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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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에비뉴라는 나라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현 황제는 그야말로 전쟁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매번 승리로 이끌었기에 백성들의 지지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신탁은 아직입니까?”
“좀 더 기다려봅시다.”
신전.
모두가 숨죽이며 성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인데, 기도실에 들어간 성녀가 나오질 않았다. 이젠 슬슬 그녀의 건강이 염려될 수준 아닌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으니 말이다.
“슬쩍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불경스럽게···!”
“믿어봅시다. 오늘을 넘기진 않으실 것이니.”
사제들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신이 보우하시는데, 설마 큰일이라도 날까?
또한, 사제들은 두 부류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도 노선을 확실히 정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성전으로 번지면 아무래도 신전에 의탁하는 것이 좋겠지요.”
“맞습니다. 황제가 우릴 그리 홀대하는데, 에비뉴에 충성할 필욘 없다고 봅니다.”
강경파들은 이렇게 말했고,
“허어, 말조심하십시오. 밖으로 퍼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에비뉴가 이길 수도 있는 싸움입니다.”
온건파는 시간을 두길 원했다.
“신성국이 참전한 이상 에비뉴에겐 미래가 없어요. 여기 있다가 개죽음당하기 전에 떠야 합니다.”
“아직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더 흘러가고,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탁상공론은 끝이 나질 못했다.
“..어쨌든 신성국은 제국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렇게 되면 만약 이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린 설 자리가 없어요. 전부 죽을 겁니다.”
얼마 전, 비공식적으로 신성국에서 공문이 내려왔었다. 이번 성전에 대륙의 모든 신전이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말은 정중했으나 그 뜻은 분명했다. 만일 돕지 않는다면 뒷일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그들이 이번에 제국과 뜻을 함께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대륙 전체를 유일신 체제로 가겠다는 것이지요.”
신성국은 오래전부터 그 야욕을 숨기지 않아 왔었다. 대륙의 99신 중에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으뜸이니, 모두 최고신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지난 마도왕국 사건 때도 신성국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었는데, 그때 자칫 대륙 전체를 휘감는 종교전쟁이 일어날 뻔했었다.
다행히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신에 기대는 이들은 잊을 수 없었다.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신만을 강요하는 그들의 독선을 말이다. 그래서 성녀가 신탁을 청했다.
“마왕이 준동하고 큰 전쟁까지 터졌는데, 왜 신탁이 미리 내려오지 않은 걸까요?”
“그분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소. 하지만 모든 신전이 같으니 이유가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신탁이란 것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내려오기도 했었는데, 이번엔 너무도 잠잠했다. 에비뉴의 다른 신을 모시는 곳들도 사정은 같았다.
그때였다.
“나오셨습니다!”
기도실의 문이 열렸다.
수척한 성녀의 모습이 보이자 사제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신탁은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우, 우선 물부터..!”
성녀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것처럼 지쳐있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입술은 바싹 말라 찢어지고 눈 밑은 검었지만, 목소리엔 힘이 있다.
“이번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성녀의 말에 사제들이 단체로 움찔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택이라니요? 우린 그분의 뜻을 따를 뿐 아닙니까?”
신은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한 치 앞을 모르는 미래 아니던가? 여기서 믿음이 탄생하는데,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등불 같은 신탁을 그저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택을 하라니?
“그분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성녀가 등을 꼿꼿하게 펴고 자세를 잡자, 사제들이 몸을 숙였다.
“깨쳐야 할 자가 아직 깨치지 못하였으니, 나는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풀어야만 하는 것.”
“······?”
“······?”
사제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릴 때, 성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존중하리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발 빼고 지켜볼 터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란 것이었다.
“이, 이런..”
“끝입니까?”
“예,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성녀는 다시 힘겨운 걸음을 뗐다.
“어이쿠.”
늙은 사제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휘청거리다 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모시겠습니다. 일단 뒷일은 체력을 회복한 뒤 상의하시지요.”
“아니에요. 갈 곳이 있답니다.”
“지금 말입니까?”
“예.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신의 목소리는 사제들에게 전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녀는 보았다. 신탁을 기다리다가 체력이 다해 잠시 졸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예지인진 모르겠지만, 그 생생했던 장면은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도 두렵고 무서웠던 소름 끼치는 미래.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내일 아침에 가시지요. 마차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사제들의 만류에도 성녀는 그들을 뿌리쳤다. 그 강경한 모습에 사제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궁으로 가야 해요. 지금. 더 늦기 전에요.”
“궁이요?”
“어느 궁이요? 집정관께 가시는 겁니까?”
“아니요. 황비님을 만날 거에요.”
성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신전을 나섰다.
‘빨리 가야 해.’
아까의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의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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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요?”
-그렇단다.
번은 갸웃했다.
녹색 마녀를 사방에 보내놓았기에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이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직접 연락온 것은 처음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신전에 있어 달라는데,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더구나.
“흐음.”
성녀가 갑자기 움직일 이유가 없을 텐데? 콧등을 욱신거린 번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최후의 순간이 오면, 어머니가 궁에 계셔야 하는데.’
