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60화 (160/177)

# 예상보다 빠른 #

“허..!”

베르기간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소롭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을 채웠다.

그는 지금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뭐, 저쪽 딘딘이란 사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실력을 살펴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고작 종이 몇 장 차이라고 해도 확실히 자신이 앞서고 있었다. 고수는 그 종이 한 장을 좁히려고 수십 년씩 쏟아부어야 할 때도 있지 않던가?

하지만,

“허허허!”

흥이 식었다.

아직은 저 에비뉴의 대장군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하며 슬슬 끝내려고 하던 차에 태자란 놈이 왔다. 아무리 황족으로 귀하게 컸다지만, 저리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라니.

한데, 저건 또 뭔가.

“명 받듭니다.”

딘딘이란 녀석까지 거든다.

게다가,

“......!”

베르기간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딘딘의 창끝에 이제껏 없던 수상한 기운이 맺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건 저 우주에 있다던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괴물과도 같고, 그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뻥! 뚫려버릴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후우우우우우웅, 후우웅.

창이 회전한다. 겉에서 보면 그저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다. 딘딘의 아귀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며 그 끝이 힘을 모으고 있는 거다.

“진심인가?”

베르기간트는 검을 앞으로 뻗으며 묻는다.

“.......”

딘딘은 말이 없다. 하지만 베르기간트는 다시 한 번 확인해야만 했다.

“진정 죽음을 택할텐가?”

좀전까진 설렁설렁 주변도 살피며 힘 조절을 해서 큰 사달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전력을 다하면 그리 못할 것이다.

“나는 그저 명을 받들 뿐.”

딘딘의 눈빛이 담담하게 응수하자, 베르기간트는 끄덕였다.

“그런가.”

그 역시 칼을 쥔 손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부우우우웅.

-오오오오! 저렇게 푸르고, 두꺼운 오러라니!

-과연! 대륙 제일검!

-최고다!

베르기간트의 검 전체를 푸른 빛이 감쌌다. 본래 그의 검은 기사들이 쓰는 것보다 얇고 가벼웠는데, 지금은 기마대가 쓸 것 같은 두껍고 큰 형태가 되었다.

“너의 목으로 인해 수많은 피가 땅에 뿌려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건가?”

에비뉴의 대장군이 이런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제국과 에비뉴가 폭풍전야와도 같다지만, 이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 아닌가?

그러나,

“대륙 제일검이 아니라, 대륙 제일 주둥이로군.”

“......!”

베르기간트는 급히 몸을 옆으로 틀며 검을 휘둘렀다.

‘언제?’

마법인가?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을 정도로 갑자기 나타난 번의 모습에 베르기간트가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찡그렸다.

“개가 뭘 그런 것까지 걱정하고 있어? 넌 그저 짖거나.”

콰앙!

번과 베르기간트의 칼이 충돌했다.

놀라운 일이다. 한없이 빠르고 가벼워만 보이는 번의 검이 베르기간트의 검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푸욱-!

주변으로 충격파가 일으킨 먼지 폭풍이 퍼져나가고,

“집이나 지키면 되는 거지.”

번의 말이 베르기간트의 심기를 거스른다.

“이, 이 자식이..?”

번의 말 때문에 욱한 것도 있지만, 베르기간트는 무인이다. 아까 최초의 충돌 때 이상하다 여기긴 했는데, 이젠 알겠다. 이놈 빠르다. 게다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운을 다루고 있었다.

‘빛?’

사제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너무도 순수하고 밝은 자연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딘딘과 한차례 어울려 기운이 빠졌다 한들, 이게 말이 되나?

“네놈 자식은 네놈 집에 가서 찾고.”

능글능글 웃으며 몸을 휙 뒤집는 번. 아슬아슬하게 그가 있던 자리로 칼날이 스쳐 갔다.

“본 태자가 계속 경고하는데.”

개의치 않은 듯 태연한 척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번은 사실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끌어올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뇌는 화르륵 타버릴 것 같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몸속에선 여러 기운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뿐인가? 온갖 잡다한 능력들이 총동원되어 1초를 수천 개로 쪼갠 아주 작은 찰나에서 가장 옳은 방향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얼굴 근육은 티 나지 않게 웃는 낯을 유지하느라 진땀이다.

