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58화 (158/177)

# 그 남자 #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우리에게도 지원군을 요청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번은 코웃음을 쳤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린 여유가 없다고 해야지.”

이 와중에 그리 요청하는 것도 참 뻔뻔하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예정대로 수도에 가서 대회 개막일을 지정해 달라고 해.”

번은 이 무투대회를 성대한 축제로 만들 생각이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말이다. 이런 큰 규모의 행사를 사고없이 잘 치루기 위해선 혼자 진행할 순 없기에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아, 그리고 5개 신도시 공장장들을 모이라고 해줘.”

“언제까지요?”

“다음 달 초까지. 여기 세븐 스타로.”

“그럴게요. 다른 시키실 일은 없나요?”

“일단은 그거면 돼.”

“바로 떠날게요.”

“아침 먹고 가. 이왕 늦었는데.”

“예.”

웃는 그녀를 보다가 번은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막 나가려는 그녀를 다시 부르는 번.

“잠깐.”

“네?”

“궁에 가게 되면 이렇게 전해. 만일 주변국이 도움을 요청하면, 일단 알았다고 하라고.”

“하지만..”

우린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걸요? 라고 말하려다가 번의 눈빛을 보며 움찔했다. 저건 순수하게 돕겠다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가봐.”

그녀가 끄덕이며 나가자, 번은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뭔데?

악마가 묻는다.

평소라면 친절하게 성명해주지 않았을 번이었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예전에 아주 기막힌 전술을 구사하던 놈이 하나 있었지.”

-그게 누군데?

“그건 알 필요 없고. 여튼 이놈은 늘 겉으론 웃는 낯으로 적을 대했지만, 뒤론 포를 쏘고 칼을 휘둘렀던 거야.”

-개놈새끼네.

“돼지새끼지. 어쨌든 그걸 화전양면전술和戰兩面戰術이라고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꽤 잘 먹히더란 말이지. 상대국이 60년 넘게 계속 속았거든.”

웃으며 악수하려 손 내밀지만, 뒤에선 계속해서 도발을 감행한다. 긴장의 끈을 유지한 채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얻으려는 속셈인데, 주변국과 대치하고 있는 지금 콩가의 상황에 아주 그럴듯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지원군을 진짜 보낼 생각이냐?

“보내야 한다면 보내겠지만.”

그게 진짜 지원군일지, 적군일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캬캬캬! 이런 영악한 놈! 뒤통수를 치려는 거구나!

이렇게 오늘도 번의 머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때그때 최고의 방법을 모색하려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기동력이 빨라 적으로 만나면 골치 아플 폴라리스를 견제하기 위해 해골바가지를 그리 보냈고, 결과적으로 마왕이 나타났다며 주변국이 연합하고 있었다.

인류가 똘똘 뭉쳐 이겨내야 하는 재앙을 앞두고 콩가만 꿍꿍이를 품고 있다는 게 모양새가 좋진 않겠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럴듯한 눈요깃거리로 가려버리면 진실은 저 아래 묻히게 마련 아닌가?

“그러기엔 축제만한 것이 없지.”

모든 일이 착착 맞아떨어져 간다.

이제 남은 것은 선수들이 링에 오르는 것뿐.

번은 그렇게 거의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내며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갔다.

.

.

.

「새해를 맞이하여 신년무투대회를 열고자 한다. 뜻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고, 살인은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신도시 다섯 곳 어디서든 예선을 치를 수 있으며..

1위 상금 1만 골드.

2위~100위 상금 100 골드.」

드디어 여왕의 직인이 찍힌 방이 나라 곳곳에 붙기 시작했다. 이미 대회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확정일자까지 붙은 정식 공문이 내려오자 공무원들은 바빠졌고 사람들은 신이 났다.

-누가 이길까?

-글쎄, 붙어봐야 알겠지.

-참가자가 1만 명을 가뿐히 넘어갈 거라던데? 대단하지 않나?

