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63화 (163/177)

# 개싸움 #

경기장에 모인 수만의 관중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회장으로 들어서며 번은 그들을 둘러본다.

-와아아아! 눈부십니다!!

-오늘도 멋지세요!

이미 번의 이름은 영웅과 다름없었다. 처음 그가 참가했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지난 스물한 번의 싸움에서 그는 단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도박꾼들은 이제 번의 승리를 점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빛의 검. 빛의 대공.

번에게 새로 생긴 별명이었다.

‘빛이라..’

사실 번은 여러 능력을 봉인하며 싸워야만 했다. 악마의 꼬리도 내보일 수 없었고, 삼안을 쓰거나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한 것이었고, 의심을 살만한 행동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물론 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최근 나일에서 마법사로 불리고 있기도 했으니, 적당히 둘러대면 뭐든 갖다 붙일 순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왜?

멋있어야 했으니까.

그 누구도 이 승리에 불만이 없어야 했다.

'피날레 인가?'

대중은 아름답고, 예쁘고, 정정당당한 것에 열광한다. 그렇기에 다소 부족하더라도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험로를 가야만 했는데, 소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21번의 싸움을 통해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보여줘야지.’

물론 제국의 검도 없고, 에비뉴의 창도 없다. 신의 망치도 참가하지 않았다.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셋이 빠진 대회. 여기서 우승해 봐야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 반쪽짜리 영광뿐이란 걸 알지만, 애초부터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허명 따위가 아닌, 진실로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가 번에겐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이제 남은 한판만 거치면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강하다고.

혼자 드래곤을 때려잡고, 대악마를 물리칠 순 없어도 이제 인간들 사이에선 한 손에 꼽을 정도는 될 것이다. 아직 이십 년도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이십 년을 더 버틸 수만 있다면, 그땐 그 무엇도 앞을 가로막지 못하리라. 그게 설령,

‘신이라도.’

대항할 수 없는 어떤 존재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방심할 상대가 아니야. 집중해라.

생각을 깨고, 악마가 말했다. 녀석이 긴장하는 것처럼 저 앞에 선 사내는 꽤 강한 자였다.

-메갈레우스! 너에게 내 전 재산을 걸었다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

-메갈레우스!

-우와아아아아! 메갈레우스!

북부 왕국 출신의 메갈레우스는 용병 밥만 30년 이상 먹은 자였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검술을 배운 적도 없었고,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천재. 사람을 죽이는데, 모든 능력이 맞춰진 살귀였다.

심지어 지략도 뛰어나 그가 이끄는 용병단은 12년째 단 한 번의 임무도 실패하지 않았고, 성공하지 못할 미션은 그들에게 마치 없는 듯했다.

그런 그가 오늘 최대의 난관을 만났다. 콩가의 대공은 그의 리스트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둥둥! 북이 울렸다.

사람들은 침을 꼴깍 넘기면서 초조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이 오르면 최강의 사나이를 뽑는 역사적인 순간이 온다.

「황혼의 늑대! 메갈레우스!」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메갈레우스가 가볍게 검을 들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응원하는 열기가 뜨겁게 휘몰아쳤다. 적게는 며칠 밥값부터 많게는 가진 모든 돈을 도박에 건 사람들이 한몸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번은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긁었다.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너와 상당히 비슷한 전술을 구사하는 녀석이다. 빠르고 허를 찌르지.

‘······.’

번은 혀로 입술을 살짝 축였다.

스물한 번의 싸움을 겪으며 그가 본 것은 상대만이 아니었다. 다른 조에서 승리하고 올라오는 대전자들도 모두 지켜봤다. 그러면서 번은 그들의 검술이나 동작, 싸움의 방식 같은 것들을 연구하고 복기했는데, 이 모든 것이 번에겐 수업이었고, 훈련이 되었다.

그 중엔 당연히 저 메갈레우스도 있었는데, 저자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실전 검술의 대가였다. 설명우의 삶을 살 때,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만약 거기에 ‘검’을 다루는 자가 출연할 수 있었다면 저 메갈레우스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에너지 소비로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내는 방식. 철저하게 상대의 급소만 노려 공격하며 필요할 땐 언제든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목을 취하는 그의 전투는 아마도 전장에서 피로 쌓아올린 경험의 탑이 그만큼 굳건하다는 뜻일 거다.

만약 번이 없었다면 충분히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을 만한 실력자인 것만은 분명한 자. 그러나,

‘운이 없군.’

번은 자신이 있었다.

왜?

같으니까. 저 메갈레우스의 검술은 번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오로지 살아남으려는 동물의 본능적인 공격법. 상대를 잡아먹을 것 같은 투지와 살기를 바탕으로 하는 이 투쟁은 오히려 번이 전문가 아니던가?

사자와 호랑이가 만났다.

늑대와 들개가 만났다.

이럴 때, 답은 간단하다.

‘하필..’

더 강한 놈이 이긴다!

‘날 만나다니.’

번은 머리를 흔들며 검을 쥔 팔을 거볍게 털었다. 그러자 소맷자락이 휘리릭 자릴 잡았다.

「결승전인 만큼 여기까지 올라온 영웅들에게 각오 한마디씩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이 경기뿐이었다. 이전까진 하루에도 몇 경기씩 볼 수 있었지만, 결승전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30분이 걸릴 수도 있고, 1초 만에 끝날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사회자는 시간을 끌어 흥을 돋우고 싶었다.

그는 메갈레우스 쪽으로 걸어가서 손에 들고 있던 마법확성기를 뻗었다.

