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64화 (164/177)

# 싸워라! #

이미 답은 나왔다.

검을 막아야 한다. 죽을 순 없으니까!

대신 그냥 당하진 않는다.

메갈레우스는 최대한 발끝을 뻗었다. 상체를 들이미는 대공의 명치를 정확히 차 가슴뼈가 함몰될 정도로 힘을 실어서 말이다. 한데,

“······!”

그가 뻗는 발등을 뭔가가 터억! 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발등을 밟혔다.

“쯧.”

번은 자신의 예측과 똑같이 움직이는 메갈레우스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검을 놓는다. 그걸 왼손으로 역으로 쥐고, 오른손은 뻗는 방향을 향해 다시 불끈!

쩌엉-!

“커허..”

메갈레우스의 발을 밟고 튀어 올랐으니, 번의 몸은 더 빨라졌다. 주먹은 정확하게 그의 턱을 때렸고, 휘릭 왼손으로 바꿔 잡은 검은 아름다운 호선을 허공에 그린 뒤 한 지점을 향해 겨눠진다.

츠아아앗!

주먹에 맞아 한껏 젖혀진 메갈레우스의 목에 핏줄이 번졌다. 아슬아슬하게 피부만 파고 들어간 검날이 어느새 멈췄다.

“······!”

경악한 표정의 메갈레우스.

모두가 숨을 죽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빨랐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기까지!'

번도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여느 때처럼 담담하고 평온하다.

이것이 개와 호랑이의 차이.

본질은 개라서 메갈레우스의 공격이나 행동패턴을 죄다 꿰고 있어도, 겉모습만큼은 강자의 여유가 넘쳤다. 호랑이는 죽기 직전에도 꼬리를 말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 차이가 아주 많은 것을 바꾼다.

-우와아아아아아!

-뭐야? 상대가 안 되잖아?

-으아아악! 다 끝났어! 끝났다고!

-저 개자식! 빈 쭉정이였어!

주르르륵.

또옥, 흘러 떨어지는 피를 보며 사회자가 두 팔을 힘껏 들었다가 내리며 외쳤다.

「그마아아아안!」

이미 승부가 났지만, 메갈레우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왜..?”

아무리 대공이 빠르다고 해도 그가 점친 승률은 70%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패했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번은 피식 웃으며 검을 거뒀다. 그러면서 말한다.

“알려줬잖나.”

개는 개싸움만 할 뿐이다. 그걸 벗어나려면 호랑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본성을 버릴 수 있을 때 얘기겠지만.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님! 승!」

축제가 막을 내리는 사회자의 선언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걸었다.

‘타이틀은 땄으니.’

이제 새로운 대진표를 짤 차례다.

대륙 전체를 상금으로 건 아주 큰 판의..

.

.

.

“자네, 이제 뭐 할랑가?”

“글쎄···.”

무투 대회가 끝나자, 콩가에 모인 용병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졌다.

“돈은 좀 남았고?”

“없지.”

분위기에 휩쓸려 콩가까지 오긴 했는데, 앞으로가 막막했다. 대회가 열렸던 5개 신도시는 이미 포화상태였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일거리나 찾아보든가 해야지. 산 입에 거미줄 칠 순 없으니까.”

“에잉.”

사내가 일어서자, 같이 있던 남자가 갸웃했다.

“어딜 가려구?”

일어난 사내가 씨익 웃으며 손으로 뭔가를 쥐는 시늉을 한다.

“놀면 뭐해.”

“어이구, 그렇게 날리고 또 도박인가?”

“본전은 찾아야지.”

대회가 끝났지만, 유흥단지는 언제나 성황이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워서 대회 날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이제 그 목적이 도박으로 바뀌어버렸다.

애초에 하루 벌어 이틀 먹고 사는 이들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고도 운만 있다면 일확천금을 만질 수 있는 유혹은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운만 있다면 말이다.

“제기럴. 또 잃었네.”

그날 밤.

