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62화 (162/177)

# 신의 망치 #

“내가 왜?”

기분이 나쁜 듯 번의 말투가 퉁명스럽다. 페트릭은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폐하를 돕고자 군사를 모으신 게 아닙니까?”

최근 번은 5개 신도시에 있던 발키리를 모두 수도로 소집시켰다. 페트릭은 이 움직임이 에비뉴를 지원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고.

“내가 왜 내 새끼들을 사지로 내보내?”

“······.”

번은 피식 웃다가 설명을 갈구하는 페트릭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에비뉴의 태자이기도 하지만, 콩가의 부마이기도 하다. 콩가의 왕께서 승하하신 지금, 그녀 옆엔 나밖에 없어. 힘이 되어 줘야지. 내 사람인데.”

“하지만.. 황명이..”

“그 분께선 나 없어도 잘하실 거야. 나도 어엿한 가장이라고. 내 식구 내가 챙겨야지.”

번은 저쪽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보며 말했다.

“에비뉴에 전해.”

“말씀하십시오.”

서기였다. 그가 번의 말을 적을 준비를 했다.

“최근 이웃 나라에 준동한 악의 무리, 아니다. 마왕이라고 써.”

“예.”

“마왕이 언제 국경을 넘어 콩가를 위협할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 더해 무투 대회에 모인 거친 용병들과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이를 통제하고자 일정 병력을 상주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라도 에비뉴를 위해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아 소자, 안타깝고 애석합니다. 또한, 콩가에서 소자의 영향력이 넓지 않고, 위급한 순간 조국을 돕고자 일어서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

페트릭은 멍하니 번을 바라보았다. 영향력이라니.. 콩가의 대신들은 이미 에비뉴의 태자가 여왕을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있다며 투덜거릴 정도 아닌가? 섭정도 이런 섭정이 없다며 말이다.

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콩가는 위태롭습니다. 소자, 최선을 다해 기둥 빠진 콩가의 버팀목이 되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님. 소자에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길 간청합니다.”

끝났다는 듯 번이 끄덕이자, 서기가 묻는다.

“급보로 보낼까요?”

매의 다리에 묶을지 묻는 거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라는 투로 말하는 번이다.

“예.”

서신을 챙겨 서기가 나가자 페트릭이 물었다.

“폐하와 척을 지시려는 것입니까?”

“그렇게 보이나?”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뭐..그럼 그러라지.”

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페트릭으로선 그리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최근 에비뉴에서 벌어졌다던 황자들의 경연 소식에 태자의 자리가 위태롭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눈 밖에 날 수도 있지 않은가?

“재고하셔야 합니다. 서신이 에비뉴에 도착하면 대신들이 태자님께서 몸을 사린다며 물어뜯을 것입니다.”

“몸 사리는 거 맞아.”

“태자님..”

페트릭은 당황했다. 번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저돌적이고, 진취적이었던 사람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그는 전쟁을 어떻게든 비켜가려는 겁쟁이로 보였다.

“총사령관.”

페트릭은 발키리 부대의 총사령관직이다.

“예, 태자님.”

“자네가 뭘 걱정하는진 알겠는데, 나는 이미 여기 콩가에 남겨졌을 때부터 에비뉴의 뒤를 이을 후계자에서 멀어진 거야.”

“······?”

“감투만 태자라 해놓고, 다시 불러들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시겠지.”

“하지만 태자님만큼 유능하시고, 훌륭하신 다른 황자도 없습니다.”

페트릭의 말에 번이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그래서 더 안 되는 거야.”

번은 기억한다.

-나는 폭군이 될 것이다.

그날 일을 어찌 잊으랴.

-역사? 그런 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역사를 쓰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전설을 만들 것이다. 신화를 구축할 거다. 창세가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고, 혼돈이 필요하다면 주저 없을 것이다.