“내 검에도 눈은 안 달렸다.”

말하면서 일부러 슬쩍 베르기간트의 상체 쪽으로 얼굴을 밀어보인다.

“......?”

그리곤 확실히 알았다. 조금 전 아주 위험했다는 것을. 베르기간트가 마음만 먹으면 번의 목을 깊이 벨 수 있는 공간으로 번이 스스로 뛰어든 꼴이랄까?

하지만 그는 휘두르지 못했다는 걸 눈치챘다.

에비뉴의 태자.

콩가의 부마. 당연히 못 죽이지 않겠는가?

씨익. 번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곤 외쳤다.

“대장군! 어서 명을 받들라-!”

번은 처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실력 차이. 이 네 글자가 이토록 거대하고 단단한 벽을 만든 것을 말이다. 베르기간트와 첫 합을 나눴을 때부터 보였다. 그 어떤 공격과 수단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도 답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번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비장의 카드가 여럿 있지 않나?

“딘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의 뒤에서 한 줄기 빛이 날아들었다.

스아아아아악!

그건 번의 겨드랑이 바로 아래로 빠르게 지나갔으며 지켜보는 사람들 눈엔 뭔가가 허공에 주욱 일직선으로 그어진 것 같았다. 저쪽 딘딘의 창끝으로부터 베르기간트의 가슴까지 가장 빠른 루트로 말이다.

“이..?”

초인의 싸움에서 아주 작은 방심은 죽음을 부르고, 고수의 격전에서 마음에 담아둬야 하는 거리낌이 있다면 칼끝은 무뎌진다. 베르기간트는 번을 죽일 수 없었다. 또한, 사실 그는 딘딘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대회 전에 한번 밟아주려고 했던 것 뿐.

그런데 지금,

‘위험!’

그에겐 최악의 순간이 닥쳤다.

“네놈의 무례는 그 목으로 받지.”

앞에서 번이 계속 알짱거린다. 게다가 뒤에선 딘딘이 찌른 그의 일격필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의 검 또한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는데, 사선으로 쭉 그어지는 빛의 검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고 빨랐다.

번의 말에 대꾸할 여유도 화낼 기분도 아니다. 베르기간트는 오직 선택해야만 했다.

‘둘 중 하나!’

모두 흘릴 수가 없다. 창을 피하면 검에 베일 것이고, 검을 쳐내면 창에 가슴을 내어줘야만 한다.

‘아니야!’

싫다. 상처를 입는 것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그의 어깨엔 제국이란 이름이 얹혀있다. 이런 소국의 변방에서 이깟 놈들에게 당해 나뒹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날 원망 마라!”

돌연 베르기간트의 눈빛이 돌변했다.

조금 전까진 사정을 봐줬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검은 이제 똑바로 번의 목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위치로 말이다. 이건 상체를 뒤로 무르지 않고선 절대 피할 수 없는 각도였고, 뼈와 살로 이뤄진 사람이라면 방법이 없는 한 수였다.

-태, 태자님! 피하십시오!

뒤에 있던 딘딘조차 놀라 외쳤다. 한발 늦게 출수한 베르기간트의 검이 번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번은 죽는다.

확실히 베르기간트는 제국의 가장 강한 검사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을 사내였고, 오늘이 만약 상대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전쟁터였다면 번이나 딘딘 모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 무인을 죽이는 건, 언제나 정치지.’

번은 웃었다.

세 남자 모두 자신의 모든 인생의 노력이 담긴 최고의 공격을 뻗은 상태. 회수도 쉽지 않다. 딘딘이 베르기간트를 위협하고자 들고 있던 창대를 급히 휘어보지만 늦었다. 그의 창끝이 방향을 바꿔 베르기간트에 닿았을 땐 이미 번의 목이 뚫린 후이리라.

하지만 와중에도 번의 입술이 열렸다.

“경험이···. 많을수록.”

번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베르기간트를 향해 휘두르던 검을 놓아버리더니,

“사람은 아주 무서운 놈에게 잡아먹히지.”

꾸물꾸물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멀리서 보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바로 앞에 있던 베르기간트에겐 생생하게 보였다.

“이게..뭣?”

