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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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엔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 중엔 마법사나 정령사의 비율이 높았는데, 일단 이들은 금전적 여유도 있었고, 생업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비교적 자유로워서인지 많은 이들이 금세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자리 잡은 신규 마법사들. 기괴한 식물을 보러 가벼운 마음으로 왔던 그들은 번의 화술에 홀딱 넘어가 거의 무상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돕고 있었는데, 번이 계속 지나가는 말로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지 않겠소? 허락 없이 한 뿌리 캐갔다간 손목이 잘릴 거요.’라고 중얼거린 것도 한 몫 했으리라.
마법사들 입장에서야 번이 키우는 식물의 식생이나 원리를 무척 궁금해했으니, 근처에서 맴도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번이 작정하고 끌어들이니 구성은 금세 갖춰진다.
더욱이 마법사들은 인맥이 아주 대단했다. 그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장인들까지 모았는데, 덕분에 번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현실에 구현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집단과 넘쳐나는 노동력. 덕분에 뚝딱, 뚝딱 강변엔 순식간에 부두가 건설되었고, 그저 밥 한 끼로 해결되는 인건비 덕분에 번은 그리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애초 일정보다 길어진 탓에 카시오페이아는 먼저 궁으로 돌려보냈다. 피벗 공작과 함께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나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곧 갈 터이니, 며칠만 기다리시오.’라고 달랬지만, 사실 그렇게 일찍 돌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번도 하지 않았다.
“참 기묘하게 생겼습니다.”
"그러게요. 저것이..?"
“거북이란 동물을 본 뜬거라오.”
한창 건조 중인 배를 보며 한마디씩 하는 마법사들을 보며 번은 씨익 웃었다.
“거북이요?”
“그런 동물이 있다오. 등에 딱딱한 껍질을 달고 살면서 맹수의 위협을 막아내는데, 저 배의 지붕이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요.”
“아! 그럼 저희가 해야 할 일이?”
“그렇소. 상판과 지붕에 물리, 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주문을 걸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
“···간단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마법사들은 멍하니 다시 배를 바라보았다. 저 한 척에 수백 명이 달라붙어 사력을 다하고 있으니, 한 열흘이면 뼈대 작업은 끝날 것 같다.
길이만 40미터. 그 몸집만 보면 돛을 달아 움직이는 범선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낮고 넓었다. 보통은 폭이 8미터에서 10미터 정도인데 이 배는 15미터가 넘었고, 높이도 20미터인 다른 배들과는 달리 지붕을 얹어도 15미터가 넘지 않았다.
낮고 넓은 배.
지금 이 강변에 이러한 것들이 동시에 25척이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특히 여기에서도 번의 분업 방식은 빛을 발했는데, 사내들은 오직 하나만 배우면 됐다. 이쪽 배에서 작업을 마치면 다음 배로 넘어가고, 그게 끝나면 또 다른 배로 간다. 이러다 보니 제 할 일만 하면 되었고, 작업속도는 빨랐다.
“저런 모습으로 설계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일단 낮으니 무게중심이 아래로 향해있어, 쉽게 전복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거기에 넓은 갑판은 포를 여럿 실을 수 있을 것이고, 노도 많이 달 수 있소.”
이 배엔 돛이 달리지 않는다. 대신 5개 신도시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새로운 ‘동력’이 실리는데, 그것이 출력할 때 노를 저어 좌우 미세한 기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배란 것이 본디 먼 곳을 항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탈것이 아니오?”
번의 말에 마법사들이 끄덕였다.
“그렇지요.”
“허나 저것은 그런 용도가 아니오. 철저하게 공격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지.”
“아..”
“저 뱃머리가 비어있는 까닭은 선두에 적의 배를 들이받을 수 있는 강한 철판을 대기 위한 것이고, 상대를 쪼개버려도 이쪽의 내구성은 전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저리 세밀하게 작업을 하는 거요.”
