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54화 (154/177)

# 누가 그래? #

온갖 잡놈들이 다 모여있는 시궁창.

귀족들은 이곳을 그리 불렀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일 뿐이다.

“······.”

다루가 분위기를 훑어보러 자리를 비우자, 번은 홀로 강변에 서서 주변을 본다. 그런데 뭔가가 옷깃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옆으로 내려보자 코 흘리게 한 녀석이 꾀죄죄한 고사리손으로 번의 옷을 잡고 올려보고 있다.

“아찌는 누구예요?”

근처에서 보던 사람이 아니어서 신기한가 보다.

“여긴 울 집인데.”

크응, 콧물을 들이마시며 녀석은 대답을 요구하듯 눈을 깜빡였다.

“손님.”

“울 집에 놀러 왔어요?”

“그래.”

번은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콩가의 미래라고 볼 수도 있는 아이. 그러나 여기 아이들은 십중팔구 이곳에서 죽을 거다. 어쩌면 어른이 되기도 전에 저 강에 버려질 수도 있고. 워낙 많은 사람이 도시에 들어와 있기에 아무도 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아에 시달리던 벨버른의 그때와 비슷하지만 어쩌면 더 소외당하는 사람들.

그게 여기, 나일이었다.

“여기엔 아찌처럼 좋은 옷 입은 사람 없는뎅. 그런 옷 입으면 잘생겨져요?”

“난 원래 잘생겼단다.”

뻔뻔하게 말하는 번의 말에도 꼬마는 그저 재미있는지 히죽 웃었다. 그러다,

“잠깐만요! 아찌, 어디 가면 안 돼요!”

녀석은 뭔가 생각난 것인지 후다닥 저쪽으로 뛰어갔다. 여기가 제 놈 집이라더니 진짜 그랬나보다. 저기 보이는 천막이 집이면, 여긴 앞마당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쏘옥, 그 후줄근한 천막 속으로 들어가는 가싶더니, 금세 뭔가를 들고나온다. 그리곤 초롱초롱한 눈으로 번에게 외쳤다.

“나랑 패 쳐요!”

“······.”

녀석은 네모난 어른 손바닥 크기의 뭔가를 들고나와 하나를 번에게 건네주었다. 종이가 아닌 누런 양피지로 만든 것인데, 번은 이게 뭔지 한눈에 보고 알아차렸다.

‘딱지?’

문화가 달라도, 시대가 달라도 심지어 이계에도 사람 사는 곳은 비슷했다. 가진 것 없는 아이들의 놀잇감 역시 그러하리라.

“혼자 하면 재미없어요! 어서요! 아저씨가 먼저 해요! 내가 특별히 양보할게요!”

녀석은 바닥에 자기 패를 던지더니, 번에게 강요했다. 쳐서 뒤집으라는 거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 가면 친척들이랑 모여 간혹 하곤 했던 놀이. 옛 생각에 번이 무심코 팔을 들었다. 그리고는,

퍼엉-!

“허어어어어어억..!”

꼬마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맞닿은 패 두개가 너덜너덜 터져버린 거다.

“아아..”

힘 조절을 한다고 한 건데, 추억이란 놈이 끼어들었나 보다.

“야..”

번은 머쓱한 눈으로 꼬마를 바라보았다.

울먹울먹.

아아, 터진다.

“우에에에에에에에엥!”

눈물이 더 많이 나오는지, 콧물이 더 많이 흐르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범벅되는 꼬마의 얼굴을 보며 번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 소란 때문일까?

“클로비! 무슨 일이니?”

아까 꼬마가 들어갔었던 천막에서 여인이 기어 나왔다. 입구가 얼마나 낮고 협소하던지 저렇게 몸을 잔뜩 숙여야만 다닐 수 있는 모양이다.

짐승같은 삶.

“이 아찌가! 이 아찌가..! 후에에에엥!”

서러운지 설명도 못 하는 꼬마를 여인이 후다닥 뛰어와 안았다.

“엄마가 아무랑 말하지 말랬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여인은 병색이 완연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못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철이 없어서..”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물을 감추듯 꼬마를 안은 채로 몸을 돌려 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여인은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낯선 사내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일단 옷차림도 그러했고, 그런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이 동네를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인데, 멀쩡하지 않나?

