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59화 (159/177)

# 빅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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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싸, 싸움이 났다 합니다! 지금 그 일대가 전쟁터나 다름없다고..!”

병사의 다급한 말에 번은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가지.”

영주와 대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차라 그의 뒤를 영주가 급히 따르며 외쳤다.

“여봐라! 어서 병사들을 모아라!”

“계셔도 됩니다. 제가 해결하죠.”

번이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지만, 영주는 머리를 흔들었다.

“제 영지의 일입니다. 손 놓고 있을 순 없지요.”

밖으로 나가자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말에 오르며 영주가 물었다.

“베르기간트와 딘딘 대장군이 충돌했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요. 기사를 더 모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두 사람만으로도 하나의 군단과 맞먹는 힘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무인들이니까. 하지만 번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추는 기울지.’

그 둘을 상대해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번이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만으로도 싸움을 끝낼 수 있다. 타인이 보면 자신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번은 두렵지 않았다. 일종의 호승심도 들끓고 있기도 했고.

게다가,

‘이거, 잘하면 일이 빨리 진행되겠는데?’

다닥, 다닥, 다다닥!

말이 질주하는 사이 악마가 물었다.

-어째서?

번은 가는 길에 생각도 정리할 겸 악마에게 설명했다.

‘둘이 싸웠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든,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자칫 잘못하면 제국이나 에비뉴가 콩가에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어.’

-제 놈들이 싸웠는데, 그걸 왜 우리 탓으로 돌려?

‘그게 바로 권력이니까.’

세상이 그렇다. 학교에서 애들이 싸웠는데, 그 부모는 상대 부모를 탓하다가 결국 학교 관리인에게 따지려 들 수도 있다. 하물며 좀 사는 집 자식들이면 목소리는 더욱 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

‘놈들이 죽거나 병신이 되는 건 우리에겐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게 하필 여기 세븐 스타에서 일어났다는 걸 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질 수 있어. 이걸 명분으로 군대를 보낼 수도 있고.’

-설마 그렇게까지?

‘하지. 그럴만한 이름값이 있는 자들이니까.’

제국은 몰라도 이 소식을 들은 집정관이나 에비뉴의 황제는 무슨 생각을 떠올릴지 상상도 안 된다. 감히 우리 무고한 대장군을 암살하다니! 죽어라! 제국의 개잡종아! 소리치면서 직접 철鐵의 군대를 이끌고 올지도 모른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번에겐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떤 경우의 수가 발생하든 이쪽에 유리하게 고삐를 쥐어야 했다. 그러려면 많은 패를 쥐고 있어야 했고.

“영주님. 잠깐만요.”

번이 손짓하자 말들이 속도를 늦췄다.

“하실 말씀이라도?”

“혹 얼마 전에 거리에서 싸움이 났을 때, 어찌 처리하셨습니까? 그 폴라리스 용병과 제국에서 왔다던 늙은 기사 간의.”

“아! 그 일이라면 시비가 명백했기에 폴라리스의 용병에게 200골드의 벌금을 내게 했습니다.”

“그들이 대회 참가 희망자들이었죠?”

“그랬습니다.”

“이런 충돌이 자주 발생했습니까?”

“아이고, 제가 다 말씀을 안 드려서 그렇지 장난이 아닙니다.”

애초에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하러 온 자들이 모였다. 거기에 더해 그들이 술까지 한 잔씩 걸쳤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흠.”

얼굴을 돌렸던 번이 다시 앞을 바라보자 옆을 나란히 달리던 영주가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런 사건에 휘말릴 시 대회 참가자격을 박탈한다고 못을 박았어야 했습니다.”

번이 피식 웃었다.

“약간의 효과는 있었겠지만, 완전히 통제하기엔 어려웠을 겁니다.”

칼 밥 먹는 자들이다. 유흥가나 뒷골목에서 취기에 못 이겨 주먹 쥐고 투닥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 아닌가? 일단 무기를 뽑았을 땐 끝장을 보자는 뜻일테고, 그런 자들에게 미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 테니까.

“차라리 잘 됐습니다.”