배는 철저하게 공격과 수송을 목적으로 한다. 거기에 부족한 방어력을 마법사들에게 부탁하려는 번이었다.
터틀 쉽.
익숙한 말로 바꾸자면 거북선이 여기 나일에서 이렇게 건조되고 있었다.
번은 이렇듯 마법사들과 함께 도시를 촘촘하게 설계해나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론 아름다운 유흥단지 조성을 위해서라곤 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도시보다 품이 많이 들어간 철옹성을 만들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한계까지 태우면 1척에 800명 이상 탑승 가능한 거북선이 25척이나 만들어지고, 거북선을 무장할 신개념 무기와 동력원의 부품이 5개 신도시에서 완성단계에 있다. 그들은 자기가 뭘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세상을 진동케 할 혁신적인 기술인 것을 상상도 못 하면서 말이다.
“때가 되어 저것이 완성되면 모두가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라는 번의 눈빛에 마법사들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저런 큰 배를 보호할만한 마법을 쓰려면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녔다. 게다가 마법사의 노동력은 아주 값비싼데, 그걸 거의 착취하다시피 공짜로 부리려는 번의 행동에 불편한 심기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조차 짐을 싸진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도 궁금한 것이다.
‘신성력을 뿜어내는 식물이라니!’
‘발광하는 나무라니! 허얼, 그냥 빛도 아니라 속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기적이야!’
‘식물 키메라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조화로워. 이것저것 잘라 붙였다는 느낌이 안 들지 않나?’
‘대공은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었을까?’
빈민들은 그저 생활에 도움을 주는 신기한 식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마법사들에겐 새로운 학문이자 연구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콩가의 이름있는 마탑에서 전부 마법사들이 삼삼오오 파견을 나왔다고 하니, 그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번은 그들을 이끌고, 강변을 떠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펼쳐지는 나일은 과거의 모습을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사는 천막이나 움막 따위는 완전히 걷어내진 못했지만, 일단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우선, 굶는 자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강변으로 가서 배를 만드는 것에 참여하면 하루 배불리 먹을 식량을 탈 수 있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시관리’에 참여만 하면 역시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이 아직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빈민가 전체가 달라붙어 품을 팔고, 애들은 잡일을 하며 여인들은 음식을 나르며 부지런을 떠니, 이제 이곳에선 할 일 없는 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지점부터 저기 바위지대까지 성벽을 쌓을 생각이오. 외부의 침입을 막고, 도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컨트롤 타워가 되는 셈인데, 안쪽엔 폭발 성분을 띈 식물을 심어 유사시 바로 사용할 수 있게 할 생각이라오.”
“포, 폭발 속성이요?”
“그게 가능합니까?”
마법사들은 번이 또 뭘 시키려나 듣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떴다.
땅, 물, 바람, 불, 마음 같은 속성이야 워낙 자연에도 널리고 익숙했으니 특별할 것 없다지만, 폭발은 다르다. 이것은 화학적인 작업을 거쳐 물리적으로 만들어내거나 불, 나무, 철의 속성을 잘 배합해 고도로 훈련된 마법사가 다뤄야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식물 하나로 얻어낼 수 있다니? 말이 되나?
물론, 번도 최근에야 이걸 발견해 냈지만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필요하면 다 길이 있는 법이라오.”
피식 웃는 번이 다시 걸었다.
배가 완성되면 남게 되는 인력으로 이곳에 성벽을 건축하고, 그걸 아주 단단하게 만들 생각이다. 이곳은 부두와 나일을 지키는 핵심 시설이자, 요새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이 많이 들어가야만 한다.
사실 이것의 목적은 일종의 전초기지 역할을 겸하는 것이었지만, 아직은 그런 속내를 외부에 밝힐 이유가 없었다.
「폭爆 씨앗이 조합되었습니다.」
「81개의 폭爆 씨앗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번은 머릿속으로 들리는 메시지를 들으며 끄덕였다.