-매년 이런 대회가 열렸으면 좋겠군! 요즘 하루하루가 아주 즐겁다고!

-자넨 어디에 걸었는데? 베르기간트?

-아직이네! 예선은 지켜보고 정하려고! 어떤 강자가 튀어나올지 모르지 않는가?

-에이, 그래도 제국의 검을 누가 이길 수 있겠나?

-그건 모르는 거라니까?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은거 기인이 있는데!

저 멀리 폴라리스에서는 마왕이 출몰해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콩가는 모든 도시가 온통 대회 이야기뿐이었다. 사내들은 승리를 점치며 우승자에게 돈을 걸었고, 그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유흥단지가 신도시에 하나, 둘 문을 열었다.

유흥단지의 규모는 세븐 스타의 나일이 가장 컸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의 열기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끓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세븐 스타를 비롯한 신도시엔 기존에 있던 콜로세움을 개조한 경기장이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었고, 정부 추산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도시로 찾아들었다.

그럴수록 도시엔 돈이 모였다.

관광객들이나 대회 참가자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모든 비용이 신도시에 누적되면서 시민들은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이대로라면 도시가 얻은 이득이 대회준비나 상금에 소모되는 비용은 이미 가볍게 넘어섰다고 추정하는 대신도 있었으니, 궁의 분위기 또한 아주 좋았다. 돈은 돌고 돌아 결국 세금이란 이름으로 궁에 집중될 것이니까 말이다.

대회가 4일 남은 시점.

한 무리가 세븐 스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건.. 놀랍군.”

딘딘은 주변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콩가에는 전에도 와봤지만, 수도조차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지 않은가?

대회 때문에 그런지 세븐 스타에는 수많은 외지인이 모여들고 있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자들은 성 밖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비박을 한다지만, 돈이 있는 자들 사이에선 좋은 숙소를 잡는 경쟁이 치열했다.

“그분의 힘이란 건가?”

딘딘의 옆에서 망토를 깊이 눌러 쓴 은사가 대답했다.

“확실히 대단한 분이시긴 하지.”

워낙 강력한 황제 폐하와 비교돼서 다소 평가절하된 탓에 아직 꽃을 피우고 있진 못했지만, 벨버른의 일도 그렇고 전장에서 보여준 투지도 그러한 걸 보면 확실히 에비뉴의 태자는 그 떡잎부터가 달랐다.

“그럼 나는 이만 여기서 헤어지는 거로 하지.”

은사가 딘딘의 어깨를 두드렸다.

“1등 먹으라고.”

“······.”

딘딘이 피식 웃어 보이자, 은사가 목을 움츠렸다.

“행여라도 지면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르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사라지는 은사의 흔적을 눈으로 좇으며 딘딘은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오긴 했는데, 아직도 내키진 않았다. 저 바글대는 사람들을 보라. 저들이 적이라면 당당하게 싸울 수 있겠지만, 구경꾼들 앞에서 광대처럼 힘을 써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낯뜨겁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가지.”

“예!”

수행하기 위해 함께 온 병사들과 다시 걸음을 옮기는 딘딘.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서 일단 숙소에 짐을 풀기로 했다. 물론 딘딘의 신분 정도면 영주성에 직접 찾아가도 모자람이 없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이 나올만한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려는 거다.

딘딘은 에비뉴 철의 군대 대장군이라는 신분보다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 참가하길 바라는 만큼 예선이 시작될 때까진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이란 놈은 늘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비수를 찌른다.

“······!”

“······?”

여관 몽마르트는 1층이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간단한 음식과 술을 파는 장소로 되어 있고, 2층부터 4층까지가 방으로 이뤄진 곳이었는데, 낡았지만 깨끗하고 요금도 저렴한 편이었다. 근처 지나는 현지인들에게 ‘며칠 묵으려 하는 데, 어디가 좋소?’ 묻는다면 셋에 둘은 모두 몽마르트라고 대답할 정도로 유명해서일까?