“네? 잘됐다고요?”

“예. 대회 시작일부터 그 조항을 확실히 못 박도록 하죠. 하지만 아직까진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비와 대회는 무관한 거로 하시는 겁니다. 이미 앞선 판결도 그리 내리셨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게 지금 무슨 소용인가? 영주는 궁금했지만 이미 번의 말은 저 앞으로 더욱 속도를 높여 질주하고 있었다.

“갑시다! 이러다 도시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하..!”

뭐가 저리 즐거운진 모르겠지만, 왠지 번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그렇게 도착한 곳.

두 무리의 사내들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덤벼들진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

부러진 나무와 굴착기로 헤집은 것 같은 땅. 마치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일대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콩가의 병사들이 주변에서 시민들의 대피를 돕고 있었고, 그중엔 최근 세븐 스타로 들어온 페트릭도 있었다.

“대공!”

그가 번을 발견하고 급히 뛰어왔다.

“아, 음..”

번은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고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쾅! 콰앙! 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다. 멀리서 보면 진정 그렇게 보일 것이다. 번쩍, 번쩍 서로의 무기가 닿을 때마다 충격파와 함께 빛이 뿜어졌고,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무기가 휘둘러질 때 혹은 그게 충돌할 때 바람이 불었다. 그건 주변 흙먼지를 일으키고 그게 반복되니 마치 일대가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뿌옇다.

“굉장하군.”

싸움이 벌어진 지 꽤 되었다는데 아직 둘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빛의 용사 뭐시기가 레드 드래곤과 7일 밤낮을 싸웠다고 현자의 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니, 그걸 다 믿긴 힘들어도 딘딘의 체력은 알고 있는 번이었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사상자는?”

“저들이 나름 힘 조절을 하고 있는지 첫 충돌이 발생할 때 여관이 무너져 다친 사람은 좀 있었지만, 그 후론 괜찮다고 합니다.”

“그렇군.”

난장판이 따로 없다. 심지어 일정 거리를 두고 도시의 사람들이 죄다 나와 구경하기라도 하듯 인파가 가득했다. 대회에 참가하고자 외부에서 온 무인들도 많았기에 그들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좀 더 안쪽에서 초인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는데,

-오오오! 저걸 피해?

-대단하다! 과연 허명이 아니었어!

감탄하거나 놀라거나 뼈저리게 자신의 위치를 실감했다. 물론 이 남자는 그 세 가지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아주 살판났네.”

콧등을 찡긋하며 불편한 기색으로 주변을 계속 훑어볼 뿐. 그러다가 묻는다.

“발키리는 다 어디 있지?”

“소집령을 내렸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오천 모두?”

“예.”

각 5개 신도시와 수도에 오천 명씩 주둔시켰었다.

“미루와 다루는?”

“오늘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함께 올 것입니다.”

번은 끄덕이며 다시 저쪽을 보았다.

“오천이라..”

발키리 오천이면 저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떠올렸을 때, '그렇다'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 장기전으로 가면 어떻게 되긴 하겠지만, 발키리 역시 그 피해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쯧.”

번은 입맛을 다시며 옆을 보다가 손짓했다.

“저, 저요?”

영주성 소속 병사 같은데 아직 얼굴에 솜털이 가득하다.

“그래, 자네.”

“넵!”

그가 빠르게 다가오자 번이 말했다.

“검을 빌려줄 수 있겠나?”

오늘 일정 자체가 무기를 소지할 수 없는 곳이 많아 애초에 들고나오질 않았었다.

“그, 그럼요!”

무인은 자신의 무기를 분신처럼 아낀다지만 상대적으로 병사들은 그게 덜하다. 그걸 알기에 페트릭 대신 어린 병사를 부른 것이고.

“고맙군.”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세븐 스타에서 대공의 위세는 아주 높다. 어느 것 하나 확인된 것은 없지만, 대마법사라고도 하고 전장의 투사라고도 한다. 드래곤도 부리고 그 머리도 비상하여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 하고 있다고 하니 사내라면 흠모하지 않을 수 없지 않나? 게다가 그는 여왕의 남자였으니까.

