번 생, 반드시 살아남아 황좌를 가지리라.」

그 의지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글귀였는데, ‘이번 생’이라는 단어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의 간절함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리라 여겼다.

“거의 다 왔어요.”

다루는 번을 떠오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자리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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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에 가지는 공포는 대단하다. 거미나 송충이, 지네 같은 작은 것들만 봐도 소름이 돋는데, 하물며 사람만한 거대한 몬스터는 어떠할까?

그렇다. 지금 저 앞엔, 사람 머리통을 뼈째 으스러트릴 수 있는 강력한 턱을 가진 악어보다 훨씬 센 아가리를 가진 놈도 있고, 치타보다 빠르며 거북보다 단단한 갑각을 가진 녀석도 있었다.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하는 거다. 이 전쟁은.

“······.”

“······.”

그런데 분위기가 아주 묘했다.

약 2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몬스터들과 대치하고 있는 군대는 죽음의 공포에서 오는 초조함이나 흥분이 없다. 있다면 가벼운 긴장 정도?

“잘 되어가고 있군.”

수도와의 통신을 마친 번이 페트릭을 보며 미소 지었다.

“부대장이 잘 도착한 것입니까?”

“그래. 나머지 인원이 모두 도착하면 슬슬 거행해도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페트릭이 저쪽의 병사에게 지시하고 다시 돌아오자 번이 묻는다.

“그놈들은 어디쯤 있다고 하던가?”

신성국 군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저 큰 나무 보이십니까?”

번이 끄덕이자 페트릭은 놈들이 그쪽으로 약 4시간 거리에서 주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도 꼼짝을 안 하는군.”

놈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하기에 전투를 멈추고 기다렸는데, 이 약아빠진 것들이 어느 정도 거리가 되자 간을 보려는지 진군을 멈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동했다. 이쪽이 아니라 여길 기준으로 좌우로 말이다. 처음엔 놈들이 몬스터의 도주로를 막으려고 그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건 얼마 가지 않아 파악했다.

“개자식들. 그러고도 신의 군대를 자처해?”

이놈들은 몬스터들이 더 진이 빠지길 바라는 거였다. 번의 군대와 싸워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분명 사람이 죽어 나갈 걸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는다. 한 마디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챙기겠다는 수작인데, 얄밉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대론 안 되겠어.”

번이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놈들을 끌어내야지. 애초에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번의 목적은 처음부터 몬스터 군대가 아니라 신의 망치였다. 번이 계획한 수도 작전을 완벽하게 하려면 그 어떤 변수도 없어야 했는데, 뒤통수에 신성국의 군대를 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정관을 속이는 덴 성공했으니 이제 신성국 놈들을 정리할 때인데, 여기서 너무 길어지면 수도에 숨겨둔 1만 정예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 어둡고 좁은 지하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하니까.

“퐁.”

번이 뒤로 손을 뻗자 대기하고 있던 녹색 마녀가 왔다.

“누굴 부르시겠어요?”

번은 대답 대신 턱을 들어 저 앞을 가리켰다. 몬스터들이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우글우글하다. 심장 약한 사람이 보면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아버릴지도 모른다.

“알겠어요.”

그녀가 작은 손을 내밀자 번이 움켜쥔다.

-융이에요.

콩가에서 온 에비뉴의 태자가 몬스터 군단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세상이 경악할 것이다.

“그 녀석, 대화는 되나?”

세상이 마왕이라고 부르는 해골바가지를 말하는 거다.

-아뇨. 저조차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예요. 그렇지않아도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오전보다 더 포악해져서 이대로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요.

해골이 드디어 정신 줄을 놨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주변 몬스터를 죽이질 않나, 사내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어젯밤엔 암컷 오우거를 덮치려고 했단다. 키가 6m짜리 오우거를 말이다.

“지금 뭐 하고 있는데?”

여기서 봐봐야 덩치 큰 몬스터들로 벽을 쌓아두고 있어서 녀석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싸이클롭스를 한 마리 죽이더니, 그 고기를 먹고 있어요.

“······.”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번은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태, 태자님! 꺄아아아아악!

갑자기 통신이 끊겼다.

“융? 이봐!”

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녹색 마녀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어떤 문제?”

“소통할 수 없을 만큼 신변에 위험이 생겼거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겠다. 죽었다는 거겠지.

“젠장.”

빠드득 어금니가 절로 갈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번은 녹색 마녀의 손을 놓고, 페트릭에게 말했다.

“놈을 좀 보고 와야겠어.”

“꼭 그러셔야 하겠습니까? 위험합니다.”

“저것들이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잖아.”

그렇다. 번은 저기 있는 마왕만큼이나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다.

“아뇨.. 그 문제가 아니라.”

페트릭은 아무래도 다른 걱정을 하는 것 같다. 두 진영의 우두머리가 서로 짜고 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번은 피식 웃으며 뒤쪽 막사로 걸어갔다.

“태, 태자님?”

급히 막사로 따라 들어간 페트릭.

“흡..!”

멈칫했다.

번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다. 아니, 마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기괴했다. 무서웠다.

이미 목 아래론 전부 바닥에 잠겨 옷가지만 허망하게 남겨 있는 상태에서 머리만 빤히 페트릭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렸다.

“걱정 말라고.”

씨익 웃는 번의 얼굴에 페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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