조합, 혹은 합성이라고 하는 이 능력도 식물의 삶을 통해 깨우친 것이었다. 77종의 스킬은 아직도 밝혀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으며 계속해서 틈이 날 때마다 이렇게 개발 중이었다.
'오늘은 이 정돈가?'
다행히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번의 오장육부 중 위胃에는 작은 기관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이곳에 씨앗 주머니가 생겼다. 여자들의 난소와 비슷하다 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일정한 속성을 주입하면 씨앗이 생성될 때 특별한 특징을 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몇 번 해보다 보니, 정말 다양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지금 만들고 있는 폭발 속성의 씨앗도 그렇게 탄생했고, 나무木와 물水, 불火을 적절하게 섞으니 철鐵이나 합금 형태의 식물 씨앗도 생겨났다.
이건 땅에서 자원을 채취할 필요가 없어진 획기적인 발견이자 놀라운 능력이었는데, 단점은 아주 느렸다. 일반적인 씨앗들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몇 배는 더 걸렸기 때문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지.'
번은 언제나 그랬듯 실망하지 않았다. 첫 단추만 끼우면 나머지는 시간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씨앗 주머니가 위에 자리 잡은 것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인간의 오장육부 중에서 비대하게 늘어날 수 있는 기관이 바로 위 아니던가? 훗날 더 커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 수고하시오!"
"···네.."
"······."
떨떠름한 표정의 마법사들이 각자 자리를 찾아가자 번은 다시 생각에 잠긴다.
‘물길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지.’
아직은 번의 이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강은 그렇게 저 먼 북쪽 땅에서부터 콩가를 지나 제국과 에비뉴를 거쳐 남쪽 끝 바다까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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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름이 지났다.
오늘은 비가 왔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빗방울은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몸집을 불리더니 그야말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좍좍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무리 강변이라지만 최근 비가 오지 않아 바짝 말라 있던 땅은 오랜만에 실컷 목을 축였다.
이날 밤.
미루가 은밀하게 번을 찾았다.
“대공.”
번이 책상에 앉아 어떤 도면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본다.
일이 있어 오늘 아침 수도로 떠났던 미루다.
“······?”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이 보이자, 번도 하던 일을 멈추었다.
“출발이 늦어진 건가? 아니면 다시 돌아온 것인가?”
“돌아왔어요. 우선 이것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미루는 수도로 향하던 길에 급보를 전달받고 말머리를 돌렸다. 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이었지만, 번과 상의 결과에 따라 수도의 일도 달라져야 하기에 직접 온 것이다.
미루가 건넨 양피지를 받아든 번.
최근 에비뉴 산 종이가 큰 인기를 끌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양피지는 널리 쓰인다.
「마왕 출현!」
「어둠의 군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다!」
「폴라리스 동남부! 유목민들에게 피난 권고!」
「폴라리스 왕실, 군대를 급히 파견! 주변국에게 지원요청 사절단 파견!」
소문은 아주 이전부터 있어 왔다.
번이 심어둔 허리케인 아이 때문에 몰려든 몬스터들의 집단행동이 보통 사람이 보기엔 아주 이상했기 때문이다. 몬스터 개체 수의 한계가 있어 최근엔 좀 뜸해졌다지만,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이 세계에 기사, 마법사, 악마, 용사가 있다면 마왕도 그만큼 익숙한 단어였으니까.
‘잘하고 있군.’
번은 피식 웃으며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그 해골바가지는 딱 봐도 보통 사람이 보면 까무러칠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다. 거기에 어둠과 신성력에까지 무적일 정도로 강한 녀석이니, 몬스터들을 휘어잡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융이 붙어 보좌까지 하고 있으니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 아니겠는가? 그런 조건을 가지고도 이만큼도 못하면 그게 등신이다.
“마왕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가 모이고 있다고 해요.”
미루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번의 얼굴엔 미소가 더욱 진하게 그려졌다.
드디어!
그간 뿌려둔 씨앗이 싹을 틔운 것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