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61화 (161/177)

# 깃발 #

“뭣들 하느냐! 어서 주변을 정리하라!”

번의 일갈에 모여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냐..”

병사들은 죽어있는 베르기간트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엉거주춤했다.

“쯧.”

그런 병사들을 보다가 번이 움직였다. 딘딘은 번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 상념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정이다.

“대장군..”

“태자님..”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제국의 검은 부러졌다. 제국의 황제가 이 일을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진 불 보듯 뻔한 일.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보겠네.”

“저는..”

“아네, 알아. 대장군 자네가 일부러 그를 죽였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거야. 하지만..”

번은 말끝을 흐리며 딘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세상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지 않는가?”

“······.”

입을 꾹 다무는 딘딘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우직하고 바위 같던 그가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행동이 주군께 피해가 가지 않을까. 내 행동으로 인해 앞으로 에비뉴에 어떤 겁화가 닥칠까. 혼자만의 문제라면 담담하게 웃어넘겼겠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일단.. 돌아가게.”

“그럴 순 없습니다.”

“허어, 이 사달이 났는데도 아직 대회에 참가하려고 하는 건가?”

번이 질책하듯 말했다.

“제국에서 이 일을 알면 콩가에 어떤 말을 전해올지 모르겠는가? 자네 신병을 구속하라고 할 걸세. 나라도 그럴 것이니까.”

“······.”

“만일 그런 파발이 오면 나는 이곳 콩가의 부마로서 선택해야 하지 않겠나?”

에비뉴의 태자라지만, 여왕의 남자이기도 하다.

“곤란하게 하지 말게나.”

번은 얼굴을 흔들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가는 길은 막지 않겠네. 나도 경황이 없어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잡지 못했다고 둘러댈 것이야.”

조곤조곤 말하는 것 같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번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가서 폐하와 이 일을 상의하게. 어떤 결론이 나오든 그전까진 내가 최선을 다해 막아볼 터이니.”

“태자님..”

자신을 바라보는 딘딘의 눈길에 번은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잊지 말게. 나는 에비뉴의 태자라네. 자네를 도울 것이야.”

이게 바로 병 주고 약 주는 정석이었다.

“알겠습니다.”

딘딘은 창대를 쥐고 번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곤 주변에 있던 부하들에게 외쳤다.

“돌아간다!”

“네!”

“넵!”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번은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깔깔대는 악마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없다.

-크크크! 이제 대회도 네놈이 우승하겠구나! 강력한 우승후보 둘을 이렇게 보내버리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오늘 제국의 검이 부러진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다. 제국 병사들이 떠나는 것도 막지 않았으니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래까진 제국의 황제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이때부터 천하제일무투가를 뽑는 대회 따위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을 거다.

전쟁.

그 불길한 그림자가 물씬 세상을 먹어치울테니 말이다. 그것도 어디 약소국들이 티격태격하는 정도가 아니다.

철의 군대 에비뉴.

명실상부 대륙 최강 제국이 붙는 거다.

‘처음부터 3년은 너무 길었다고.’

딘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번은 궁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아직 무거운 표정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줄 생각도..’

없었다. 에비뉴나 제국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콩가가 놈들을 넘기엔 벅찰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쩔 건데? 대회는 취소할 거냐?

‘아니지. 오히려 더 키워야지.’

-음? 키운다고?

‘그래.’

상금을 올린다. 강력한 우승후보 두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은 바꿔말하면 참가자들에게 ‘어라?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라는 환상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에비뉴와 제국이 충돌하면 지척에 있는 콩가 역시 휘말릴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일수록 국내에 많은 인력이 들어와 있으면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대회 일정을 한두 달 정도 늦추고, 상금을 세배로 올린다.’

그리하면 전쟁에 관심 없는 용병이나 사내들의 도피처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누군들 죽고 싶겠는가? 그 어떤 사람이 에비뉴와 제국의 싸움에 끼고 싶겠는가? 그런 자들에게 ‘이번 전쟁은 대회 때문에 어쩔 수 없군.’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라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 어쩔 건데? 혼란을 틈타 주변 4개국 통일이라도 하려고?