텅 빈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사내는 거리로 나왔다.

이제 정말 한 푼도 없다. 뭐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먼 도시로 떠나자니 귀찮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일하자니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속된 말로 발에 채이는 게 용병이니, 쓸만한 일거리가 생기면 금세 꽉 찼다.

꼬로록.

“씨불..”

배를 문지르며 사내는 터덜터덜 걸었다. 밤이슬 피할 수 있는 어디 큰 나무 아래에서 잠이나 잘 요량으로 말이다. 그렇게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우뚝 멈춰 선 그.

“음?”

아까 도박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그새 누가 붙여놓았나 보다.

“구인광고?”

사람을 구한다는 뜻인가? 생소한 단어에 무심코 훑어본다.

「임시 자경단원 모집.

성실하고 열정 있는 청년을 모십니다.

계약조건: 하루 12시간 근무.

하는 일: 도시를 수호하는 모든 행위.

보수: 일 2회 음식을 제공하며, 1달째 되는 날 10실버를 일괄지급한다.」

“이게 뭐라는 겨?”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그였기에 알아볼 수 있는 단어가 몇 개 없었지만, 10실버라는 건 알아보았다.

“더럽게 짜네.”

용병 일을 하면 매달 1골드는 거뜬히 벌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귀찮아 다시 용병일을 가진 못할 것 같긴 하다. 유흥단지와 멀어지면 그것도 문제였고. 게다가 평생 이곳저곳을 다녀봐도 여기만큼 마음에 꼭 든 곳도 없었으니,

“흐음.”

투덜거리면서도 사내는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리곤 지나가는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누가 오면 이것 좀 자세히 물어볼 요량으로.

“10실버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까짓거, 불리면 되는 거 아니야?’

분명 아니다 싶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이미 도박장을 향해 거세게 뛰고 있었다.

.

.

“벌써 몇 달이지?”

번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엔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페트릭과 다루 자매 같은 발키리 핵심 인물부터 피벗 공작 같은 콩가의 주요 인사까지 자리해있었다.

“짧은 시간이 아니니 오며 가며 여인들과 정도 붙었을 거고, 거리는 익숙하니 내 집 같고, 괜히 나섰다가 전쟁통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을 거야, 그치?”

번의 질문에 페트릭이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가 봅니다.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아서 예산을 추가 편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페트릭의 말에 번은 고개를 돌려 피벗 공작을 보았다.

“감당이 되겠소?”

“물론이지요. 그들 월급으로 나간 돈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국고로 환수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큰 손해는 아닐 겁니다.”

콩가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병력이었다. 주변국과 힘겨루기를 하려고 해도 필요한 것이요, 제국에 맞서기 위해서도 일정 수 이상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본래 그리 큰 왕국이 아니었던 터라 급격하게 군대를 키우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데 기회가 생겼다.

무투 대회 덕분에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난민들. 이들을 전부 징집할 순 없겠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손을 빌릴 수 있다면 삽시간에 몇 배로 군대를 키울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좀 알겠소? 내가 그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번의 말에 피벗 공작이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5개 신도시.

거기에 딸린 유흥단지는 엄청난 부를 왕실에 안겨주었다.

사람은 살려면 돈이 든다. 먹고 마시고 자다가, 심심해지면 놀 거리를 찾는다. 유흥단지는 그런 이들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최적화된 곳이었고, 지금도 새로운 볼거리 놀 거리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었다.

이걸 정부에서 주관하니 세금은 절로 걷혔고, 사람들은 조금만 멀리 가면 싼값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눌러앉았다.

귀찮은 거다. 노는대도 체력은 소모되니까. ‘왔다 갔다 할 시간에 한판이라도 더 해야지!’ 전형적인 도박꾼 마인드로 말이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끌어모아야 하오.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언제든 투입할 수 있도록. 나라가 망하는 것보단 가난한 게 훨씬 나은 거니까.”

“알고 있습니다.”

