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빵이야 #
행복.
이걸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돈이 얼마나 있어야 행복하지? 원하던 성취를 이룬다면 행복할까? 사람마다 다르고, 정신력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겠지만, 카시오페이아는 그저 하루에 10번만 웃을 수 있다면 행복한 하루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 역시 단 한 번도 웃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낸 삶을 살아봤으니까.
100번 1,000번이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힘든 몸으로 집에 돌아와 아이 얼굴 한번 보고 웃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응원에 또 한 번 웃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되지 않을까 싶은..
‘제가 가요.’
그녀도 그에게 그런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힘차게 달리는 마차를 재촉해 세븐 스타에 도착하자마자 영주의 환대도 뿌리치고 나일로 향한 카시오페이아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게 다 뭔가요?”
그녀가 생각하던 빈민가는 없었다.
“저도.. 잘..”
피벗 공작 역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영주에게 대답을 구했지만, 영주 역시 이곳은 오늘 처음 와봤다.
빈민가라 하면 일거리가 없어 사람들은 길 여기저기에 하릴없이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시비나 걸어대고, 아이들은 더러우며 쓰레기는 사방에 널려있어야 했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인들이 싸구려 화장술로 누렇게 뜬 천박한 얼굴을 들이밀거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행패나 벌이는 사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딱 그런 광경을 가진 빈민가가 세븐 스타 내에도 있었다. 그러나 듣기론 그런 곳과는 상대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의 빈민가가 여기 나일이라 하지 않았는가?
꾸르르르르!
마차에서 내린 드래곤이 뭔가를 발견하고 날갯짓하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네이!
-혼자 움직이지 마!
용기병이 급히 뒤따랐는데, 드래곤은 어떤 식물 앞에서 취한듯한 모습으로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흡사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그런 울림을 녀석은 냈다. 그 까만 식물은 사람이 보기엔 아주 불길했지만, 블랙 드래곤에겐 세상 둘도 없는 친구라도 되듯 정감있는 녀석이었다.
"이게..대체.."
이런 식물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모든 곳이 이렇진 않았지만, ‘큰길’이라 할 수 있는 주변은 깨끗했는데, 호기심 반, 두려움 반 섞인 사람들 표정도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마침 흩어졌던 용기병들이 돌아왔다.
“새마을운동 중이라고 합니다.”
“새마을운동이요? 그게 뭐죠?”
여왕의 물음에 용기병은 자세히 사람들의 말을 전했다.
“이 더럽고 불결한 곳을 사람 사는 곳 답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는데, 마침 할 일이 없던 사람들이 많아 적극 참여하고 있답니다.”
노동력은 충분했다. 그간 그들을 휘어잡아 움직이게 할 원동력과 중심축이 없어서 그랬지 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어어어? 하면서도 따랐다.
어느 안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루 만에 사람들을 괴롭히던 블루 울프와 던 나일이 박살났는데.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제가 이곳을 안내해줄 자를 불러오라 했습니다.”
팔에 노란 천을 묶은 사내가 쩔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던 나일의 중역이었던 그는 이제 다리가 부러져 제대로 걷기도 힘든 불구가 되었다. 그런데도 움직인다. 저 강물에 떠밀려가긴 싫었으니까.
“소,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여왕이 행차하셨다. 이미 강 주변은 발칵 뒤집혔고, 천막 안의 사람들은 두려운 얼굴로 눈만 빼꼼히 내밀어 구경 중이었다.
“대공은 어디에 계시나요?”
여왕이 피벗 공작에게 묻자, 노란 천의 사내는 저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미 번에 대한 소문은 자자했다.
그의 정체가 에비뉴의 태자이며, 여왕의 남자란 것을 짐작하는 덴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순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신분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더욱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이라는 웃기는 행사에 동참하면서도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하루가 다르게 곳곳에 예쁜 식물이 자라고 거리가 깨끗해지자 주민들 표정도 차츰 밝아졌다.
‘역시 대단하신 분.’