‘아니.’

고작 그딴 건 관심 없다. 폴라리스나 왕국 몇 개 흡수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물론 표면상은 그렇게 보이는 게 좋겠지만, 번이 갈고 있는 비수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에비뉴.

‘폭풍이 불 땐, 대물을 잡아야지.’

바람에 휩쓸려 바다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데,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크크크! 뭐든 좋다고! 피만 있다면!

악마에겐 그저 좋다.

세상이 피바다로 잠기든, 전쟁의 불씨가 대륙 전체로 퍼지든 관심사는 오직 살육 뿐이었으니까.

.

.

.

“..뭐?”

에비뉴 대청.

“뭐라고?”

황제가 벌떡 일어섰다.

집정관은 놀란 황제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 역시 많이 당황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경거망동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또한 말을 하는 이 와중에도 머리를 계속 굴리고 있었다.

“대장군이 제국의 검을 죽였답니다.”

“어떻게?”

“시비가 붙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르기간트의 심장에 창을 찔렀다고 합니다.”

은사가 아니라 딘딘이, 그것도 보란 듯이 제국의 그 변경백을 죽여버렸다고?

“대장군은 이르면 내일 저녁쯤 도착할 겁니다.”

“은사는?”

“그 역시 복귀 중입니다.”

“으음..”

황제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 변경백을 죽이려던 것은 맞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

“······.”

약간의 침묵이 감돌고,

“제국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집정관이 말했다. 하지만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러다가,

“우리 애들 얼마나 돼?”

물었다. 집정관은 황제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기에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적어도 1년은 더 있어야 제국 절반 수준이 됩니다.”

“지금은?”

“반의반이지요.”

백만대군으로 알려진 제국의 군대. 물론 그 많은 병사가 전부 정예라 할 순 없지만, 머릿수를 무시할 순 없었다. 제국은 수많은 식민지가 있었고, 속국이나 마찬가지인 왕국을 거느리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병력을 불릴 수가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처럼 서로 간을 보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전면전이 발생하게 되면 뒤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다.

“반의반이라. 해볼 만하지 않아?”

황제의 말에 집정관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전혀요.”

100만대 25만이 싸우면 바보라도 어느 쪽에 돈을 걸까?

“참으셔야 합니다. 아직 제국에 뿌린 약효도 충분히 나올 때가 아닙니다.”

마약이 깊이 파고들었다지만 그게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더 많은 이들이 중독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무조건 시간이 필요한 일.

“참긴 뭘 참아.”

“······.”

황제가 일어섰다. 어딘가로 가려나 보다. 그 뒤를 집정관이 따랐다.

“대장군이 뭘 잘못했어? 정당한 승부였다면 축하를 받을 일이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꺾은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흘러가진 않지 않습니까.”

“아니야. 누가 뭐라고 하든 나만 중심을 지키면 돼. 간단해. 우리 애가 나가서 옆 마을 골목대장과 싸우고 왔어. 이겼대. 그럼 부모로서 무슨 말을 해줄까?”

“다음부턴 싸우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겠지요.”

“그래,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기죽여서야 되겠어? 그리고 처맞고 온 것보단 백번 나아.”

마음고생이 심할 거다. 듬직한 딘딘이지만,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대청 밖으로 나온 황제.

주변 병사들에게 외쳤다.

“듣거라!”

-네!

-존명!

“대장군이 제국의 검을 꺾고 귀환 중이다!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하라 일러라!”

이때, 뒤에서 지켜보던 집정관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는 어떤 것을 잡을 수 없다 직감했다.

“복귀하는 대장군을 마주치는 모든 백성들에게 환호하라 일러라!”

-존명!

-존명!

쩌렁쩌렁 궁을 울리는 황제의 목소리엔 부글부글 들끓는 어떤 것이 담겨있었다.

“모든 신전에 우리 에비뉴를 위한 길일을 점지하라 이르고, 모든 마탑에 동원령을 선포하라!”

