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떡 #
“소식통에 따르면 에비뉴의 철의 군대가 곧 제국의 국경에 진지를 구축할 거라고 하니 우리도 그에 따른 대비를 해야 하오.”
번은 몇 가지 일을 더 지시하고 나섰다. 페트릭이 따라붙는다.
“나일로 가십니까?”
번이 끄덕인다.
“5개 신도시 공장장들에게 세븐 스타로 모이라 전하고.”
문득 어떤 생각이 났는지 돌아보며 말했다.
“그, 결승에서 나와 상대했던 자.”
“메갈레우스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자를 수소문해서 아직 콩가에 남아 있으면 내게 보내도록 하게.”
“그자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봐서.”
“으음.”
페트릭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능하지만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자입니다.”
메갈레우스가 이끄는 용병단 또한 거칠기로 유명했다.
“그런 건 상관없네. 내게 필요한 건..”
개를 잡을 늑대무리니까. 말을 흐리며 번은 회의를 마쳤다.
며칠 후.
번이 나일에 도착할 때쯤 대륙이 떠들썩한 사건이 터졌다. 에비뉴 황제가 직접 이끄는 철의 군대가 제국과의 국경 사이에 진지를 구축할 거란 예상을 깨고, 그대로 진군해 제국의 1차 방어선을 쳐버린 것이다.
한땐 강력한 변경백이 굳건히 지키던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그가 에비뉴의 창에 허무한 죽임을 당한 뒤론 사기가 바닥까지 곤두박질친 상태였다.
전쟁은 치열하고 처절했다. 10만의 병사가 지키는 성을 에비뉴 17만의 군대가 공격했고 이는 하루아침에 결판이 날 규모가 아니었다.
-이 더러운 에비뉴의 종자들! 여기가 네놈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주변국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국은 동맹국들에게 급히 지원군을 요청했고, 그건 에비뉴 또한 마찬가지다. 점령국에 징집령을 내리고, 모든 자원을 보급에 맞췄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든 번은 씁쓸하게 웃었다. 보나 마나 철의 깃발을 올리고 콩가군을 모아 참전하라는 것일 게다.
펄럭.
아니나다를까. 펼친 종이엔 반협박성 글까지 써있다.
「..국운이 달린 전쟁에 참전하지 아니하는 것은 에비뉴의 태자로서..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태자는 군사를 모아 양동작전을 시행하라.」
“흥.”
번은 종이를 구기며 비웃었다.
그걸 보며 편지를 가져온 병사가 움찔했다. 감히 황제의 서신을 저리 취급하다니..
하지만 번의 눈빛이 워낙 사나워 내색을 할 수조차 없었다.
‘같은 일을 두 번 당하면 병신이지.’
뭔가를 떠올리는지 번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위기에 처한 그를 돕고자 전장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점수를 딸 기회라 여겼고, 결과도 좋았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 이 외진 콩가에 덩그러니 버려지지 않았나?
“생각해보고 답장할 것이니, 대기하라.”
“넵! 태자님!”
에비뉴에서 온 병사가 저쪽으로 사라지자, 번은 비릿하게 웃으며 강변을 바라보았다.
-어이, 거기 뒤틀렸다! 정신 차리라고 몇 번을 말하나!
-긴장해!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다!
-줄을 당겨라! 영차! 영차!
배가 완성되고 있다. 그 한 척이 웬만한 성 한 채만큼 대단한 위용을 지녔다. 공식적으론 강을 오르내리며 무역을 하기 위한 상선과 그 상선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드는 호위선이라 했지만, 이것들은 전부 전투, 수송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병기였다.
‘늦어도 두 달이면 끝나겠군.’
뼈대가 완성되면 그 후엔 디테일만 잡으면 된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에비뉴에서 아무리 지원군을 요청해도 2달만 억지로 시간만 끌면 강력한 한방을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아직 하나가 부족했다.
마침 그 열쇠를 쥔 자가 번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태자님!”
“왔는가?”