“저 자가.. 어찌..”

딘딘의 옆에 있던 사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으음.”

딘딘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주인장. 열 명이 머물 방이 있소?

-빈방은 두 개뿐입니다.

-그거면 되오. 다섯은 밖에서 지내도 괜찮으니까.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갑옷과 부츠에서 철컥, 철컥 소리가 퍼졌다. 갑옷 어깨엔 선명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유명한 제국의 그것이었다.

“베르기간트..”

딘딘의 최고 호적수로 꼽히는 자이자, 에비뉴와 맞닿은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쪽은 에비뉴 철의 군대 수장. 다른 하나는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사람 중 하나이니, 알아본 자들은 가까스로 침을 넘겼다. 이 작은 여관이 대륙을 축소해놓은 전쟁터나 다름없어진 거다.

“은사가···. 헛걸음하겠군.”

정보가 잘못되었다.

저 자는 여기 세븐 스타가 아닌, 다른 도시로 간다고 했는데..

-식사부터 하시지요. 장군.

부관의 말에 끄덕이며 빈자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돌렸던 베르기간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도 본 것이다. 처음 보았지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성큼.

그는 거침없이 구석진 자리로 걷는다. 그러더니 한 사내 앞에 서서 물었다.

“혹시 에비뉴에서 오시었소?”

딘딘이 탁자에 걸쳐놓은 창을 보며 비릿하게 웃는 베르기간트의 말에 딘딘의 옆에 있던 사내들이 움찔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변경백이겠구려.”

딘딘은 일어서며 그를 마주했다.

장신의 두 사람이 대치하자,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뭐야? 싸움인가? 무슨 일인데?

-몰라! 가만히 있어.

-유명한 사람들인가?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내가 누구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알아보긴 힘들다. 하지만 두 사내의 대화가 오갈수록 사람들은 깨우친다.

철鐵의 군대 지휘관이자 신창 딘딘.

제국의 베르기간트.

-헙..

-소름..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자로 평가되고 있는 베르기간트 쪽이 더 유명한 명성을 얻고 있긴 하지만, 에비뉴에선 철의 군대 또한 위명이 자자했다.

-여기 있다간 휘말리는 거 아니야? 슬쩍 나가자고.

-가긴 어딜 가나? 이런 좋은 구경거릴 두고!

사람들은 숨죽이며 두 남자를 지켜보았다.

“먼 길 오셨는데, 이거 딱하게 됐소.”

베르기간트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범한 사내처럼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지만, 말의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바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딘딘이 손을 맞잡는 걸 보며 베르기간트는 말을 잇는다.

“지금이라도 다른 도시로 옮기면 늦진 않을 거요.”

계속된 도발에도 딘딘은 별말이 없었다. 잡았던 손을 놓고 대수롭지 않게 옆을 본다. 빈 테이블이 하나 있다.

“그럼, 식사들 하시오.”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혹시 모를 두 사람의 충돌을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기다렸는데, 딘딘이 자리에 앉아 등을 돌리자 묘하게 허탈한 표정들이다. 그건 베르기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식.

딘딘이 꼬리를 말았다고 여긴 그는 몸을 돌리며 자신을 기다리는 부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휴우..”

부관은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는데, 과도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상관이 대회 시작도 전에 큰일을 벌이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랑이라 들었는데, 개였군.”

“······!”

들으란 듯이 크게 읊조리는 베르기간트의 목소리에 부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 그의 눈이 저쪽을 향하자, 세워둔 창으로 뻗는 팔이 보였다.

쿠웅-!

창끝을 바닥에 찍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딘딘. 그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잠깐.”

웬만하면 은사에게 맡기려고 상대하지 않으려 했건만.

“뭐라 했는가?”

베르기간트가 비릿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다시 마주친 두 남자의 싸늘한 시선.

“개라 했지.”

대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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