그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라면 안쪽에 믿을만한 내부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샨이 좀 더 컸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
‘빠르게 장악하려면 신전에선 늦어.’
번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집정관은 손을 쓸 거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1분 1초라도 의심을 피해야 했으니까.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샨도 잘 있죠?”
-그럼! 이번 경연에서 아주 훌륭했단다.
"네, 또 연락드릴게요."
통신이 끊겼다.
“흐음..”
신전에는 녹색 마녀가 들어가지 못한다. 아무래도 어둠 속성을 지닌 자들은 신전이 거북할 수밖에 없었는데, 벨버른 지역에 신전을 확장하는 것에 푹 빠져있다는 성녀를 딱히 써먹을 곳도 없어서 잊고 살았었다.
그런데 거슬린다.
왜 어머니를 찾아온 걸까?
「절대 궁에 계시면 안 돼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에요!」
재수 없는 말까지 남기고서 말이다.
‘그녀가 눈치를 챘을 린 없고. 헛소릴 할 여자는 아닌데..’
아무래도 찝찝한 것보다는 대비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계획을 조금 바꿔야겠군.’
번이 그렇게 생각에 잠기자 퐁이 물러난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번이 사방에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항상 근처에 대기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아도 24시간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한 분..’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일단 수면시간이 그랬다. 하루 2시간은 되나? 보통 사람이 그렇게 며칠을 버티면 제정신으로 생활하기 힘들 텐데, 번은 전혀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명을 만나 의견을 나누고, 틈틈이 나일과 세븐 스타를 오가며 배를 점검했다.
군대를 점검하고 그러면서도 저렇게 혼자 있는 시간엔 뭔가 열심이다. 명상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가 저럴 때면 주변 기운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기운에 친숙한 그녀이기에 볼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 모이는 수많은 기운들을 말이다. 애걸하듯 빨간 불씨가 살랑이고, 복걸하듯 푸른 아지랑이가 춤을 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달라붙어 어떻게든 관심받아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는 것들까지 포함하면 무려 수십 종류나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걸 말해줘야 하나 싶다가도 이내 머리를 저었다. 그러면서 얼굴을 돌려 방을 나왔다. 그에겐 많은 사람이 있고 유능한 자도 있으니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
그렇게 번은 홀로 남은 방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잘한 변수들이 생겨났지만,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육체의 기운을 계속해서 돌렸다.
이제 그는 수련을 할 때 무아지경에 빠지지 않는다. 머리와 몸을 완전하게 분리해 따로 움직일 수 있는 거다. 몸속 여러 기운은 폭포수처럼 흐르며 섞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활력을 세포 단위로 퍼트렸다. 빛 속성이 강하긴 하지만, 그걸 보조하는 신성력과 오색 마나는 궁합이 좋다.
‘슬슬 한계인가?’
몸을 관조하던 번은 그렇게 느꼈다.
며칠 전부터 성장이 멈췄다. 이렇게 수련을 하면 조금이라도 기운이 늘어나거나 육체가 강해져야 하는데, 이젠 아무런 변화가 없다. 보통 이런 경우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거나 더는 올라갈 곳이 없을 때.
하지만 아직 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으니, 후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벽을 뚫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봐.’
번은 악마를 불렀다. 이런 문제에 대답해줄 사람이 근처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번이 강해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경지에서 토론할 이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야.’
하지만 답이 없다.
며칠 전부터 악마는 수다를 떨지 않았다. 분명 안에 있는 건 느껴지는데 말이 없다.
‘뭐야?’
그 말 많던 녀석이 조용하니 왠지 불안하다.
‘내가 뭐 잘못했냐?’
삐친 건가? 떠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빛 속성 때문인가?’
최근 몸을 가득 채운 빛 때문에 악마가 불편해했던 것을 떠올린 번은,
“쩝.”
어깨를 으쓱하곤 일어섰다.
때 되면 알아서 떠벌리겠지, 여긴 것이다. 악마에 매달려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도 아니었고.
힐끔.
창밖을 본 번이 밖으로 나섰다.
이젠 시계가 없어도 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만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대공.”
복도에 대기하던 호위가 인사를 건네자 번이 말했다.
“메갈레우스가 도착했는가?”
“예.”
끄덕인 번이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말이 한 마리 있었고, 그 앞에 갑옷을 갖춰 입은 사내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메갈레우스.”
“대공.”
“어찌 됐는가?”
안부 따윈 생략한다.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신성국 놈들은 처음부터 몬스터는 안중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음흉하지만 일은 잘하는 사내 메갈레우스다. 번은 최근 이 자의 용병단에게 신성국에서 온 군대의 동향을 살피라 의뢰했는데,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폴라리스에 진입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곤 하는데, 그게 뭔진 잘 모르겠습니다.”
“마왕이 남하했다는 것을 아는 눈치고?”
“그건 이미 폴라리스 전역에 소문이 파다하니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지.”
번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물고기가 떡밥에 관심이 없다면, 싱싱한 지렁이로 바꿔 흔들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