고작 9살짜리 아들을 앞에 두고,

-그래서 너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에 대해 너무 몰랐다. 그것이 네가 실패한 원인이다. 적을 바로 아는 것. 승리는 언제나 그것에서부터 나온다.

적敵이라 말한 사람을.

마음이 잠시 흔들렸기에 벨버른에서 이룩했던 모든 것을 털렸다. 그를 아비라 생각했기에 태자라 불러 주었을 때 울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에겐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 길을 가야지.”

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페트릭의 앞에 섰다.

“자네가 여기 콩가에 왔을 때, 내게 했던 말 기억하나?”

“남은 목숨, 바치겠다 하였습니다.”

번은 페트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 그럼 바치게.”

“······!”

페트릭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오래 전 우리가 람보르에서 했던 것처럼 나는 또 한 번 모험을 할 거야.”

제국이 칼을 뽑았고, 에비뉴가 거기에 응했다. 사내라면 언젠가 한 번쯤 인생을 걸고 승부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리고 번에게도 그 시기가 찾아왔다.

치열했던 삶.

하루하루가 아닌 적 없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모든 것을 던져야 하니까.

“그땐 자네에게 내 옆자리를 약조했지만.”

번의 눈이 번뜩였다.

“이번엔 벨버른을 주지.”

번의 그림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채색을 하고 말리면 되는데, 그 전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커다란 먼지 하나를 떼어내야 했다.

“한번 걸어볼 만하지 않겠나?”

황제라는 이름의 티끌을.

“저는 그저 태자님 여정에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제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하지만..”

그도 아버지라 그렇다. 번이 잘못되면 남겨질 사람 중엔 그의 딸도 포함되니까.

“찾아보면 좀 더 쉬운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꼭 가시밭길을 가셔야 할 필욘 없으십니다.”

번도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지금 페트릭이 보이는 눈빛이 이미 주종관계를 넘어선 가족에게만 보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란 걸 아니까. 하지만,

“가시밭길 너머에 있네.”

번은 물러설 수 없다.

“내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것이 말이야.”

황제가 제국을 삼키면 그땐 이미 돌이킬 수 없어질 것이 분명하니까.

.

.

.

인간사는 전쟁이란 두 글자를 빼놓고 설명할 순 없다. 문명을 발전시킨 것도 전쟁이고, 나라를 망하게 하기도, 부흥하게 하기도 한 것이 전쟁이니까. 사람 둘만 모여도 분쟁은 시작되고, 셋이 모이면 둘이 하나를 착취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몰랐다.

“제국과 에비뉴가 결국 이리되는군요.”

눈처럼 새하얀 의복을 입은 교황이 혀를 찼다. 올해 90을 넘겼지만, 아직도 그는 얼굴만 보면 50대 중년인으로 보였다. 신의 은총이다.

“저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황의 앞엔 팔뚝에 뱀이 기어간 것처럼 큰 상처가 난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데, 이 사내가 바로 신의 망치라 불리는 팔라딘 제롬이었다.

그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땐 용병일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어릴 적엔 도적단에 적을 뒀으며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해 노숙자로 몇 년을 무기력하게 살았던 때도 있었다. 그런 삶을 거치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많은 이름을 거쳐왔는데, 지금은 오직 하나.

제롬.

‘신의 왼팔’이라는 뜻의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8,000명이 넘어가는 모든 팔라딘을 지휘할 수 있으며 19만 명의 사제를 언제든 동원할 수 있고,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신의 권능을 망치에 담을 수 있는 자.

“그쪽은 그렇죠. 하지만 다른 쪽은 아니에요.”

교황의 말에 제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왕이 사실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도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신탁도 없었기에 헛소문이라 치부했다.

“그래요. 새벽녘.. 제가 직접 보았어요. 그대를 부른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랍니다.”

교황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그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제롬은 보았다.

“그자는 저.. 남서쪽에서 피를 마시고 성장해요. 꼬리가 달렸고..”