이야기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카시오페이아는 크게 끄덕였다. 그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런 곳까지 돌보겠는가? 평소엔 참 무뚝뚝하고 사내다운 박력 물씬 풍기면서도 이런 단면을 볼 때마다 새롭다.
40분쯤 걸었나?
“아..”
카시오페이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호오.”
피벗 공작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누가 봐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건 무엇인가요?”
여왕의 질문에 노란 천 사내는 깍듯하게 대답했다.
“파란 식물은 물을 뱉어내는데, 그것이 흐르고 고여 저렇게 샘이 되었습니다.”
배움이 짧아 다소 단어사용이 거칠긴 했지만,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저 앞, 약 10미터 정도의 작은 개울은 맑고 깨끗했으며, 그 중심에 푸른 식물이 30그루 정도 자라있었다. 그 주변으로 첨벙첨벙 아이들이 발을 걷어붙이고 뛰놀고 있었고.
“저것은요?”
“저 하얀 군락지는 병들고 다친 이들에게 큰 힘이 되어줍니다. 신기하게도 저곳에 가면 마음도 편해지는게 요상하고요.”
신성력 가득 머금은 50그루의 식물은 힐링 필드나 다름없었다. 의사나 간호사도 없지만, 신의 힘이 미쳐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영향을 받았다.
이렇 듯 나일 곳곳에는 몇개의 군락지가 색색별로 구역이 나뉜 채 넓게 퍼져 있었는데, 유명한 정원사가 피땀 흘려 가꿔낸 아름다운 꽃밭 같았다.
“일..주일도 안됐다 하지 않았나요?”
궁에서 들었을 때, 나흘 됐다 하였으니 여기까지 이동하며 이틀. 그래 봐야 얼마 안 됐을 거다. 그런데 그사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원랜 어땠는진 모르니 가늠할 수 없다고 해도 이건 아주 놀라운 변화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 예상보다 이곳 사람들은 더 크게 체감 중이었다.
여긴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지면 위의 오물을 걷어냈지만, 토양까지 시커멓게 죽어 있었는데, 대공이란 자가 땅에 뭔가를 뿌리는가 싶더니 이렇게 변했다.
기적.
땅은 신성력과 오색 마나를 품은 식물들에 의해 정화되고, 썩은 물 대신 맑은 물이 고였다. 그랬다. 이곳 사람들은 대공을 기적의 사나이라 부르고 있었다.
뭐, 사람들이 어찌 부르든 이 남자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 오셨소? 이런 외진 곳까지.”
커다란 천막에서 나오며 카시오페이아의 손을 잡아주는 번.
“걱정이.. 돼서요.”
막상 와서 보니 그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바로 알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하! 내가 애도 아니고 걱정은 무슨! 자, 들어갑시다.”
카시오페이아의 뒤를 드래곤이 뒤뚱뒤뚱 따라 걸어들어왔다.
“생각보다 넓네요?”
쓰레기 좀 치웠더니 어른 30명이 들어차도 답답함이 없을 공간이 나왔다.
“낯설어서 그리 느껴지는 것이라오.”
번은 미소 지으며 카시오페이아를 부축하듯 안아주며 의자에 앉혔다.
“어떻게 하신 거에요?”
“뭘 말이오?”
“밖에..”
“아! 하하! 보셨소?”
어찌 안 보겠나.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내, 전에 북쪽 산에 갔을 때 작은 성취를 얻었는데, 그걸로 이것저것 시험을 해보고 있던 중이었소.”
“마법을 배우셨어요?”
“마법이라고 하면 그리 부를 수도 있고, 아니라 한다면 아닐 거요.”
애매한 대답을 웃으며 해대는 번을 보며 피벗 공작이 묻는다.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아아, 보다시피.”
번은 어깨를 으쓱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놈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일 놈은 죽이고, 죄를 뉘우칠 것 같은 놈들은 노란 완장 채워서 사람들을 도우라 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으니 게으름 피웠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놨더니, 다리가 부러진 놈도 목발 짚고서라도 일을 했다. 일종의 도우미랄까?
“멀쩡하오. 신경 써 줘서 고맙소. 공작.”