“멀쩡하게 돌려주겠다곤 말 못하겠지만.”

번은 병사의 검을 쥐고 씨익 웃었다.

“노력은 해보지.”

우우우웅, 우우우-웅.

검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철鐵이 버텨내지 못하면 번의 기운을 받는 순간 터져버릴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버텨낸다.

“관리를 잘 했군.”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병사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번이 이미 저쪽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저게 내가 가지고 있던 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발광하는 검을 쥐고 산책하러 나가듯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대공의 모습은 정말이지,

“멋있다..”

어린 병사의 눈엔 최고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파팟!

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폭풍은 둘이 아닌 셋이 맞물려 돌아갔다.

“······!”

“······?”

번은 난입하자마자 검에 빛의 속성을 전부 때려 박고 휘둘렀다. 빛은 관통의 속성과 더불어 항마와 항음, 쾌快를 포함한다.

그 어떤 것보다 빠르며 그 어떤 것보다 가볍다.

“이, 이런..!”

“흐읍!”

두 사람은 이미 번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갑자기 뛰어들진 상상도 못 했는데, 고수들의 싸움에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의 검은 간결했고 빨랐으며 오묘했다. 횡으로 그려지던 딘딘의 창을 살짝 건드려 축을 틀어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베르기간트의 무릎 앞을 벴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그걸 무시하고 더 진행한다면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갈 상황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웬 놈이냐!”

급히 몸을 뒤집어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뒤 앞쪽으로 착지해 불같이 고함을 치는 베르기간트. 싸움을 방해받자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번은 그를 아주 싹 무시했다. 옆에서 봐도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대신 딘딘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잔치는 시작도 안 했는데, 상을 엎어버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태자님.”

딘딘도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번에게 예를 갖췄다.

“상처가 깊군요.”

딘딘의 허리에서 피가 흥건히 번지는 것을 보며 번이 묻는다.

“침 바르면 나을 생채깁니다.”

딘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싸움의 여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주변이 초토화된 만큼 당사자들의 몸도 성할 리 없었는데 그나마 치명상이 없어 이제까지 버틴 거지 걸레나 다름없었다.

“흥! 당신이 그 유명한 에비뉴의 태자로군?”

뒤에서 고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대화로 번의 신분을 짐작한 베르기간트가 계속 비아냥거렸다.

“귀한 양반이 나설 자리가 아닐 텐데? 그러다 사지라도 잘리면 어쩌시려고? 내 칼엔 눈이 없는데 말이지.”

그의 말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아무리 태자라 해도 이 싸움에 끼어들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위협과 동시에 고작 에비뉴의 태자 지위 정도론 명함도 못 내밀 거라는.

스윽.

번이 돌아보았다.

꿈틀, 베르기간트의 얼굴 근육이 욱신거렸는데 번의 눈을 봐서 그렇다.

너무도 고요하고 차분하게 깊이 가라앉아 있는 그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를.

“무례하구나.”

“······?”

번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은 아주 천박하다.

“목줄은 어디에 풀어두고 다니는 거냐?”

변방을 지키는 개 취급을 하고 있다.

저, 제국의 제일검 베르기간트를 말이다.

“이..?”

기막혀 입을 떡 벌린 베르기간트를 향해 번이 검을 똑바로 들어 올렸다.

“이 무례는 네 주인에게 그 죄를 물어도 되겠지?”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 보았을까? 황당해서 뭐라 말도 못하는 베르기간트를 보며 번이 옆으로 고개를 살짝 틀어 말했다.

“딘딘 대장군.”

“예, 태자님.”

“대 에비뉴의 태자로서 명한다.”

“······?”

명령받을 위치는 아니었지만 지금 분위기나 번의 눈빛을 보면 따르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기물을 파손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상하게 한 죄인을 내 앞에 꿇려라!”

이것저것 다 빼고 하나만 생각해보자. 일단 이 명령 자체가 따르고 싶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저 제국의 검을 부러뜨릴 사람이 대륙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기막힌 요구였는데 번은 이미 거기까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주지.”

선심 쓰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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