“메갈레우스님, 오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

긴장한 채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려보고 있던 메갈레우스는 산통을 깨는 사회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빛의 검을 피할 자신이 있습니까?”

대공의 검은 빠르기로 유명했다. 이전 경기에서 그 눈부신 빛이 번쩍! 하는 순간, 상대는 어김없이 쓰러졌다. 21번 모두 말이다.

“나는 내 길을 갈 뿐이다. 그곳엔 언제나 빛은 없었지. 피와 죽음만 남았을 뿐.”

“오오오-! 멋진 말입니다! 과연 용병계의 전설! 황야의 늑대답습니다!”

큰소리로 외친 사회자는 다시 쫄래쫄래 뜀 걸음으로 번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만, 시작하지. 본 대공이 일이 많아서 말이야. 1분 1초가 급하거든.”

지금 시국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과 에비뉴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고, 콩가 북쪽에선 마왕이 설쳐대며 그 마왕을 잡고자 신성국에서 신의 망치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아, 넵!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번의 묵직한 말에 사회자가 움찔 뒷걸음을 쳤다. 한데, 말소리가 그의 뒤에서 이어졌다. 휙 돌아서는 사회자의 눈에 성큼 다가선 메갈레우스가 보인다.

“그리 바쁘시면 기권하셔도 됩니다. 몸 성히 돌아가실 순 없을 것 같은데. 귀하신 분이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도발이었다.

확실히 메갈레우스는 전술에 능한 자였다. 조금이라도 상대의 심력을 소모시키려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슬쩍 올리는 입꼬리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자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군.”

가볍게 운동 삼아 나온 것 같은 표정으로 목을 좌우로 꺾어 보이는 번.

우둑, 우두둑.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그 행동에 메갈레우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더는 대화가 불필요할 것 같군요! 그럼 대망의 결승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사회자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후다닥 물러나자, 두웅-! 북이 울렸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슈우우우욱!

아직 북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메갈레우스의 검이 뱀처럼 번을 향해 날아왔다. 기본적으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금지된 대회. 그런데도 메갈레우스의 검은 번의 오른쪽 눈동자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차아!”

호기 있게 기합성을 외치지만, ‘뒈져라!’라고 쏘아붙이는 것 같다.

3만 골드.

평생 용병 일을 하지 않아도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그러나 지금 메갈레우스의 머릿속엔 이미 그 돈은 없었다.

그저 이기고 싶었다.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며 잘났다고 설치는 저 대공의 재수 없는 눈알을 하나 뽑아내고 싶달까?

‘됐..나?’

기습은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전력이 담긴 공격이었고, 맛보기나 몸풀기 따위를 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만큼 그의 검은 암살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상대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사지 어딘가에 깊이 칼이 박힌 후 일만큼.

“황야의 늑대라..”

하지만 지금.

“본 대공이 하나 알려주지.”

서로 반 보 거리.

얼굴을 살짝 틀어 메갈레우스의 검을 비낀 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개가 개를 만났을 땐 말야.”

메갈레우스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는 번은 오른발로 바닥을 쿠웅! 딛고, 허리에 힘을 실었다.

“짖거나 이빨을 드러내기보다는···.”

휘익! 번의 상체가 돌아가고,

“대범하게.”

원심력이 실린 팔꿈치가 메갈레우스의 관자놀이를 향한다.

파앗!

“······!”

하지만 메갈레우스는 급히 얼굴을 숙였다.

이 또한 멋진 회피였다.

오랜 경험이 그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고, 판단력 또한 훌륭했다.

“담대하게.”

그러나 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칼을 쥔 주먹을 위로 올려친다.

이건 검술이라고 볼 수 없었다. 굳이 검을 활용하지 않아도 검날의 날카로움에 기대지 않아도 그때그때 최고의 공격을 찾아간다. 온몸이 무기랄까?

“그래야.”

콰앙-!

메갈레우스는 가까스로 팔을 교차해 번의 주먹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몸이 붕 떠올랐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호랑이 흉내라도 내 볼 것 아니겠나?”

알맹이가 뭔진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상대와 똑같이 하면 딱 거기까지. 개똥밭에서 함께 구르거나 싫어도 개싸움에 뛰어들어야 한다.

“크흡..?”

“어딜 가나?”

번의 움직임은 시원시원했고,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화려하고 큼직한 그 동작들은 관중을 열광케 하고, 메갈레우스에겐 비참함을 준다. 번의 주먹질에 담긴 힘을 이용해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려 자리를 회피하려던 메갈레우스. 그런 그에게 번이 바짝 따라붙었다.

"여기!"

몸을 바짝 숙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주먹을 아래에서 위로 뻗는다.

어퍼컷!

다른 점이 있다면 쥔 아귀에 검이 잡혀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당하는 입장에선 최악이 되었다. 새하얀 빛을 뿌린 검이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싹둑 잘라버릴 것같이 올라오고 있었으니, 뒤로 물러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옆으로 튀고자 한다면 다리가 잘릴 것이오, 검을 막고자 급급하면 주먹에 당할 것이다.

‘뭐, 이런?’

기상천외한 변칙 공격에 메갈레우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이런 쪽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자신 아니었나? 몸과 마음이 딱딱하게 정형화된 돌대가리 기사들이나 어릴 때부터 틀에 굳은 부잣집 도련님들을 상대로 의외성 하나로 허를 찔러왔던 그가 오늘은 반대의 처지에 몰렸다.

‘마,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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