번은 신도시의 용병들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물론 공고엔 임시 계약직이라고 써두었지만, 근로기준법勤勞基準法도 없는 이 세계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평소엔 도시를 떠나지 못하게 밥만 잘 챙겨주고, 병력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동원한다. 두당 10실버가 전체로 보면 부담이 가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든든한 보험을 들어 두었다고 생각하면 속 편하다.

처음 목표로 잡은 인원이 7만에서 8만.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지원하고 있어 이 속도라면 10만을 넘어설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이 모일 수도 있는 일이고.

10만 명.

비록 한 달 정도만 간을 보거나 며칠 하다 관두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건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에비뉴에서 황제가 전쟁을 하기 위해 데리고 나간 숫자가 약 4만에서 6만이다. 물론 콩가에 모인 용병을 그 유명한 철의 군대와 비교할 순 없어도 머릿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걸 유지할 돈인데, 1달에 10만 골드가 나간다고 가정하면 그게 도시에서 소비되며 다시 세금으로 걷히니, 약 2만 골드는 돌고 돌아 회수된다.

도시는 풍족해지고, 물가는 오른다. 차익을 챙기기 위해 상인들이 몰려오고, 그렇게 되면 시장은 점점 더 커져서 더 많은 세금이 걷힐 것이다. 뭐, 그렇다 해도 이걸 언제까지나 유지할 순 없지만 말이다.

‘그럴 필요도 없지만.’

번의 계획은 앞으로 딱 1년만 버틴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리라. 에비뉴가 망하든, 제국이 망하든 간에 말이다.

“초반엔 기강확립을 해야 하니, 예정대로 페트릭 그대가 자경단을 잘 관리할 거로 믿겠네.”

“맡겨만 주십시오.”

이제 발키리는 페트릭이 없어도 잘 돌아갔다. 하지만 새로운 부대는 아무래도 여자가 수장으로 앉는 것보단 사내가 나을 것이다. 용병들은 다루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니까.

“그중에 가장 쓸만한 자들 5천을 추려서 내게 보내고.”

번의 말에 페트릭이 이마를 조금 찌푸렸다.

“5천 명이요?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예정에 없던 말이라 피벗 공작도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번은 가볍게 웃었다.

“기동력이 뛰어난 별동대를 운영하려고 하오. 3만 골드면 어느 정돈 버틸 수 있지 않겠소?”

“······?”

순간, 피벗 공작의 눈썹이 구겨졌다.

“상금.. 말씀입니까?”

그 돈은 국고로 환수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피벗 공작이다. 번이 대회에 출전할 때 그런 뉘앙스로 말했었으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그런 거금이 어디 있겠소?”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투로 번이 바라보자, 피벗 공작이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사병 오천이 대체 왜 필요하신 겁니까?”

군대라 하긴 적은 숫자지만, 개인이 소유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병력이다.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하면 영주성 하나는 기습할 수 있는 머릿수 아닌가? 번처럼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왕궁도 노려볼 수 있고.

“사람 일 모르는 것 아니겠소? 내, 따로 독하게 훈련 시켜 쓸만하게 만들 터이니 마음 놓아도 좋소.”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피벗 공작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번이 시선을 돌리며 다른 화제로 돌렸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라오. 사방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그 여파가 언제 우리에게 튈지 모르는 상태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아니 되오. 축제는 끝났소. 이젠 흥을 놓고 집중할 때란 말이오.”

번은 말을 하며 힐끔 피벗 공작을 보았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오천 명의 사병은 일개 부마가 가지기엔 말도 안 되는 무력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정확히 본 것도 맞았다. 번이 그 오천으로 노리고 있는 것이 궁宮이니까. 다만 그것이 콩가가 아닐 뿐.

‘싸워라.’

물이 좀 더 혼탁하고 더러워져야 미꾸라지가 숨어들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거의 다 끝났다.’

발키리, 용기병, 오천의 추가 병력과 ‘그것’이면, 이 전쟁.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반전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이제 하나.’

그것만 손에 넣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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