기억을 떠올리듯 교황은 띄엄띄엄 말했다.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으음.”

“악마를 뱃속에 품었고..”

교황은 눈을 감았다.

“여러 동물의 능력을 써요. 뱀, 늑대, 박쥐···. 온갖 불결한 모든 상징을 다 갖췄어요.”

제롬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흑마법사나 마녀, 좀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다.

“폴라리스에 출현했다는 마왕과 다소 외형적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교황이 머리를 흔들었다.

“성장할 거에요.”

“음..”

“피를 마시고.”

“······.”

“원한과 공포를 탐식하면서. 그대가 막아야 해요.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인간들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시국에 폴라리스로 향하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교황이 어떤 근심 걱정을 하는진 알겠지만, 제롬은 이런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교황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그들이 뭘 생각하든 우린 언제나 그러했든 ‘그분’의 뜻으로 움직일 뿐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교황의 말투가 아주 묘했다.

“설마..”

제롬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하려는데,

“가세요.”

“······?”

“가서 그 마왕이 더 성장하기 전에 그분의 철퇴를 내리세요.”

상하관계가 종교계만큼 뚜렷한 곳도 없다. 심지어 교황이 직접 내린 명령을 그 누가 어길까?

“신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은 마주 인사하며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청사를 나오던 제롬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인가..’

대륙의 정치적인 일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성국.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않나?

‘에비뉴 편을 들린 없을 것이고.’

아무래도 제국의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오래전 마도왕국을 멸망시킬 때도 함께 한 적이 있었으니까.

“뭐..”

제롬은 다시 몸을 돌렸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그가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 맞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폴라리스.”

“아, 결국 그렇게 되는 겁니까?”

“어쩌나? 신의 뜻이라는데.”

하늘을 힐끔 보며 눈매를 찡그리는 그를 보며 부관이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으로 불경한 분이시지만, 그만큼 신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는 분이시기도 하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아니어도.”

제롬이 뒤를 돌아보았다.

신성국을 지배하는 거대한 교황청이 보인다.

“가라면 가야지.”

망치를 휘두르는 것은 자루가 아닌 그걸 쥔 사람이니까.

그렇게 제롬은 7천의 팔라딘과 3천의 사제를 이끌고 신성국을 떠났다. 이 소문 역시 빠르게 대륙을 진동시켰고, 바야흐로 전쟁의 계절이 도래했다.

.

.

“이놈 저놈 숟가락 얹겠다고 난리군.”

“늦어도 두 달이면 신성국의 팔라딘들이 폴라리스 국경을 넘을 겁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할진 모르는 일이고요.”

페트릭의 말에 번 역시 끄덕였다.

정치적인 명분이야 마왕 때려잡겠다고 출정했다지만, ‘저놈이 마귀에 씌었다!’ ‘마왕의 배후에 저놈이 있었다!’라고 지목하면 언제든 대상을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인간사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그 어떤 맹수도 아닌 바로 종교다. 그만큼 무섭고 경계해야 할 곳.

‘팔라딘이라..’

번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짧게 스친다. 아마 어린 좀비로 땅을 아등바등 기어가며 살다가 불시에 죽었던 그때인 것 같다.

-별 잡것들이 다 돌아다니는군. 확실히 음험한 곳이로다! 여봐라! 주변을 싹 불 질러버려라! 정화를 시작한다! 흑마법사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확실히 하라!

수많은 생을 살아봤지만, 팔라딘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다.

“우선.”

번은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이것부터 끝내고, 다시 얘기하지.”

-와아아아아아아!

-이겨라! 이겨라!

48일간 이어진 무투대회의 결승전이 바로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태자님.”

번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페트릭이 검을 건네주었다.

“만만히 볼 자가 아닙니다.”

다시 당부하는 페트릭에게 번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방심은..”

번이 무대로 얼굴을 돌렸다.

“한가한 자들이나 하는 거고.”

21승 무패.

이제 우승까지 단 한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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