반가운 얼굴. 최근 콩가에 합류한 리켄스다. 본래 그 능력을 인정받아 에비뉴에서 요직에 머물며 하나 상단을 맡아왔는데, 전쟁 때문에 상단의 기능이 멈추고 그것이 전부 군대로 편입되어 군사보급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니 실업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틈을 타 이 기회에 빠져나와 버렸다.
“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리켄스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일 처리가 빠르다.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아 5개 신도시와 나일에서 진행하는 신기술사업을 도맡아 수행 중이었다.
“어떻게, 시일에 맞출 수 있겠나?”
번의 말에 리켄스가 번과 나란히 서서 강변을 바라보았다.
“큰 문제만 없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력원이 제대로 작동할지가 미지수라..”
저 배들이 제 성능을 내려면 이 세상에 없는 월등한 동력이 필요했는데, 그게 지금 5개 신도시에서 부품이 만들어져 세븐 스타의 은밀한 지하에서 조립 중이었다. 화석 연료를 태워 피스톨을 움직이는 엔진. 그 개념을 마법사들에게 전해주자 그들은 ‘마나’를 이용해 전혀 다른 물건을 창조했다.
이게 번의 구상대로만 작동하면 여기 나일에서 에비뉴까지 불과 며칠이면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저 강을 타고서 말이다.
“두 달이야. 그 안에 무조건 성사되어야 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번이 생각할 때 두 달이면 철의 군대가 제국의 1차 방어선을 뚫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번도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한다. 재수 없으면 황제가 직접 콩가로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디로 튈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그 남자가 발이 묶여 있을 때 작업을 끝내놓아야 했다.
“용기병 모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어린 드래곤을 내세워 여왕은 지원자를 모집하기로 했다. 조국을 수호하자! 애국심에 호소하며 명예를 강조했다.
“순조롭습니다. 이달 말이면 7천, 다음 달이면 1만은 충분할 거로 예상됩니다.”
이는 군대가 사방으로 빠질 경우 수도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을 보유하고자 함인데 드래곤이란 상징이 꽤 잘 먹히는 모양이다. 비록 어중이떠중이 실전 경험 없는 어린 녀석들이 대부분이라도 1만이면 적은 수가 아니었다.
“으스댈 수 있게 그럴듯한 휘장 하나 달아주고 자긍심을 계속해서 심어줘.”
“너희들은 드래곤의 선택을 받은 용사들이다! 말입니까?”
“그래.”
그 사명감이 길게 가진 못 하겠지만, 당분간은 굶주린 배를 거뜬히 버틸 정돈 되리라.
이렇게 번은 군대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다. 전쟁통에 어영부영 문어발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부대를 만들었는데, 몇 개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고 몇 가지는 송곳이었다.
적의 심장 깊이 박아 넣을 뾰족하고 날카로운.
“그럼 계속 수고해주게.”
“예!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리켄스가 바삐 떠나가자 번은 홀로 남아 다시 강변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중이었다.
‘에비뉴에서 마약 공급을 끊었으니 금단에 시달리는 제국군은 오래 버티질 못할 거야.’
황제는 영리했다. 오래전부터 물 밑 작업으로 상단을 굴리며 유통 루트를 확보하고 제국의 돈을 쪽쪽 빨았다. 교역은 위장막이고 마차엔 마약이 실렸다. 그걸 어느 시점에 조금씩 가격을 올렸고, 그렇게 쌓인 돈은 군자금으로 차곡차곡 모였다.
그러다가 최근 아주 싼 값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약이 제국 전체에 풀렸다. 그게 말해주는 것은 너무도 뻔하다.
총력전.
이제 마약을 비축할 필요도, 그것으로 돈을 모을 이유도 사라졌다. 거사 전에 많은 이들을 중독시켜 무기력하게 만들고 공급을 중단해 미치도록 하려는 거다.
‘변수는 동맹인데..’
주변국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이 전쟁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벌써부터 좋지 않게 흘러가는 조짐이 보였다.
신의 망치.
그놈이 움직였다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제국만큼 거대한 힘을 지닌 신성국이 참전하면 그놈들이 어느 편에 서냐에 따라 축이 흔들릴 것이니까.