철의 군대가 전장에 나가 이기고 돌아왔다. 에비뉴의 자랑스러운 사내들이 오늘도 이겼단다. 지금까지는 이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앞으론 다르다. 온 나라의 모든 백성과 사회구성원이 똘똘 뭉쳐 대항해야 했다.

나라의 사활을 걸고 임해야 하는 거사.

“우리는 이겨왔고!”

그랬다.

“앞으로도 승리할 것이다!”

전쟁이다.

파파파팟!

병사들이 황제의 명을 전하기 위해 사방으로 빠르게 흩어지자 집정관을 향해 돌아선 황제가 말했다.

“모든 동맹국에게 전해 지원군을 준비하라 일러.”

“약속한 시간이 되지 않아 미흡할 것입니다.”

“상관없어. 어느 편에 설 건지만 확실히 하라고 해.”

황제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딘딘이 베르기간트를 죽였다? 이건 경사다.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다. 그리고 부하의 일을 책임지는 것은 주군이 해야 할 일.

“그리고.”

“하명하시옵소서.”

집정관도 이젠 말리지 못한다.

“그 녀석에게 전해.”

콩가의 태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철의 깃발을 세우라고.”

왕이 죽고 여왕이 치세한다고 하니 태자 수완이라면 충분하리라.

“그리 전하겠습니다.”

“창고에 있는 모든 약도 제국에 다 풀어. 싼값에.”

“예.”

“약을 제외한 모든 무역을 끊고 몇 놈 잡아서 밀무역을 하다 걸리면 죽는다는 것도 상기시켜.”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상인들이 거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최근 에비뉴 산 종이는 제국의 귀족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었고.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입을 다물고 저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계 나무로 만든 총기를 본격적으로 병사들에게 무장시키고, 여차하면 신체 건강한 여자들도 징집한다. ‘그 녀석’ 덕분에 여자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리고 만약.”

그가 바라보는 저 하늘 아래 제국이 있을 것이다.

“놈들이 바로 군대를 모으지 않고 그 변경백의 죽음에 대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면 일단 시간을 끌어.”

전쟁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벌어지긴 힘들다. 덩치가 큰 나라일수록 더욱 그렇고.

“그사이 우린 계속 힘을 집결한다.”

하지만 미녀 하나 때문에도 일어날 수 있고, 사소한 시비로 나라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끝이 어떻게 날진 가봐야 하는 것.

“군사에게 전해. 제국의 황실까지 가는 최단거리의 루트를 뽑으라고.”

스캇이라면 최선책을 가져올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하오나 그 변경백이 죽었다곤 해도 아직 국경엔 10만에 달하는 제국병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뚫지 못하면 그 너머로 진군하기 어렵습니다.”

집정관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태자에게 철의 깃발을 올리라는 거야.”

“아, 양동작전을..?”

“지리적으로 콩가가 제국에 더 가깝지. 게다가 그쪽은 이렇다 할 방어선이 없어. 결국, 머릿수로 틀어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에겐 기회가 생기지.”

황제는 시원하게 웃었다. 굳었던 그의 표정엔 희망이란 놈이 꿈틀 자라고 있었다.

“백만이라고 해도 우리 앞에 얼마가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야. 숫자에 속지 마. 겁먹을 필요도 없어.”

황제의 머릿속엔 그려지고 있었다.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갈팡질팡하는 제국을 질주하는 철의 군대의 모습이.

“우리에겐 사상 최강의 대장군도 있지 않나?”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써먹는다. 차라리 잘됐다. 준비가 안 된 것은 어차피 서로가 마찬가지 아닌가.

“확실히 보여주자고. 철의 깃발이 내걸리면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황제는 껄껄 웃으며 집정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술이나 준비하자고. 축배를 들어야지!”

대륙 최강자가 되어 돌아오는 부하에게 포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

.

하지만 모든 것이 에비뉴의 황제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제국의 검이 부러졌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고, 딘딘이 에비뉴로 복귀한 것도 일주일이 지난 시점. 일단 이 남자는 콩가에 철의 깃발을 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싫은데?”

번의 앞에 있던 페트릭이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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