목이 얇아진다. 흡사 그 안에 뼈만 남겨둔 것처럼, 두 손으로 힘껏 졸라도 저렇게는 안 될 것 같이 홀쭉해졌다. 그냥 말라 비틀어진 게 아니다. 정확히 베르기간트의 칼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쪼그라든 거다.

사람이 어찌!

오른쪽 어깨는 사라진 것처럼 푹 꺼졌고, 그런데도 팔은 매달려 덜렁거린다.

이리될 수 있단 말인가?

베르기간트의 눈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구겨졌다.

“상식. 그게 오늘 너를 죽이는 놈의 이름이다.”

마치 허깨비처럼 휙, 옆으로 돌아들어 오는 번의 몸은 베르기간트의 검을 0.1mm 단위의 자로 잰 듯 피하더니, 피할 곳을 차단한다. 거기에 더해,

“투우-!”

번은 입에서 뭔가를 뱉어내기까지 했다.

침이 아니다. 이건 독이다. 고작 한 방울도 안 되는 티끌만 한 것이었지만, 그건 안구에 닿자마자 끔찍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망막이 녹아버린 것이다.

“크윽..?”

베르기간트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떨어뜨렸다.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과정이 길게 느껴졌지만, 여기까지가 고작 눈 하나 깜빡할 정도의 찰나. 인간의 뇌가 아무리 빠르게 돌아간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은 쉽지 않았고,

푸욱-.

오늘 이 사건을 지켜보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베르기간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았다.

-허엇..!

저쪽에 있던 딘딘 역시 입을 떡 벌렸다. 그 공격이 진짜 베르기간트를 죽일 줄은 몰랐던 거다. 은사가 죽여야 하는 자다. 에비뉴가 개입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제거하려던 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창에 죽었다.

“어이쿠?”

모두 당황해서 눈만 껌뻑이는데, 어느새 그 기괴하던 육체를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린 번이 휘청이며 베르기간트의 어깨를 짚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중심을 잃어 어쩔 수 없는 거로 보였다.

번이 디딘 손 하나도 지탱하지 못하는 몸.

쿠웅.

베르기간트는 볼품없이 쓰러졌다.

“..이보게!”

번은 놀란 표정으로 그런 베르기간트에게 몸을 숙였다.

“이봐! 대륙 제일검!”

베르기간트의 몸을 흔들어본다. 하지만 이미 대륙 제일검은 심장이 파괴된 상태였다. 명치를 노렸던 딘딘의 창끝이 마지막에 번 때문에 방향을 바꿔 생긴 일이다.

“허어..!”

사실 번과 베르기간트가 나눈 대화들은 주변에서 들을 수 없는 소음이었다.

그래서 지금 번의 이 표정과 몸짓은 그가 아주 당황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은 웃기지도 않겠지만.

-크크크! 성공했구나!

악마가 웃어 재꼈다.

-전쟁이 온다! 전쟁이! 캬캬캬캬!

마음 같아선 악마처럼 시원하게 웃어 재끼고 싶었지만, 번의 표정은 아주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손가락을 베르기간트의 목에 대보더니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으으음..”

그 동작이 무얼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알았다.

-헉! 제국의 검이 죽었다!

-베르기간트가 죽었어!

별명도 참 많다. 대륙 제일검, 제국의 검, 천하제일인.. 부르는 이름은 많아도 어쨌든 뜻은 하나다. 그만큼 강했던 남자. 하지만 그런 사내가 지금 여기 거짓말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번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저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죽었네.”

그러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내가 꿇리랬지, 죽이랬나? 라는 일그러진 눈빛으로 딘딘을 보던 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딘딘은 창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를 꺾었다는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주변으로 어두운 폭풍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이, 개자식이!

-저놈이 베르기간트님을 죽였어!

-가서 알려! 이건 제국에 대한 도전이다!

-파발을 띄워!

베르기간트를 수행하던 부하들이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번은 또 한숨을 쉰다. 사람들을 시켜 제국병들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생각도 없나 보다. 그저 왜 그랬냐는 듯한 얼굴로 딘딘을 바라보고 있을 뿐.

“하아.”

그 한숨에 땅이 꺼지진 않았지만, 딘딘의 가슴은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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