그가 카시오페이아를 수행했다는 것을 알기에 고마움의 뜻으로 팔을 두드려주었다. 그녀 혼자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까. 게다가 이건 번이 예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다.
“이왕 오셨으니, 푹 쉬다 같이 가십시다.”
번의 말에 카시오페이아는 행복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하지만 피벗 공작은 그렇지 못했다.
“얼마나 있다가 가실 생각이십니까?”
번은 으쓱하며 대답했다.
“빨라도 보름은 걸리지 않을까 싶소만?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좋소.”
“아닙니다. 보름이라면..”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겠지만, 어떻게 될 것 같긴 하다. 며칠 고생을 하더라도 그 역시 보고 싶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말이다.
“걸을 수 있겠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번이 카시오페이아에게 물었다.
“네.”
“그럼 갑시다. 주변에 볼거리가 아주 많다오. 여기 사람들도 그대를 보면 아주 기뻐할 것이고.”
그 말에 머뭇거리는 카시오페이아의 손을 번이 따스하게 잡아주었다.
“겁먹을 필요 없소. 다 사람 사는 곳 아니겠소?”
번은 그렇게 카시오페이아와 가볍게 산책을 나섰다.
이후에도 하루 한 번은 꼭 강 언저리를 둘러보았는데, 그가 지나는 길엔 어김없이 식물이 자라났고, 이제 근처에 모든 식물의 수를 더하면 1,000그루가 넘어갔다.
이게 참 신기한 게 그가 초기에 심었던 딱지 꼬마 집 앞 식물은 이제 나무처럼 키가 커져 있었는데, 줄기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몸통은 두꺼워졌고, 사람의 머리 위에서 빛을 뿌렸다. 낮엔 볕을 쬐며 빛을 축적하고, 밤에 다시 그 빛을 토해내며 사방을 밝히니 사람들은 절로 알게 되었다. 이곳의 모든 식물이 이렇게 자랄 수도 있겠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바뀔 수 있을 수 있을까?
또한, 여왕께서 오셨다.
그러자 분위기가 이전과 180도 변했다. 영주는 기사들을 이끌고 매일같이 찾아와 여왕의 눈에 띄려고 노력했고, 신비로운 식물에 대한 소문이 퍼져가자 세븐 스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된다. 빈민들은 그들을 상대로 먹거리나 강에서 흔히 주울 수 있는 조개 장식품 따위를 팔며 장사를 하기도 하고, 짐을 들어주며 품삯을 받기도 했는데, 이 모든 일이 열흘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놀랍군..”
노을 지는 저녁.
피벗 공작은 높은 지대에 올라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죽은 지역에 숨을 불어넣었다. 단 한 사람이 한 일이었고, 지금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관광이라는 개념이 없는 이 시대에 도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빈민가를 찾아오리라는 건 생각도 못 했던 피벗 공작의 눈엔 모든 것이 놀랍고 새롭다.
“추진력 하나는 정말..”
사람들은 영주가 여왕에게 잘 보이려고 찾아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게 아니다. 그는 와서 대공과 계속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도시개발사업.
처음엔 마음대로 해보시오, 라며 한발 물러섰던 영주도 이제는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게 되어버렸다. 여왕까지 직접 오신 것도 그렇지만, 세븐 스타 바로 옆에 작은 도시가 또 하나 생긴다는 것 자체가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곳을 직접 체험하고 있질 않나?
그래, 도시다.
조그만 구역 하나 떼어내 유흥단지를 만드는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번이 생각하는 이 나일은 이제껏 대륙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꿈과 희망 쾌락이 공존하는 멋진 휴양지로 거듭나려 하고 있었다.
처음 상업특구로 시작했던 5개 신도시가 이렇게 성장한 것을 보면 아마 이 유흥단지도 사람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피벗 공작이 이렇게 상념에 잠겨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상류 저 끝까지 시선을 옮겼다.
‘배라..’
아까 번이 슬쩍 여왕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페르나 왕국이 있다.
-나는 단순히 없이 사는 이들을 구제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남자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배를 준비해야 하오. 저 거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튼튼한 놈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