이때, 짙은 먹구름이 달을 가렸다.

흠칫. 놀란 여인이 품안의 꼬마를 더욱 꽈악 끌어안고는 어서 이 어둠이 걷히길 기다렸다. 이건 일종의 습관인 것 같다.

"······."

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따금 모닥불 같은 것이 피어있긴 하지만, 이미 주변의 나무는 죄다 갖다 썼는지 어둠을 밝히긴 힘들어 보였다. 수도 곳곳에 있는 마나가로등 따위는 기대도 못 하는 낙후된 환경. 비참하고 처참하다 못해 비 맞은 길고양이를 보는 것 같이 안쓰럽다.

솔직히 번이 이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워낙 다양한 삶을 경험해왔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길들여진 사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런 그도 가끔, 아주 가끔은 감상에 빠질 때가 있는데,

욱씬.

지금이 그랬다.

마음이 움직여서였을까?

“음?”

그의 가슴 속 어딘가가 꿈틀댔다.

그건 곧장 뇌로 자극을 전달했고, 번의 내부에서 뭔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씨앗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씨앗?’

77종의 식물 능력은 아직 전부 써보지도 못했다. 광합성이나 뿌리를 내려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는 것은 해봤지만, 다른 능력들은 아직 베일에 가려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개화開花한 것이다.

「씨앗에 속성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의 몸속에 품고 있는 어둠, 빛, 불, 물, 신성력.. 등을 씨앗에 담아 발아시킬 수 있다는 것일까?

“흐음.”

번이 갸웃하며 힘을 끌어올리자,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구멍 저 아래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뭔가가 혀 안쪽으로 올라온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그것을 혀로 밀어 잡아보니,

새끼손톱만 한 작은 것.

동글동글하고, 넓적한 호박씨 같은 것이 잡혔다.

“훌쩍, 훌쩍.”

아직도 엄마의 품안에 박혀 콧물을 흘리는 꼬마를 향해 번이 말했다.

“울지 마라. 대신 좋을 걸 주마.”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호기심에 여인과 꼬마가 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잘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해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번은 씨앗을 바닥에 떨구고, 발끝으로 그걸 비벼 밟았다.

1, 2, 3초.

더 흘러 10초, 15초.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던 꼬마의 눈빛이 기대감에서 초조함으로, 그게 다시 실망으로 바뀌는 대엔 충분한 시간 흐르자,

“후아아앙..!”

다시 터져버린다.

“······.”

번은 생각대로 잘 안 되는지 어깨를 으쓱하다가 저쪽에서,

-대공!

다루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다시 고개를 돌려 꼬마에게 돈이라도 몇 푼 쥐여줄까 하다가 머리를 흔들고 발길을 돌렸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돈은 재앙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앗! 저 아찌! 도망간다!”

그래, 도망가신다.

번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루에게로 걸어갔다.

“어때?”

“짐작대로예요. 이 근처를 지배하는 무리가 있었어요.”

세상 어느 뒷골목이든, 어떤 환경이든 사람이 모이면 그들을 착취하려는 세력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규모는?”

“두 곳이 제법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데, 자잘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블루 울프’와 ‘던 나일’이란 이름의 무리들은 설명우식으로 설명하자면 조직폭력배와 비슷했다. 힘 좀 쓰는 남자들이 모여 사람들을 갈취하고, 폭력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다루의 설명을 들은 번은 말했다.

“가지.”

“지금 바로요?”

비릿하게 웃으며 끄덕이는 번을 보며 조마조마한 얼굴로 침을 삼키는 다루. 아무래도 전장과 이곳은 느낌이 아주 달랐기에 긴장을 풀 수 없는 거다. 중요하신 대공께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때,

“어..?”

번의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무심코 돌아본 번.

“어머?”

다루도 본다.

어느새 자랐을까?

나무라고 하기엔 그렇고, 풀이라고 하기엔 좀 굵은 두께의 식물이 허리 높이로 올라와 있었다. 그게 스윽 클 때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변도 어두웠기에 바로 옆의 여인과 꼬마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순간, 빠르게 자란 식물은 목표에 그새 도달했다는 듯 콩나물 대가리 같은 머리를 반으로 쪼개더니, 한껏 벌렸다.