“신의 망치라..”
이놈들이 골치 아픈 게 일반인을 ‘선동’할 수 있다는 거다. 그들에게 대적하면 마귀가 되고 무조건 악의 축으로 몰린다. 신이 버젓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그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되고, 여론은 곧 민심이, 민심은 군중의 뜻으로 모일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사람을 더 기다린다. 올 때가 됐는데.. 라고 생각할 때쯤.
“대공.”
로브를 깊이 눌러쓴 작은 체구의 여인이 다가왔다.
“늦었군.”
“일이.. 좀 있었어요.”
“내가 알아야 할 일인가?”
“아니에요. 해결했어요.”
녹색 마녀 퐁.
얼굴을 흔들자 그녀의 머리가 찰랑거렸다.
“바로 시작하지.”
번이 손을 내밀었다.
“네.”
퐁이 다가와 그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이건 녹색 마녀만 할 수 있는 소통이다.
“락샤, 들려요?”
퐁이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퐁. 나 락샤에요.
퐁의 손을 잡고 있는 번이 입을 열었다. 이미 몇 차례 해보았던 의식이기에 낯설지 않다.
“번이다.”
-네, 대공.
“융이 옆에 있나?”
-잠시만요.
오늘쯤 연락을 취할 거라 미리 말해두었기 때문에 저 먼 폴라리스 어디쯤 있던 융이 이렇게 바로 대화가 가능하다. 번은 무투 대회를 준비하며 녹색 마녀들을 구석구석에 흩어놓았는데, 앞으로 그녀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저에요. 태자님.
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솨아아아아.
강바람이 불어왔다. 그 소란에 번의 목소리가 살짝 묻혔다.
“..그래서 일정을 약간 변경해야 할 것 같다.”
-저희도 신성국에서 군대를 보냈다기에 어찌해야 할지 대기하고 있었어요. 싸우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러면 고생해서 모은 군대를 잃을지도 몰라요.
“맞설 필요는 없지.”
폴라리스는 설명우가 살던 21세기의 몽골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대부분 유목민이며 도시라고 해봐야 그리 크지 않은 규모다. 너른 초원과 황야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몬스터 군단이 숨기에 적합했다. 거기에 식량으로 쓸 가축도 많았고.
“목적지가 노출되지 않게 이동하면서 남하해.”
-에비뉴로요?
“그래.”
-언제까지요?
“두 달.”
-알겠어요.
번이 가진 모든 패가 한곳에 모인다. 그때 판돈을 누가 먹을지 결정될 것이다.
-참, 그리고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뭐지?”
융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달라붙어 있다.
-그의 정신상태가 최근 아주 나빠지고 있어요.
융이 말하는 ‘그’가 누군진 모두가 알 거다.
“두 달도 버티기 힘든가?”
-노력은 해보겠지만, 자칫 폭주하면 저로선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별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볼게요.
“그래. 머지않았어. 조금만 버티면 된다.”
원래부터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가진 해골바가지다. 언제 미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에비뉴에서 대신들이 태자를 새로 뽑을 거란 얘기가 돌고 있다고 해요. 아세요?
번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다.”
-네, 혹시 모르고 계실까 해서요. 아시면 됐어요.
융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지만, 번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태자?
그딴 자리 따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황제가 자릴 비켜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도 없다.
“또 연락하지.”
번은 통신을 끊고 다시 강을 본다. 퐁이 뒤에 섰다가 머리를 숙이곤 저쪽으로 멀어졌다.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참 많이도 노력했다. 그렇게 태자가 되었고 인정받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다 신기루였다.
내 손에 쥘 수 없는 헛것과도 같은 것.
떡 줄 사람은 애초부터 생각도 없었던 거다.
“······.”
강을 바라보던 번의 시선이 물줄기를 따라 남쪽을 향한다.
“주지 않는다면.”
그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내가 직접 계승하러 간다.”
황좌.
저 강물 끝 어딘가에 있을 그 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