촤아아아아아.

실제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런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은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지고,

“어? 어어어?”

“에구머니나!”

꼬마와 여인이 함께 자빠질 정도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식물이 발광發光한 것이다.

녀석의 대가리에선 주변 천막들을 대낮처럼 밝힐 정도로 밝은 빛이 넓게 퍼져 나왔는데, 참으로 신기한 건 그게 눈을 찌푸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편한 빛이란 것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여인은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에서도 눈을 손가락으로 비벼보았다. 하늘을 보았지만, 아직도 달은 구름에 가려있다. 그런데도 오직 이곳만 밝았다.

“마, 마법?”

여인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아까 수상한 남자가 서 있던 바로 그곳을 향해 말이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대공께서 하신 거에요?”

“그냥, 간단한 실험.”

번과 다루는 걷고 있었다.

블루 울프란 놈들이 근처에 있다고 하니, 어디 한번 보려는 거다. 황야를 질주하는 거친 야성의 맹수인지, 시체나 뜯어먹으며 악취를 풍겨대는 하이에나인지.

‘감히 늑대란 이름을 쓸 자격이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짧지만 아주 강렬했던 삶의 기억이 그에겐 있었다. 어린 늑대로 살며 어미에게 황야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던 그 시절을 말이다.

그 제왕의 야성을. 친구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적도 이겨낼 수 있을 투지를 갖춘 늑대라는 동물을.

틱, 틱.

번은 옛 추억을 생각하며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뭔가를 뱉어 바닥에 던졌다. 아까 꼬마의 천막 앞에선 씨앗에 빛 속성을 담았었는데, 지금은 이것저것 다 해보는 거다. 예상하건데, 주변에 강이 있기에 수분도 충분한 것 같고, 쓰레기로 뒤덮인 곳이었기에 양분도 넉넉한 것 같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될까? 궁금하다.

그렇게 그는 지나는 길에 씨앗들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어떤 놈은 조금 빠르고 길게, 또 어떤 놈은 짧고 굵게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아.. 예뻐요.”

다루는 뒤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어느새 파랗고, 빨갛고, 하얗고, 노란빛들이 그들이 지나온 길에 보석처럼 뿌려져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만들 수 있을지를 모르겠군.”

“네?”

“아니야. 계속 가지.”

번은 계속 실험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에겐 무엇이든 필요할 것 같다.

“흐으음..”

번은 뒤를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 막 자란 파란 식물 하나가 대가리에서 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물水 속성을 담아 던진 건데, 저러고 있으니까 군침을 줄줄 흘리는 마계의 식물 같았다. 하지만 저것 또한 물이 필요한 이들에겐 아주 요긴하게 쓰이지 않겠나?

더 지켜봐야 겠지만, 빛을 담으면 그것을 가로등처럼 쓸 수 있을 것이고, 물을 담으면 수도처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식물이 얼마나 살고, 뿌리를 뽑아도 작동되는지, 낮에도 빛을 발산하는지 따위는 후에 사람을 시켜 관찰해보라고 하면 될 일.

‘이거 괜찮은데?’

어느덧 사람들도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심한 밤이었지만, 누군가 오줌을 싸러 나왔다가 보기도 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이러 나온 연인도 있었으니까.

‘100개까진 되는군.’

아직 더 해봐야겠지만, 한계를 알아야 필요할 때 오차 없이 써먹을 수 있을 거다. 이게 몸속 기운을 소비하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효율적으로 써먹을 곳도 구상해봐야 했다.

이때쯤,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식물이다 보니 바람에 기울기도 하고, 사람들 손길에 갸우뚱하기도 해서 마치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달빛 아래 100개가 넘게 피어난 그것들은 그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며 장관을 연출했다.

“와아.. 진짜 예뻐요.”

다루가 감탄할 때, 번의 머릿속에서 악마가 말했다.

-창조는 오직 신神만 할 수 있는 영역인데..?

놀란 듯 말하는 녀석에게 번이 말했다.

‘누가 그래?’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부모는 자식을 낳아 키운다. 이게 창조가 아니면 뭐겠나?

‘그놈들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어떤 묘한 깨달음을 얻은 번의 표정을 힐끔 훔쳐보며 다루는 마른 침을 억지로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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